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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일회용 사람들
[서평] 일회용 사람들
  • 최우성 기자
  • 승인 2003.05.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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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노예제의 실체

세계사 교과서는 1865년을 미국에서 노예제가 철폐된 해로 기록하고 있다.
저 유명한 링컨 대통령의 연설과 함께 비로소 노예제는 한낱 ‘과거의’ 에피소드로 우리의 기억 어디쯤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노예제는 오래 전 지구상에서 사리진 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
아니 “노예제는 날이 갈수록 번창하는 사업”이고, “노예의 수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게 그의 확신이다.
노예사냥에 나선 백인사냥꾼의 먹잇감이 되어 사슬에 묶인 채 고향을 영영 등져야 했던 쿤타킨테의 슬픈 이야기도, 노예시장에 팔려온 그리스로마 시대의 전쟁포로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카리브해의 사탕수수밭에, 펀자브의 벽돌공장에, 브라질의 광산에, 태국의 매음굴에 ‘현대판 노예’의 흔적은 또렷이 남아 있다.
심지어 버밍엄과 맨체스터에서도 노예로 끌려온 어린 소녀는 하루하루 가뿐 숨을 토해내고 있었고, 미국 남부에선 무장감시인의 통제 속에 막사에 감금된 채 힘든 노동을 견뎌야 하는 농장노예의 울부짖음이 세상을 향해 끊일 듯 이어지고 있었다.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활동해온 케빈 베일스의 <일회용 사람들>은 글로벌 경제라는 껍데기를 한꺼풀 벗겨낼 경우에만 비로소 온전히 그 추한 몰골을 드러내는 현대판 노예제의 흔적을 담아낸 우리시대의 소중한 기록이다.
현대판 노예제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는 그에게 지난 2000년에는 안토니오 그람시와 파블로 네루다가 수상한 것으로 유명한 비아레조상이 주어졌고, 이듬해에는 퓰리처상 후보에 그의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일회용 사람들>을 원작으로 제작된 TV 다큐멘터리가 피버디상과 에미상을 잇달아 수상한 것도 뒤늦게나마 그의 노고에 바치는 최소한의 예우가 아닐까 싶다.



번창하는 노예사업, 노예 수도 늘어

그의 눈길을 붙들어맨 노예제란 “경제적인 착취를 목적으로 한 사람이 폭력을 동원해 다른 사람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베일즈는 “누군가의 노동을 훔치는 게 아니라 삶을 송두리째 도둑질하는 것”이 노예제의 본질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럼 과연 오늘날에도 이런 ‘만행’이 여전히 저질러지고 있단 말인가? 설령 지구상 곳곳에서 강제노동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굳이 노예라는 도발적인 딱지를 갖다 붙일 필요가 있을까? 이쯤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이내 그의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문제는 오늘날 노예제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노예제에 대해 ‘알고’ 있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베일즈의 생각도 이런 믿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럼 ‘현대판 노예’란 도대체 뭘까? 그 비밀은 ‘일회용 인간’이라는 한마디에 숨어 있다.
“오늘날에는 노예로부터 얻을 수 있는 수익이 극적으로 증가하는 대신, 한 사람이 노예로 사는 기간은 오히려 극히 짧아졌다.
때문에 더 이상 노예를 ‘소유’하는 건 그다지 매력적인 투자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노예의 가격은 너무 싸기 때문에 19세기 미국 남부의 백인들이 그러했듯 굳이 법적 소유에 매달릴 아무런 필요가 없는 셈이다.
” 이 말 속에는 노예소유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는 논거를 들어 오늘날 노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게 얼마만큼 엉터리인지가 잘 드러난다.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1850년대에 미국 농장에서 일하던 노예는 보통 1천~1800달러에 팔렸다.
당시 미국 노동자 연평균 임금의 3~6배. 이렇게 높은 비용에도 불구하고 ‘노예수익률’은 연평균 5%대에 머물렀다.
그럼 오늘날은? 세계 도처에서 열두살에서 열다섯살 정도의 여자아이들은 800~2천달러에 팔려 다닌다.
아이들의 부양에 드는 비용은 쥐꼬리만한 대신, 수익률은 매년 800%. 노예 1인당 5~10년 동안 이런 수익률이 보장된다.
그 다음은? 병에 걸리거나 HIV 양성반응을 보이는 순간, ‘내다버리면’ 그만! 옛 노예주(slaveowner)처럼 늙고 병든 노예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부양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노예는 결코 자본재가 아니다.
그저 일회용 소비재일 뿐이다.



글로벌 경제라는 이름의 자양분

한층 거칠어진 저자의 호흡은 이제 “과거처럼 인간을 소유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철저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건 바로 ‘글로벌 경제’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그 기름진 자양분을 맘껏 제공해주기 때문”이라는 막바지 대목에 다다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바로 그 글로벌 경제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는 슬픈 고백이 이어지는 건 물론이다.
“카리브해에 있는 노예들이 우리 식당에 오르는 설탕과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생산했을지도, 인도에 있는 노예들이 내가 걸친 셔츠를 재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우리들이 점잖은 척하며 열대우림의 파괴를 탄식하는 동안, 정작 그 파괴작업에 노예노동이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다시 시계를 1865년으로 되돌려보자. 노예제 철폐의 그 순간으로. “노예해방이 그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중인 과정이자 과제”라는 저자의 믿음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갈 마음이 굳이 없다면, 그저 투자수익률에만 눈이 멀어 노예노동을 이용해 실적을 올리는 기업의 주식을 사들이는 따위의 일은 이제 삼가야 하지 않을까. 책장을 덮는 독자들에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노예와 함께 살아도 괜찮을까?”를 되묻는 저자의 마지막 당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말이다.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두지 말자.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선물하자. 노예제에 대한 무지는 지금까지 노예제도가 종식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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