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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노동 관련법, 사사건건 불법 굴레
[진단] 노동 관련법, 사사건건 불법 굴레
  • 황보연 기자
  • 승인 2003.07.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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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합법파업은 없는가


최근 대형 노조들의 파업이 잇따르면서 쟁의행위의 정당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에 다시 불이 붙고 있다.
매각이나 합병 등 구조조정으로 인한 노조의 파업이 잦아지면서 직접적인 근로조건에 결부된 사항에 대해서만 쟁의행위를 인정하고 있는 현행법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월23일 금융노조 조흥은행지부가 파업에 들어가자 정부는 매각에 반대하는 노조파업은 불법행위라며 “법대로” 방침을 밝혔다.
뒤이어 철도구조개혁법안의 통과를 반대하며 파업에 들어간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해서도 정부는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파업종료 이후에 파업을 주도한 노조 간부들에 대한 사법처리나 징계가 잇따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술 더 떠 재계는 “불법행위에 대해 법적대응을 엄정하게 취해 나가야 할 것”이라며 “손해배상소송, 가압류 등 가능한 민형사상 조치를 강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불법행위에 대한 고소, 고발취하 관행을 근절해야 한다”고 나섰다.
전경련은 지난 2일 50여곳 회원사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런 방침을 밝혔다.
아울러 노조와 대화할 수 있는 부분은 근로조건의 개선에 관한 협의뿐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계에선 한층 유연한 법해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은 “정부정책에 대한 시정을 촉구하는 요구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정치파업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의 고용이나 근로조건에 직결되는 문제라면 당연히 정당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조흥은행지부의 한 관계자는 “이번 파업이 불법이라면 어떤 파업이 합법성을 인정받을 수 있겠냐”며 볼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인사·경영권은 제외, 권리분쟁도 불법

왜 이런 논란이 때만 되면 반복되는 걸까. 현행법에 따르면 파업의 적법성 여부는 쟁의행위의 주체, 목적, 개시시기 및 절차, 수단 등이 법 테두리 내에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 중에서도 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부분은 목적과 절차다.


먼저 쟁의행위의 목적이 정당성을 가져야 하는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서 쟁의의 개념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 노동계의 주장이다.
임금이나 근로시간 등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주장의 불일치로 발생되는 ‘이익분쟁’에 국한되고 있기 때문에 정리해고나 구조조정, 민영화 등과 같은 인사·경영권에 해당되는 사항은 제외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임금체불이나 부당노동행위, 단체협약의 이행 등과 같은 ‘권리분쟁’으로 인한 파업도 불법이다.


절차상의 문제로 노조의 발목이 묶이는 경우도 많다.
합법파업이 되려면 반드시 노동위원회의 조정을 거쳐야만 한다.
하지만 조정을 거치더라도 행정지도가 내려지면 불법파업이 된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주로 사용자쪽이 교섭을 거부하는데도 교섭미진으로 행정지도가 내려질 때다.
자연스레 노조는 불법파업의 굴레를 쓸 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필수공익사업장은 직권중재가 내려지면 아예 합법파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민주노총 법률원의 권두섭 변호사는 “현행법이 불법파업을 양산하는 꼴이어서 오히려 노사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불법파업으로 판단될 수 있는 요건이 지나치게 많으면 사용자쪽은 당연히 단체교섭에 소극적으로 임하게 된다.
따라서 자율적인 분쟁해결보다는 사법기관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3월 민주노총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노동당 등이 관련법개정을 위한 입법청원을 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부쪽에서도 쟁의행위의 범위에 대한 개선책이 필요하다는 데는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분위기다.
권기홍 노동부 장관이 지난 달 26일 모 방송사의 시사토론프로그램에서 “정부가 합법파업이 가능한 길을 어느 정도 열어둬야 노조의 불법행위를 다스릴 명분도 서지 않겠냐”고 말한 것에서도 이런 의중을 읽을 수 있다.


실제 정부는 지난 5월 발족한 ‘노사관계제도 선진화연구위원회’에서 개선안을 검토하고 있기도 하다.
노동부 노동조합과의 한 관계자는 “인사·경영권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쟁의행위를 제한해 왔던 틀을 어느 정도 완화하는 방향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예컨대 구조조정과 연관된 사안이지만 이 때문에 발생될 근로조건을 주된 쟁점으로 내세울 경우까지 무조건 불법으로 몰아붙일 수는 없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향은 이미 일부 판례에서도 보여졌던 것이어서 전향적인 변화라기보다는 신중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재계 반발 속 정부 개선안 검토 중

하지만 어떤 수준이든 개선안이 나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진통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재계쪽에선 현행법을 그대로 준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총의 이형준 법제팀장은 “기본적으로 경영진이 결정해야 할 사항에 대해서 노조가 파업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근로조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노사가 협의하는 자리를 가지면 되지 않느냐”는 입장을 보였다.
지난해 10월 노사정위가 ‘노동쟁의 제도개선과 관행정립’을 위한 합의문을 도출하면서 핵심적인 사항인 조정대상의 확대나 조정전치주의의 개선 등이 쏙 빠진 것도 이런 측면에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노조의 경영참여를 어느만큼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형성돼 있지 못한 데서 비롯되고 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청와대 이정우 정책실장은 “노조는 임금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사용자는 제한된 경영참여를 보장하는 등의 네덜란드식 노사모델이 바람직하다”고 언급한 이후 재계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미 노조의 경영참여 요구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아 가는 분위기다.
따라서 학계 일부에선 어떤 식으로든 절충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화여대 이철수 교수는 “단체교섭 대상과 조정, 쟁의행위의 범위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는다.
조정은 그야말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있는 것인 만큼 폭넓게 다루고, 기업의 권익이 침해받을 수도 있는 쟁의행위사항에 대해서는 별도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쟁의행위로 이어지기 전에 노조의 경영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책을 마련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건국대 조용만 교수는 “독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현실적으로 대립적인 노사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경영참가제도의 확립”이라며 “근로자의 경영참가는 분쟁을 예방하는 기능을 갖기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외국에선 판례 따라 규율


노조의 쟁의권을 얼마만큼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나라별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독일과 미국에서는 쟁의행위가 노사간 단체교섭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비해, 프랑스의 경우 원칙적으로 개별 노동자의 개별적 권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시 말해 프랑스에서 파업권은 노조와 무관하게 노동자가 개인의 직업상 불만을 표출하는 수단으로까지 폭넓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는 정당성이 인정되는 쟁의행위의 범위에서 차이가 크다.
독일에서는 단체협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항이어야만 가능하다.
예컨대 기업정책상 결정에 관한 사항은 쟁의대상이 되지 않는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근로조건의 개선뿐 아니라 정리해고 등 고용안정에 관한 사항이나 권리분쟁 사항에 있어서도 쟁의행위가 허용된다.
파업노동자들의 직업과 관련된 요구가 포함돼 있는 사항이라면 연대파업도 가능하다.
대신 독일은 사업장 단위의 종업원평의회에서 상당부분 노동자들의 경영참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독일이나 프랑스, 미국에선 쟁의행위에 대한 입법적 제한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체로 법원 판례에 따라 규율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을 통해 쟁의권이 보장되고 있지만 이런저런 입법적 제한을 받고 있는 국내 현실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는 법원이 판단할 문제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입법상 제한이 많을수록 법원의 판단재량 범위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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