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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미국·중국 환율전쟁
[커버] 미국·중국 환율전쟁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3.07.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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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라


미국쪽) “중국 정부가 환율을 점차적으로 시장에 맡겨 변동환율제를 도입하는 것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 같은 움직임을 지지한다.
”(6월16일 존 스노우 미국 재무장관)

“중국 당국자들 사이에 환율 변동폭을 늘려야 한다는 논의가 있다.
”(6월26일 존 스노우 미국 재무장관)

“중국 정부는 2단계에 걸친 위안화 변동폭 확대조치를 시행하게 될 것이다.
우선 6개월 안에 환율 변동폭이 5%까지 넓어져 달러당 환율이 8.07위안까지 하락하게 되고, 12개월 안에는 변동폭이 10%로 넓어지면서 환율이 7.876위안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6월13일 골드만삭스)


중국쪽) “장기적인 외환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
스노우 장관이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는 인민은행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다.
중국은 현행 환율제도를 유지할 것이다.
중국은 환율의 변동폭을 점차 완화시켜 나갈 예정이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6월17일 중국 인민은행)

“중국은 위안화 가치를 재평가하라는 어떤 국제적 외교적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 경제가 중국 정부의 최우선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6월13일 뱅크오브아메리카 프랭크 공)



수면이 잔잔하다고 격류가 멈춘 건 아니다.
원/달러 환율은 6월부터 한 달 남짓 1182원부터 1200원 사이에 얌전히 묶여 있지만 미국과 중국, 미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사이에 형성된 환율 전선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환율전쟁의 최전선은 이제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겨 왔다.


미국 달러화는 전 세계 대부분의 통화를 강세로 몰아붙이고 있다.
예외는 한 곳. 중국이다.
중국 위안화는 미국의 경고에도 여전히 달러화에 딱 달라붙어 짭짤한 반사이익을 건지고 있다.


국제시장에서 통화 가치 동조화가 두드러진 일본과 한국은 필사적으로 달러를 사모으며 통화 강세를 저지하고 나섰다.
5월말 일본 외환보유고는 사상 최고치인 5431억달러를, 6월말 한국 외환보유고는 1316억달러를 기록했다.
두 나라의 외환보유고를 합하면 세계 최대 수준인 6747억달러. 유럽연합(EU) 중심국가인 독일, 프랑스의 외환보유고인 1575달러의 4배에 이른다.


그럼에도 시장 논리로 압박하는 미국과 자국 정책 기조를 고집하는 중국 사이에 낀 두 나라 정부가 숨 쉴 수 있는 틈은 별로 남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강삼모 연구위원은 현재 한국경제 펀더멘털에 적정한 환율을 1210원으로 본다.
7월4일 원/달러 환율은 1180원대. 한국 정부가 국책은행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데도 벌써 30원이 벌어져 있다.



환율 전망, 금융기관·연구소마다 제각각

“외국인한테만 좋은 일 시켜 주는 거죠.” 한 외환딜러가 투덜댄다.
원화 강세가 추세인데 자꾸 정부가 값을 끌어내리니 한국 주식을 사는 외국인 투자자들만 신났다는 것이다.
원화가치가 높아지면 이들은 주식 매매차익과 환차익을 함께 얻게 된다.
외국인 주식 매수는 달러 유입을 늘려 원화 강세를 더욱 촉진하기도 한다.


다른 딜러는 “두 달 전부터 투기딜러들이 놀고 있다”고 귀띔한다.
정부가 외환 시장에 워낙 강력하게 개입해 환율이 1180~1190원대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실수요 거래와 달리 투기거래는 환율 변동성에 베팅하기 때문에 환율이 움직이지 않으면 활발해지기 어렵다.


투기딜러들은 투덜거리지만 수출업체들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국제가격경쟁 탓에 수출가를 끌어내릴 수도 없는 처지에 환율까지 하락하면 마진이 박해져 수지 타산을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재봉사용 원사를 생산하는 리오인더스트리 김근중 대표는 환율이 10원 오르내릴 때마다 매출이 4억원씩 왔다 갔다 한다고 말한다.
생산량의 반 정도를 한국 시장에서 소화하는데도 그렇단다.
사정은 다른 업체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부는 내수 기반이 튼실해질 때까지 현재 환율 수준을 지탱해 줄 수 있을까? 한국은행 국제국 조문기 부국장은 “정부의 역할은 급등락을 조정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하루 2조달러씩 거래되는 외환시장을 일개 정부가 의도대로 가져갈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그는 내년에 한국 경제가 좋아지면 환율 하락의 여파를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환율이 내려갈 가능성이 올라갈 가능성보다 높다는 뉘앙스다.


국내외 금융기관, 연구소들의 전망치를 모아봤다.
모아놓고 보니 다 달라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아리송하다.
모건스탠리와 JP모건, 리먼브러더스는 원화 강세를, 씨티은행과 도이치은행, 골드만삭스는 원화 약세를 전망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원화 강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보합세로 내다본다.
이것은 올 하반기 전망이다.
장기 전망으로 가면 의견은 더욱 미묘하게 어긋난다.
원화 가치가 계속 오른다는 곳도 있고 오르다가 떨어질 것이란 곳도 있고 떨어졌다가 다시 오른다는 곳도 있다.


환율 예측이 어려운 건 환율이 시장 논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탓도 크다.
대다수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조정한다.
씨티은행 이코노미스트 오석태 부장은 “미국 수출업체들이 최근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을 환율조작의 대표국으로 지목했지만 그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시장 논리에만 맡겨두기엔 환율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 크고 다양하다.



“중국 현재 입장 고수” 의견 지배적

중국이 전 세계 각국으로부터 위안화 평가절상 압력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버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리변동환율제인 위안화는 현재 ±0.2%포인트 변동폭 안에서 운영되고 있어 사실상 달러당 8.3위안 수준으로 묶여 있다.
자본계정으로만 보면 위안화는 벌써 평가절상되었어야 했다.
중국의 경상수지, 무역수지는 모두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거시경제 지표는 참담하다.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여파로 중국 도시실업률은 4.1%, 홍콩의 실업률은 8.3%로 치솟았다.
중국 정부의 목표대로 도시 실업률을 4.5%대로 잡아 놓으려면 일자리가 950만여개는 더 필요한 실정이다.
중국의 은행 대출은 1조8천억원으로, GDP의 140%에 육박한다.
96년엔 88%였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가 당분간은 위안화 평가절상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참여정부의 경제비전에 관한 국제회의’ 참석차 방한한 게이오대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교수는 “금융기관의 대규모 부실채권이나 불평등한 소득분배 문제를 안고 있는 중국은 외국인 투자 유치를 통해 연 7~8%대 고성장을 지속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에 타격을 주는 위안화 평가절상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대장성 차관, 장관 특별고문을 지낸 그는 ‘미스터 엔’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WTO에도 가입한 중국이 언제까지고 환율을 정부가 관리할 수는 없는 일. 삼성경제연구소 유진석 수석연구원은 “중국 정부도 국제적 압력을 알고 있는 만큼 2005년부터는 위안화 변동폭을 조금씩 늘리는 방식으로 환율 절상을 용인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동안 국제 압력을 피하는 방법으로 중국 인민은행은 외화수입 비중 확대, 기업의 외화매입 허용 등 국제수지 흑자를 줄이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여하간 달러 약세 덕분에 위안화는 유로화보다 11% 정도 평가절하된 상태다.
가격경쟁력도 그만큼 높아졌다.



수출경쟁력 떨어질까 기업들 걱정

이 와중에 죽어나는 건 우리 기업들이다.
특히 중국 등 개발도상국과 경쟁하는 업체들은 원화가치 절상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이 6월 83개 수출업체를 설문조사한 결과, 환율이 달러당 1100원으로 하락할 때 10% 이상 수출이 감소하는 경우는 중국과 경쟁할 때가 34.9%, 개발도상국과 경쟁할 때가 17.6%, 선진국과 경쟁할 때가 8.7%인 것으로 집계됐다.
즉 우리 업체들은 중국, 개발도상국과는 가격경쟁으로 승부를 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20세기에 그랬듯, 환율전쟁의 끝을 알리는 깃발은 미국 경제가 쥐고 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달러 약세는 미국 경제에 회복 신호가 분명하게 나타나야 끝날 것이다.
전력을 다해 엔화 강세를 저지하고 있는 일본 정부, 그 힘에 기대 원화 강세를 막고 있는 한국 정부가 그때까지 버텨줄 수 있을까? 중국은 그전에 위안화 평가절상을 허용할까?

그건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환율 변동의 여파는 오래간다는 것이다.
외환컨설팅업체 FMP 오세돈 대표는 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뿌리를 주목한다.
94년 중국 위안화가 평가절하되면서 동남아 나라들의 수출경쟁력이 저하된 것이 태국 바트화 폭락으로 이어져 아시아 위기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값이 싸진 미국 제품과 더욱 싸진 중국 제품 사이에 낀 한국 제품의 마진은 점점 줄어든다.
우리 기업들은 높아지는 수면 위에 코만 내놓고 생명을 유지하는 형국이다.


생존을 건 기업들의 사투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그건 정부도 대신해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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