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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갈길 바쁜 한미 투자협정 ‘발목’
[포커스] 갈길 바쁜 한미 투자협정 ‘발목’
  • 이승철 기자
  • 승인 2003.06.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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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쿼터 결정적 장애물로 작용…통신산업 외국인 지분율 제한 등도 걸림돌


1985년 제1차 한미 영화협상이 열렸을 때만 해도 미국은 우리나라 스크린쿼터 제도를 용인하고 넘어갔다.
대신에 미국은 수십년간 우리 영화의 버팀목으로 존재하던 외화수입 쿼터제도를 없앴고, UIP로 대표되는 직배사를 진출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88년 제2차 영화협상 때는 외화필름 복사벌수 제한이 없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스크린쿼터뿐이다.
스크린쿼터는 우리 정부가 간절히 바라는 한미 투자협정(BIT) 체결의 결정적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협상이 시작될 무렵만 해도 단지 스크린쿼터 때문에 협상타결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한 이는 거의 없었다.


스크린쿼터와 같은 문화교역을 둘러싼 다자간 국제규범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WTO 도하개발아젠다(DDA)가 막 시도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미국도 캐나다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할 때, 문화산업에서 광범위한 예외를 인정한 바 있다.
OECD가 중점 추진했던 다자간 투자협정(MAI)은 문화산업을 둘러싼 논란 때문에 결국 98년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스페인 등도 스크린쿼터 유보조항을 두고 있으며, 올해 발효된 한일 투자협정도 스크린쿼터를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미국은 스크린쿼터를 이토록 거부하는 걸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미국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양자간 투자협정 표준문안 6조 1항은 ‘현지 생산품을 일정비율 이상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화여대 최병일 교수는 “수많은 나라와 투자협정을 맺었고 앞으로도 맺게 될 미국으로서는, 현실적 수지타산을 떠나 이런 협상의 대원칙을 결코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미국 정부가 스크린쿼터 문제를 양보할 가능성은 거의 없고, 결국 우리 정부가 결자해지해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외자유치 효과 32억달러 이상

두 번째 이유는 투자협정의 현실적 필요성이 미국보다 우리에게 훨씬 절실하기 때문이다.
미국으로선 급할 이유가 별로 없다.
처음 BIT 체결을 제의한 쪽은 94년 클린턴 정부였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개방 수준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외환위기에 직면한 98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대외신인도를 제고하고 미국의 직접투자를 유치해야 하는 절박한 요구 때문에 미국쪽에 BIT를 제의했다.


한미 투자협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외국인 투자유치의 효과를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세 차례에 걸쳐 분석한 바 있다.
비록 그 산출 근거가 과거 BIT를 체결했던 다른 나라의 모델을 활용하거나, 우리나라 외평채 가산금리의 하락 정도를 감안한 정교하지 못한 수치였지만, 그 효과는 99년에 27억~40억달러, 2000년에 35억~50억달러로, 지난 4월에는 GDP의 1.38%인 32.4억달러로 각각 제시됐다.


스크린쿼터가 한미 투자협정을 가로막는 원인 중 90% 이상을 차지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협상의 걸림돌은 이것만이 아니다.
국내 전기통신사업법은 KT와 SK텔레콤 등 기간통신 사업자의 외국인 지분을 49%로 제한하며, 초과분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이 제한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 일각에서는 “국내 통신산업의 발전정도를 감안하면, 지분 100% 개방이라도 못할 이유는 없다”는 의견이 존재하지만, 정보통신부를 비롯해 다수 의견은 “기간산업만은 외국 소유에서 지켜내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둘째로 지적재산권 보호를 소급적용하는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는 57년에 처음 저작권법을 도입하면서, 57년 이후의 저작물에만 저작권을 인정토록 했다.
이후 96년 저작권법을 개정할 때도, 베른협약의 사후 50년 보호원칙에도 불구하고 57년까지만 소급적용을 인정했다.
미국은 정확히 50년을 소급해 46년부터 저작권을 인정하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 최종현 북미통상과장은 “1952년 이전은 50년 소급대상에서 벗어났고, 이제 1953~56년 분만 문제가 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타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전망했다.








양면 게임론으로 본 스크린쿼터 문제


한미 투자협정(BIT)의 핵심 걸림돌인 스크린쿼터 협상을, 로버트 퍼트냄의 양면게임(two-level game)이론 틀을 활용해 분석한 논문 한편이 눈길을 끈다.
주인공은 고려대 행정학과 김정수 교수가 최근 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스크린쿼터의 힘>이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게임이론이란 정치·경제적 행위자가 자신의 이익에 영향을 주는 상대방의 행위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략적 행동을 취한다는 전제하에 고안된 이론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으며,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수학자 존 내시가 이 분야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중 양면게임 모델이란 국제협상에 임하는 대표는 한편으로 다른 국가와 교섭(제1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내 사회세력들과 절충(제2면)을 동시에 진행해야만 한다고 전제한다.
이 분석모델의 핵심 개념은 ‘윈셋’(win-set)인데, 이는 ‘국내적 비준을 받을 수 있는 모든 국제적 합의의 집합’을 뜻한다.
즉 협상국들의 윈셋이 겹치는 부분이 클수록,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기존 이론에서는 국제협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모두 해당국가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 양면게임 모델에 따르면 국가간에는 합의(제1면)가 도출되더라도 국내적 비준(제2면)을 받지 못하면 협상이 실패하거나 교착상태에 빠지는 ‘비자발적 배신’이 가능하다.
김 교수는 스크린쿼터를 둘러싸고 오도가도 못하는 우리 정부의 처지를 전형적인 ‘비자발적 배신’으로 분석했다.
즉 한미 양국의 내부 이익집단들을 모두 만족시킬 만한 합의가능영역(윈셋)이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보의 여지를 찾을 수 없고, 스크린쿼터라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의제에 발목 잡혀 BIT 전체가 좌초할 수 있다는 얘기다.


김정수 교수는 양국의 윈셋이 이토록 협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미국의 경우 90년대부터 영화제작 비용이 급상승하는 바람에, 적자 탈출구를 해외시장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93년에 개봉된 <쥬라기 공원>이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인 돈이 5억5900만달러인데 비해, 98년 개봉된 <타이타닉>의 해외수입이 35억달러를 넘어선 데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더욱 절박하다.
80년대 중반 두 차례의 한미 영화협상에서 외화수입 쿼터제도를 철폐하고 메이저 영화사 직배를 허용할 때만 해도, 우리 영화계의 대정부 대응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90년대를 거치며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 급속히 민주화함으로써 영화계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대정부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단 하루도 축소할 수 없다”는 강력한 반발이 이를 대변한다.
김 교수는 사회가 국가보다 큰 힘과 자율성을 갖는 ‘약성국가’일수록, 윈셋의 크기도 작아진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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