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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통계라는 이름의 거짓말
[서평] 통계라는 이름의 거짓말
  • 최우성 기자
  • 승인 2003.07.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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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문맹들이여 깨어나라


만일 주위에 널린 어느 신문에서건, 아니면 짐짓 권위가 느껴지는 딱딱한 학술논문에서건 이런 문장을 읽었다고 치자. “1950년 이래 총기로 희생되는 미국 어린이의 숫자는 매년 두 배로 증가했다.
” 당신의 반응은? 점점 흉폭해지는 세상을 탓하며 혀를 끌끌 차거나, 또는 몹쓸 것을 보고야 말았다는 듯 얼른 페이지를 넘길지도 모른다.
더러는 총기소지를 금지하자는 사람들의 주장에 맞장구를 치기도 할 테고, 어린이의 안전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무언가 힘을 보태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하지만 잠시나마 모든 걸 잊어버리고, 간단한 셈 놀이를 한번 해보자. 자, 이제 출발! 만일 1950년에는 단 한 명의 어린이가 총기로 희생되었다고 가정하자. 그 숫자가 매년 두 배로 늘어난다고 했으니까 그 다음 해인 51년엔 2명, 그리고 52년엔 4명, 53년엔 8명이 되었을 것이다.
너무 단순하다고? 조금만 참자. 1965년에 총기로 희생된 어린이 수는 3만2768명이다.
이쯤 해서 슬슬 머릿속이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미국 FBI 자료에는 이 해에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체 살인건수가 모두 9960건이라고 나와 있는데?! 내친김에 셈 놀이를 좀 더 해보자. 1970년이면 총기로 희생된 어린이수가 100만을 넘을 것이고, 드디어 1980년엔 10억의 벽을 거뜬히 무너뜨릴 것이다.
(이 해 미국 전체 인구수의 4배가 넘는구만.) 또 그로부터 3년 뒤엔 세계 인구의 2배인 86억명의 어린이가 총기에 희생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1995년에는? 답은 무려 35조명!


엉터리 통계는 왜 사라지지 않는가

“세상엔 세 가지 거짓말이 있다.
선의의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조엘 베스트의 <통계라는 이름의 거짓말>은 머릿속에 “통계를 가지고 무엇이든 증명할 수 있다”는 명제를 꾹꾹 담고 사는 세상을 향해 “엉터리 통계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왜 사라지지 않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친절하게 들려준다.
“(94년 시점에서) 매년 총기로 사망하는 미국 어린이의 숫자는 50년 이래 두 배가 되었다”는 ‘사실’이 “1950년 이래 총기로 희생되는 미국 어린이의 숫자가 매년 두 배로 늘어났다”는 해괴망칙한 믿음으로, 그것도 아무런 의심없이 둔갑해 버리는 비밀은 바로 도처에 널린 ‘숫자문맹’, 또는 ‘통계문맹’에 숨어 있다.


숨길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한 ‘숫자문맹’들을 향해 조엘 베스트는 제발 ‘통계란 무엇인가’를 찬찬히 꿰뚫어 보라며 마구 채근한다.
통계란 사회현상을 기술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라는 그의 목소리는 책장 구석구석에 진하게 배어 있다.
말하자면 통계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 사회문제를 둘러싼 첨예한 토론이 벌어졌을 때, 그 토론에 영향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통계라는 게 처음 쓰였다는 엄연한 사실은 왜 통계가 사회문제를 기술하는 ‘가장 권위 있는’ 방법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통계라는 용어의 출발이 바로 ‘정치산술(political arithmetic)’이었음에랴.

‘숫자문맹’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의 일상을 슬쩍 엿보는 일은 흥미롭지만, 분명 치부를 드러내는 아픔이 따른다.
여기 63년에 보고된 아동학대건수가 15만건이었음에 반해, 95년엔 그 수가 300만건이 되었다는 통계가 있다 치자. 우리의 재빠른 결론은? 저런, 아동학대가 엄청나게 늘어났구나. 하지만 이 숫자 뒤편엔 사례의 빈도수 변화만큼이나 그 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의 태도와 그것을 추적하는 관행 자체가 변화했다는 사실이 온전히 가려져 있다.
무엇을 아동학대라 이름 붙이는지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달라진 이상, 15만과 300만이라는 숫자를 단순비교 대상으로 올려놓는 일은 위험하다.


하나 더. “가난한 사람들 중 대부분이 백인이다”라는 과감한 주장이 있다 치자. 화려한 통계숫자가 뒷받침되었음은 물론이다.
만일 백인과 흑인의 인구 비율이 6 대 1이라면, 가난한 백인 인구는 가난한 흑인 인구보다 여섯 배나 많을 게 분명하다.
백인 600세대와 흑인100세대 가운데 백인 60세대와 흑인 20세대가 가난하다고 가정하자. 가난한 백인 가정은 가난한 흑인 가정보다 훨씬 많다.
따라서 이 주장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계숫자의 권위를 빌린 이런 ‘증명’은 엉터리일 수 있다.
각 그룹별로 가난한 비율을 따지는 게 사회현실을 좀 더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탓이다.
백인 가정은 10%(600세대 가운데 60세대)만이 가난한 반면, 흑인의 경우에는 20%의 가정(100세대 가운데 20세대)이 가난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통계자료에 선명하게 쓰여 있는 숫자 하나하나가 현대사회에서 일종의 ‘주물’처럼 쓰이고 있음을 깨닫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통계숫자가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절대불변의 진실을 강력하게 대변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럼 도대체 해결책은?


숫자의 마력 깨려면 비판적으로 질문하라

분명 통계는 죽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겐 통계가 필요하다.
통계란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실마리다.
통계숫자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아낼 재간이 없다.
그렇다면 모든 통계숫자에다 엉터리란 이름을 떡하니 붙인 채 무작정 밀쳐내는 게 아니라,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숫자들을 맞이할 ‘똑똑한 머리’를 차근차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통계는 마법이 아니다.
항상 진실도, 또 거짓도 아니다.
중요한 건 비판적인 머리로 다가서는 것이다.
” 비판적이라? 그 답은 “숫자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조엘 베스트는 힘주어 말한다.
이 숫자의 출처는? 누가 이 숫자를 만들었는가? 그들의 이해관계는 어떤지? 어떤 종류의 표본이 수집되었는가? 통계숫자를 적절하게 해석했는가? 숫자문맹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에게 질문표는 꼬리를 문다.


이 순간에도 국민소득이 2만달러인 세상과 1만달러인 세상은 천당과 지옥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따위의 주문이 우리의 눈과 귀를 질식시키고 있다.
이에 뒤질세라 올해 GDP 성장률이 5%대에서 2%로 떨어져 큰 난리가 날 것이라는 소란도 자리를 비집고 끼어든다.
2만달러와 1만달러, 5%와 2%라는 숫자 뒤편에 가려진 건 과연 무엇일까? 온갖 엉터리 통계가 훌륭한 통계를 마구 몰아내는, 마치 ‘그레셤법칙’의 통계학 버전이라 불릴 법한 이 세상에서 숫자의 마력에 휘둘린 채 맥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갈 마음이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눈앞에 나타난 통계숫자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묻고 또 묻자. “통계, 너 딱 걸렸어!”


* 통계라는 이름의 거짓말

조엘 베스트 지음
노혜숙 옮김
무우수 펴냄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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