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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해왕 한국금융연구원장
[인물] 정해왕 한국금융연구원장
  • 이승철 기자
  • 승인 2003.04.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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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부실 처리 대충은 곤란


한바탕 포연이 휩쓸고 지나간 금융시장에는 여진이 자욱하다.
신용카드사와 투신사의 유동성 경색을 해소하기 위한 정부의 ‘4·3 금융시장 안정대책’이 얼마나 유효하게 진행될지 의견이 분분하다.
4월14일 한국금융연구원은 이번 조치가 시장 유동성 위기를 억제하는 데는 효과가 있겠지만, 카드사의 도덕적 해이를 막지 못해 실패한 ‘절반의 대책’이라고 비판했다.
금융연구원은 또 정부가 부실 카드사를 엄격히 인수·합병시키고, 최악의 경우 과감히 퇴출시키는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오랜 금융 중심지인 명동 한복판에 자리잡은 금융연구원은 정부의 금융정책 과제를 연구하는 것이 주된 임무여서, 정부에 대한 이런 공세가 이례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종종 국책·준국책 연구기관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지만, 금융연구원은 1991년 은행들이 공동출자해서 기존 은행연합회 조사부를 확대·개편한 엄연한 민간연구소다.


93년 부원장으로 연구원에 첫발을 들인 정해왕(56) 금융연구원장은 98년 원장에 취임, 두번째 연임하며 연구원을 이끌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공적자금관리위원으로 위촉되면서, 조흥은행 처리라는 굵직한 현안을 맡게 됐다.
그는 외환은행에서 13년간 근무했고, 미국 켄터키주립대 경영학 교수를 거쳐 대신경제연구소 대표이사를 역임한 바 있다.



요즘 각 분야의 경제관료들이 금융연구원을 활발히 거쳐가는 모습인데요(얼마 전 연구원에 있던 이동걸 위원이 인수위를 거쳐 금감위 부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청와대 비서관 출신 경제관료 2명과 수출입은행장 후보로 거론되는 신동규 전 재정경제부 기획관리실장 등이 새로이 금융연구원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 연구원이 인기있는 자리인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예전부터 재무부, 한국은행, 국세청, 감사원 등에서 우리 연구소에 파견근무 나왔습니다.
각 경제부처의 데이터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죠. 지금도 매년 3명이 왕래하고 있어요. 이들은 복직해서도 우리 연구원과 유대를 지속하고 관련업무를 계속 맡습니다.
게다가 올해 우리가 연구실을 한층 늘리면서 공간 여유가 생기는 바람에, 남상덕 전 비서관 등 일시적으로 공백이 생긴 분들이 우리 연구원에 자리를 부탁하네요. 엄낙용 전 산은총재와 이경재 전 기업은행장의 경우, 우리가 상근고문으로 초빙해서 실무분야의 조언을 얻고 있어요.


신임 공자위원으로서 조흥은행 매각문제에 어떻게 접근하실 생각입니까.

두가지 측면, 즉 공적자금 회수를 극대화하기 위해 비싼 값에 팔아야 하는 측면과 은행 대형화를 비롯한 금융산업 구조재편의 일환으로서의 측면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접근방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금융기관 대형화는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업종별로 4~6개 정도의 대형기관이 적당하고 그밖에 부문특화기관이나 지역밀착형 소규모기관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동북아 금융허브에 걸맞는 대형은행이 필요하고 거기에 비딩할 투자은행도 필요하니, 정부가 주도해서 하나씩 만들어가야겠죠.


조흥은행의 독자생존 가능성은 어떻습니까. 매각이 불가피할까요.

조흥은행의 합병은 굉장히 가슴아픈 일이에요. 선발 5개 시중은행이 모두 사라지게 됐으니. 그들이 시대변화에 잘못 대응했고, 기업금융에만 몰두하다가 부실화한 것이니 달리 방법이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조흥은행은 꽤 탄탄하고 여러가지 강점이 많은 은행입니다.
가계부문 고객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우수하다고 평가합니다.
앞으로 실사자료를 검토하고 조흥은행의 현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뒤, 독자생존이냐 신한지주와 합병이냐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조흥은행 문제를 놓고 공자위에서 이동걸 금감위 부위원장과 다시 일할 텐데요. 평소 이 부위원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렇게 되겠네요. 이 부위원장이 청와대에서 김태동 전 경제수석과 함께 일할 때 처음 만났어요(정 원장과 김태동 금융통화위원은 서울대 65학번 동기로 오랫동안 절친한 사이다). 생각이 건전하고 일을 매끄럽게 처리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청와대를 떠날 때 금융연구원으로 올 것을 제의했는데, 금융개혁과제를 제대로 연구하고 싶다며 KDI로 갔다가 결국 금융연구원으로 왔습니다.
내가 일요일에 교회에 갔다가 연구원에 들러보면, 이 부위원장이 일요일에도 나와 말없이 일하는 모습을 여러번 봤어요.


(정 원장은 이전에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 한번씩 자신을 공자위원으로 추천했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공자위가 외환위기 직후부터 가동되었어야 했는데, 왜 주요 자금투입이 거의 끝난 2001년에야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한다.
)


오래 전부터 카드 등 가계부실 위험을 지적하셨는데, ‘4·3 대책’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2년 전부터 가계부실 여부를 감시하라고 줄곧 경고했는데, 일이 이렇게 번져서 안타깝습니다.
4·3 대책이 기술적으로 얼마나 정교하게 짜여졌는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려워요. 다만 진입과 퇴출의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쉽습니다.
정부가 금융기관 감독을 철저히 하든지 부실기관을 시장에서 퇴출시키든지 태도를 분명히 해야 시장 플레이어들에게 경각심이 생길 텐데, 부실 책임자에 대한 책임추궁이 부족합니다.
잘못하면 부실이 타 금융기관으로 전이 될 테니까요. 제재와 퇴출을 겪으면서 시장이 얼마나 안정될 수 있을지 정확한 자료가 없어 단언하기 어렵지만, 계속 유보하고 대충 넘어가서는 곤란합니다.



이런 혼란이 되풀이되는 우리 금융시스템의 근본적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금융은 한쪽으로 돈이 몰리면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에요. 카드사가 본연의 임무보다 돈장사에 치중하면서 처음 1~2년은 이익이 팍팍 늘었지만, 위험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입니다.
근데 어느 나라든 1인당 소득이 1만~2만달러인 무렵에 소비가 급증하고 소비지출 증가에 성장을 의존하는 단계를 거칩니다.
우리도 세계적 경기침체 속에서 소비를 부양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성장세를 이어온 점은 긍정적이기도 해요. 그러나 문제는 각종 세제혜택을 주는 식으로 너무 단기간에 소비지출을 부양시킨 후유증이 크다는 겁니다.
외환위기 이후에도 투신권에 돈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투신잔고가 몇배 늘었다가 대우사태가 커진 것 아닙니까. 나도 은행 돈으로 일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이제 우리 금융은 은행 중심에서 주식, 자본시장으로 중심이 옮겨가야 해요. 주식시장이 살아나면 카드채 문제도 꽤 해결될 수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금리정책이 유효할까요.

지금은 현상유지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금리를 내려도 투자로 연결될지 의문스럽고 불확실성이 더 큰 변수라서, 금리가 과거만큼 큰 역할을 할 수가 없어요. 유동성이 증가하면 소비는 늘겠지만, 자칫 부동산쪽으로 자금이 흘러갈 우려가 있으니 신중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카드대출 등 가계부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지난해 1분기에 금리를 0.5% 이상 많이 올렸어야 했는데, 그때 경제가 어렵다고 차일피일 미룬 겁니다.
8월에 가서야 0.25% 인상한 것은 뒤늦은 조치였어요. 또 그때 금리를 올렸으면, 올 들어 조금씩 인하하면서 경기를 조정할 수 있는 여지도 많을 것 아녜요.


(5, 6공 시절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던 정해창 변호사가 정 원장의 친형이다.
정 변호사는 한국범죄방지재단과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이사장을 맡아,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등 분주히 지낸다고 한다.
정 원장의 동생인 정해방 기획예산처 예산총괄심의관은 예산분야에서 따를 자가 별로 없다는 베테랑 공무원이다.
)


우리나라가 동북아 금융허브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홍콩, 싱가포르, 중국 등 인접국가들은 벌써 자국을 금융허브로 만들기 위한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좋은 위치입니다.
전세계 GDP의 20%를 차지하는 동북아지역의 중간 지점에 있으니까요. 여유자본은 일본에 있고 자본수요는 중국에 있으니, 양쪽과 모두 대화할 수 있는 우리가 중개 역할을 적극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세계적 금융기관 유치 여부가 가장 중요합니다.
단, ‘중심’이라는 단어 사용을 자제하고 괜한 오해의 소지를 만들지 말기를 바라요.



* 정해왕 한국금융연구원장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1969)
외환은행 근무(1969~81)
뉴욕주립대 경영학박사(1986)
켄터키주립대 조교수(1986~89)
대신경제연구소 대표이사(1989~93)
한국금융연구원 부원장(1993~98)
한국금융연구원 원장(1998~현재)
서울상대 학생회장, 한국재무학회 부회장(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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