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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림으로 읽고 가슴으로 보고
[서평] 그림으로 읽고 가슴으로 보고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3.10.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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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물리학자이자 영화 '콘택트'의 작가 칼 세이건은 이렇게 말했다.
좀 길지만 참고 들어보시라.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질적으로만 안다면 그것은 아주 막연하게 아는 것에 불과하다.
대상을 양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것의 크기를 숫자로 이해하여 무수히 존재하는 다른 가능성으로부터 그것을 구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대상을 깊이 있게 아는 첫걸음이다.
그럴 때 우리는 대상이 가진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이 제공하는 힘과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
수량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관점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량화는 어렵다.
수량화된 현상은 이해하기도 어렵다.
숫자는 사실 소수 엘리트의 언어다.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제3세계인만큼이나 숫자를 자유롭게 다루는 사람도 드물다.
종종 숫자는 권력자를 대변한다.
숫자는 힘 없는 자, 돈 없는 자를 감싸주지 않는다.
아니, 그런 사람들 중 숫자를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다.


'불평등한 세계를 바라보는 123가지 방법'은 기특한 책이다.
숫자에 난독증을 가진 사람들이 알아듣기 편하게 모든 통계를 선과 면으로 나타냈다.
그림은 숫자보다 쉽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힌다.


예컨대 1kg의 빵이나 쌀을 사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말하기 위해 이 책은 세계 지도 위에 막대기를 그린다.
뉴욕, 시카고 같은 미국 도시 위 막대기는 깨알보다 짧고, 인도 뭄바이 위 막대기는 100원짜리 지름만큼 길다.
햄버거 하나를 사는 데 드는 노동시간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선 쌀알보다 짧은데 아프리카 나이로비에선 가운뎃손가락만큼 길다.
120시간을 일해 1kg의 쌀을 사는 뭄바이 사람들의 시간과, 하루 8시간씩 한달 열흘 일해 햄버거를 먹는 사치를 누리는 나이로비 사람들의 시간이 지도 위에 펼쳐진다.



국가간·계층간 불평등 한눈에

어떤 그림은 가난한 나라의 부자 국민과 가난한 국민, 부자 나라의 부자 국민과 가난한 국민의 비중을 가로 세로 축에 색깔로 나타낸다.
흰 빛이 부자들이고 검은 빛이 가난한 사람들이란다.
문고판 책만한 지면에 지우개 두개 만한 회색 지대가 있고 나머지는 온통 검다.
부자들을 나타내는 흰색 반점은 어린아이 새끼손톱만하게 회색지대 위에 얹혀 있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뉴욕 중상층 비중이 그만큼이란 얘기다.


이 책에 실린 미국의 위치가 흥미롭다.
다른 부자 나라들과는 딴판이다.
나라별 최상위 소득 10% 사람들의 구매력을 표시한 그림을 보자. 미국의 위치는 단연 선두다.
미국 최상위 10%의 1인당 구매력은 8만달러를 넘는다.
다음으로 스위스가 7만달러대이고 칠레, 프랑스, 네덜란드, 캐나다는 뚝 떨어져 5만달러대에 있다.


그런데 나라별 최하위 소득 10% 사람들의 구매력 그림으로 가니 미국이 잘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저기 중간 슬로베니아와 스페인 다음에 처박혀 있다.
미국 빈곤층의 1인당 구매력이 슬로베니아보다 낮은 4천달러대라는 뜻이다.
노르웨이 빈곤층의 1인당 구매력은 1만달러를 넘는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 밥 셔트클리프는 한마디 덧붙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인 미국에서 극빈층이 다른 선진국의 빈곤층보다 훨씬 더 가난하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다.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인 것보다 스페인에서 가난한 사람인 것이 어떤 측면에서는 더 낫다.


부자 나라 미국은 인심도 박하다.
국민소득 대비 원조금은 지난 20여년 동안 감소 추세에 있는데, 이렇게 국제 원조 규모를 끌어내리는 주범은 바로 미국이다.
덴마크가 국제원조금을 국민소득 대비 0.8%에서 1%로 늘리는 동안 미국은 0.2%대에서 0.1%로 줄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은 0.35%였다.
지은이의 설명. “미국의 좌파, 우파 정치인 모두 단합해서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에 반대하며, 너무 진보적이거나 반동적인 정부로 간주되는 국가는 원조를 중단하고 있다.



상식 뒤집는 통계 속 한국의 현주소는

이 책의 그림들은 몇 가지 상식을 뒤집는다.
경제 성장은 식량 생산과 상관이 없다? 아니다.
지난 25년간 1인당 식량 생산을 1.5배 이상 증가시킨 나라의 목록을 보자. 중국, 말레이시아, 한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베트남…. “산업 성장은 농업 성장과 갈등 관계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실 두 부문간에는 한쪽에서 다른 쪽에 투입재를 제공하거나 생산물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시너지효과가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아마도 산업 부문간 균형 성장의 효과가 일부 확증된다.


선진국은 공산품을 수출하고 개발도상국은 1차 산품을 수출한다? 그것도 아니다.
선진국은 공산품을 수출한다.
선진국 총수출의 83%를 차지한다.
개발도상국도 주로 공산품을 수출한다.
개발도상국 총수출의 56%가 공산품이다.
선진국은 1차 산품 수출도 많이 한다.
세계 총수출의 14%를 이들이 점유한다.
개발도상국은 1차 산품 세계 총수출에서 11%를 차지한다.
선진국보다 적은 규모다.
결국 세계 수출의 75%는 선진국으로부터 나온다.
개발도상국의 수출은 25%에 불과하다.


이런 그림들은 활발한 경제교류니 비교우위의 이득이니 하는 시장개방론자의 구호가 개발도상국한테는 달콤한 사기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OECD 국가인 한국은 이 책의 그림에서 선진국 분류 속에 들어가 있다.
그러니 우리는 선진국과 같은 이해관계일까?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처지에? 농업 성장과 수출 비중 그래프 사이에서 한국의 위치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림으로 그려 좀더 쉽게 느껴질지는 모르지만 통계로 세상을 읽는 게 수월한 일은 아니다.
오른쪽 페이지에 지은이가 달아놓은 설명을 읽지 않으면 그림의 숨은 뜻은 잘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지은이는 뜻 있는 통계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재주는 있어도 글재주는 없는 모양이다.
경제학자다운 학구적 문체는 그림보다 더 오래 글을 읽게 만든다.


그래도 이 책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일독할 만한 미덕이 있다.
칼 세이건의 말마따나 숫자는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도구이자 무기 중 하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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