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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인물]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 이승철 기자
  • 승인 2003.05.3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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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생사 칼자루는 시장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동행하고 돌아온 직후인 5월19일 좌승희(56) 한국경제연구원장이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한 내용들이 적잖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신문마다 ‘카드사 1~2개 망하게 뒀어야’ ‘집단소송제 받아들이자’ ‘분식회계 사면론은 초법적 발상’ 등 큼지막한 제목들로 뽑아 보도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전국경제인연합회 소속 127개사를 회원으로 설립, 운영되는 재계의 싱크탱크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파격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좌 원장은 또 “노 대통령의 방미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이 1%포인트 성장하고, 고용을 6만~7만명 가량 증대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며 대통령의 방미 성과를 치켜세웠다.
“참여정부와 재계의 관계가 정상화하고 있고, 재계를 보는 노 대통령의 시선이 바뀌었다”든지 “정부가 나서기 전에 기업이 먼저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견해도 밝힘으로써, 대통령과 재계의 밀월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가 하는 관측도 불러왔다.
5월21일 오후 좌 원장을 만나, 발언 배경과 정확한 속내를 들어봤다.



우선 대통령 방미의 성과를 말해달라. GDP와 고용증대 효과를 언급했는데 그 근거는.

(조심스럽게) 방미 얘기는 더이상 하기 곤란하다.
그저께(19일) 기자간담회는 <한국의 기업진화론>이라는 내 영문저서 발간에 맞춰 미리 예정된 자리였는데, 그때 내가 나서서 방미성과를 정리한 것처럼 보도되는 바람에 내 입장이 곤란해졌다.
오늘 낮에 청와대 인사 두명과 식사했는데, 괜히 어색하더라.(웃음) 나는 박수부대로 간 거지. 어쨌든 방미성과는 무척 대단했다.
GDP 1%포인트와 고용 6만~7만명이 늘 것으로 예상한 것은 그동안 사스와 북핵 문제의 부정적 영향에 대한 예측을 거꾸로 뒤집으면 그 정도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미국 현지에서 우리나라를 보는 시각이 어떤가. 노 대통령의 파격 발언이 국내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미국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불안하다는 것이다.
예전의 한국이 맞나, 우리와 함께할 동반자로 타당한가, 노 대통령을 믿어도 되나, 하는 식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주력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당시 주변상황과 전후맥락을 거두절미한 채 그의 발언이 국내에 전해져서 논란이 된 모양인데, 미국쪽은 전혀 놀라지도 않았고 반기는 기색이었다.
‘정치범 수용소’ 발언할 때도 우리는 박수 한번 치고 넘어갔지, 별 문제 없었다.
대통령이 인권변호사 출신이니 그런 얘기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이 19일 ‘미 인텔이 아시아에 반도체 생산라인을 설립하려는 계획이 없더라’고 말했다.
인텔 대규모 투자 유치는 물 건너간 것인가.


그런 말을 했나. 아까 청와대 한 인사한테서 ‘인텔로부터 아주 긍정적 사인이 왔다’고 들었는데. 참, 이런 말은 하면 안 되지.(급히 말을 돌린다) 나는 인텔쪽 인물과 접촉한 바 없다.



얼마 전 카드시장 위기 때, 부실한 전업카드사 1~2개 정도는 퇴출시켰어야 했다고 비판했는데, 퇴출대상으로 어떤 회사를 꼽나.

(웃으며) 그 얘기 때문에 카드회사에서 항의전화가 많이 왔다더라. 우리가 아무리 3류라고 해도, 축구 3부리그에도 1등과 꼴등의 구분이 엄연히 있는 법이다.
카드시장에는 1등에서 9등까지 순위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꼭 내 입으로 퇴출대상을 말해야 하나. 퇴출될 기업은 시장이 결정해줄 것이고, 시장에는 얼마든지 판별기준이 존재한다.
그걸 고려하지 않으려는 게 잘못이다.
지난 정부 5년간 금융구조조정이 조금 성공하다가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그중 가장 잘한 조치가 5개 시중은행을 P&A(자산부채이전)해서 떼어낸 것이다.
그 성과 덕분에 우리 금융시장이 이 정도나마 유지되고 있다.
P&A한 5개 은행은 전부 잘되고 있지 않나. 어떤 무대에서도 꼴찌 하나 정도는 적기에 시정조치를 내려야 한다.
그래야 꼴찌에서 2등도 살아남기 위해 기를 쓸 것 아닌가. 모든 기업을 인위적으로 떠안고 가려 하면, 경쟁을 통한 차별화가 불가능하다.


좌 원장의 연구실에는 ‘無爲’와 ‘무위자연’이라고 쓴 휘호 2점이 걸려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애덤 스미스가 제시한 시장경제의 기본 철학이 노자의 <도덕경> 1장에 심오하게 담겨 있노라고, ‘도사님같이’ 말한다.
무슨 뜻일까. “爲는 ‘강제’를 의미해요. 우주의 생성은 무명(無名)에서 출발하지만, 세상에 이름을 붙이면서 그 틀에 갇혀 제약이 생기고 진리를 놓치게 돼요. 정부 정책을 보면 증상을 치유하기 위해 무조건 규제하려 달려들죠. 그런 사람들은 다 머리가 좋고 세상을 사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행동을 하나로 결정, 규제하려는 겁니다.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라는 주장인지, 하지 말라는 주장인지 모호하다.


내 말의 정확한 취지는 출자총액이나 부채비율, 구조조정본부 운영 등이 기업이 독자적으로 판단할 문제이듯이, 집단소송제와 같은 시장제도는 정부가 전적으로 판단하고 책임질 사항이라는 것이다.
집단소송제가 정말 중대한 사안인 만큼, 정부가 분명히 책임질 각오를 표시하고 도입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
그걸 언론에서 ‘재계가 수용해야 한다’라고 다소 선정적으로 제목을 붙인 거다.
분식회계 사면론에 반대한 것은 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결국 집단소송제 도입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해석된다.


우리 경제가 남소와 같은 부작용을 견딜 여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현실을 잘 판단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민사소송법에 ‘선정당사자제도’라는 대안이 존재한다.
소액주주 누구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정부가 기존 제도를 장려하지 않고, 왜 새 제도를 끌어들이려는지 모르겠다(좌 원장은 이 대목에서 회의중인 한 연구원을 급히 불러 사실확인까지 하면서, 선정당사자제도의 유용성을 강조했다). 벽산의 소액주주들이 이 제도를 통해 승소, 1인당 수천만원씩 손해배상을 받은 적도 있다.
소송당사자만 수혜를 받으면 되지, 집단소송제로 free-rider(무임승차자)를 양산할 필요가 있을까. 무임승차를 허용하면 남소가 생길 수밖에 없다.



국내 대기업이 스스로 변신해야 할 과제를 꼽는다면.

글로벌 스탠더드를 안 따르고는 살길이 없다.
경영과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고, 투자자에게 기업내용을 적극 공개해야지. 그러나 기업에 너무 이것저것 요구할 필요없다.
재벌의 소유구조나 문어발식 경영 등은 국민경제 전체로 보면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 아닌가. 정부는 시장을 통해 기업을 차별화하고, 기업이 자발적으로 변화하면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분위기를 이끌면 된다.
딱 날짜 정해놓고 한꺼번에 바꾸려는 생각은 잘못이다.
기업은 죽는 것도 영광이다.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돈 못 벌면 망해도 좋다.
그런데 우리나라 공정거래위원장은 재벌의 구조조정본부장처럼 굴고 있다.
왜 죽을 기업을 공정위가 살리려고 애쓰나.

좌 원장은 공정위원장을 언급한 게 맘에 걸린 듯, “지금까지 공정위가 그랬다는 뜻이지, 강철규 현 위원장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강 위원장은 내가 정말 존경하는 선배다”라는 해명도 보탰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 67학번으로 한덕수, 현정택 전 경제수석을 비롯해 구속중인 김성호 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인준 서울대 사회대학장 등과 동기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제대로 된 청사진 없이 갈팡질팡한다는 지적이 많다.


얼마 전 우리 연구원 박사들이 참여정부의 몇달간 정책을 평가하겠다길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뭘 평가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웃음) 아직도 각종 TF팀(위원회)을 통해 비전을 만드는 과정인 것이 아쉽다.
TF팀이 모두 대통령 직속 프로젝트여서, 장관이 할 일이 없는 것은 큰 문제점이다.
이래서 행정이 제대로 되겠나. 현안은 장관에게 맡겨서 한시바삐 해결해야 한다.
대신 대통령과 청와대는 정치개혁과 같은 큰 틀을 맡아서 처리하는 게 옳다.



구체적으로 청와대 TF팀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건가.

예를 들어 동북아중심추진위원회에는 우리나라의 웬만한 이슈가 다 들어가 있다.
물류 허브가 되려면 재경부나 건교부에서 규제를 완화하고 각종 인센티브를 충분히 주면 될 텐데, 왜 동북아위원회가 붙잡고 있나.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소관사항도 장관들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참여정부가 이제 막 시작했지만, 갈등이 생기면 과감히 바꿔야 한다.
잔뜩 위원회만 만들어놓으니 일의 진척은 없고, 업무부담이 이정우 정책실장과 권오규 정책수석에게 다 몰린다.
그 사람들이 천재인가.



[약력]

1947년 북제주 출생
1971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73~77년 한국은행 조사1부 근무
1982년 미국 UCLA대 경제학박사
1983~85년 미국 연방준비은행 이코노미스트
1985~97년 한국개발연구원(KDI) 근무
1997~현재 한국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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