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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과로사에 울고, 산재법에 울고
2. 과로사에 울고, 산재법에 울고
  • 정경심/법무법인 한울
  • 승인 2004.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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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 재해인정기준 지나치게 협소…의학적 인과관계 규명 어려워 보상은 ‘꿈’ 불행하게도 올해부터 국내에서 주5일 근무제가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과로사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 중독자이거나 과로가 체질화돼 있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과로가 ‘선행’이라고 믿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이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업무상 과로로 많은 직장인들이 쓰러지고 있지만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이다.
사망자의 유족들 대부분은 일반 기업의 근로자라면 근로복지공단에, 공무원이라면 공무원연금관리공단에, 사립학교 교원이라면 사립학교교원연금관리공단에서 ‘퇴짜’를 맞고서 소송을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사람 두 번 죽이는 셈’이 되는 것이다.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미망인들은 전업주부인 것이 현실이다.
승소해서 유족보상금이 나오기 전까지는 파출부든 일용 잡부든 마다할 게 못 된다.
당장의 생계를 꾸려 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균임금의 1300일치와 120일치의 장의비를 받을 수 있는 ‘업무상 재해인정’은 남겨진 유족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많은 미망인들은 산재보상보험법이 정해 놓은 업무상 재해인정기준이라는 걸림돌로 인해 그 꿈이 헛된 것임을 금세 깨닫게 된다.
미망인들은 “얼마 전에 과로해서 죽으면 산재가 된다고 신문에 났던데요?”라고 반문한다.
그러면 필자는 “그건 법원 얘기죠.”라고 대꾸한다.
그렇다.
근로복지공단에서 과로사로 인정해 주지 않으니까 법원까지 가서 소송을 하는 거다.
왜 법원에서는 되고, 공단에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근로복지공단 비해 법원은 탄력적 해석 근로복지공단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 39조 1항의 별표1인 ‘업무상 질병 또는 업무상 질병으로 인한 사망에 대한 업무상 재해인정기준’을 소위 산재 인정의 나침반으로 삼고 있다.
1994년 이전 이 기준은 시행규칙보다도 하위 법규인 예규였는데, 법원에서 한사코 “법원은 예규에 구속받지 않는다”라는 판결을 내리자 시행규칙으로 격상시킨 바 있다.
이 기준의 첫 머리에는 대표적으로 과로사의 기준이 되는 ‘뇌혈관질환 또는 심장질환’의 인정기준이 명시돼 있다.
뇌실질내출혈, 지주막하출혈, 뇌경색, 고혈압성뇌증, 협심증, 심근경색증, 해리성대동맥류가 발병되거나 이로 인해 사망이 인정되는 경우를 들고 있다.
공단의 기준으로 과로사 인정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한 가지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대체로 과로사는 ‘만성적인 과로’에 의한 것이 많다.
돌발적이고 예측 곤란한 정도의 긴장과 흥분, 공포 등이 올 수 있는 급격한 작업환경의 변화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적 인정기준에서 ‘만성적인 과로’란 “업무량과 업무 시간이 발병 전 3일 이상 연속적으로 일상 업무보다 30% 이상 증가되거나 발병 전 1주일 이내에 업무의 양·시간·강도·책임 및 작업환경 등이 일반인이 적응하기 어려운 정도로 바뀐 경우”라고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기준을 맞춰 보상을 요구하기란 그만큼 까다롭다는 이야기다.
실제 3년 전에 프레스공 김아무개씨의 뇌출혈 사건을 맡은 적이 있었다.
김씨는 주야간 교대작업을 하는 데다 3개월을 연속으로 월 100시간이 넘는 시간외 근로를 해 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주일 간의 여름휴가를 받고 휴가 마지막날 쓰러진 것이다.
작업의 속도나 작업량을 개인이 컨트롤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야간근무를 하며, 월 100시간을 넘는 시간외 근로를 한 것은 과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쓰러지기 직전에 휴가를 보냈기 때문에 만성과로가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공단측의 논리에 따르면, 아주 느슨한 일을 하면서 하루 8시간만 일하던 사람이 야간에 손님이 오는 바람에 3일 동안 3시간을 더 앉아 있다가 다음날 회사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면 그는 만성과로로 인정되는 식이다.
업무량을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루에 50통의 텔레마케팅을 하던 영업사원이 3일 이상을 연속으로 하루 70통 이상의 건수를 채웠다면 그는 만성과로라는 기준에 부합하게 된다.
그러나 가시적인 실적이 높아지지 않거나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만성과로에 시달리는 경우는 아주 많다.
IMF 이후 사망한 관세사사무소 직원 이아무개씨가 그런 경우였다.
이씨는 10여년 간 관세사사무소의 수입부장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거래처의 수입통관 절차를 대행하여 사무소 전체 수익의 4분의 1을 올려 줄 정도로 많은 양의 일을 해 왔다.
그러나 1997년 말의 IMF 직후 거래처의 수입물동량이 절반으로 줄면서 업무량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회사는 98년 2월 초에 가차없이 그를 수출부장으로 발령냈다.
물론 그는 수출업무를 잘 몰랐기 때문에 업무량은 줄었지만, 생소한 업무에 대한 부담과 앞으로 있을 더 큰 불이익에 대한 우려 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회사는 3월 초 그의 근무지를 김포에서 서울로 변경시키기까지 했다.
결국 이씨는 서울로 전보된 뒤 출장지에서 ‘변이성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업무량으로만 보자면 오히려 일상보다 사망 직전의 시기가 현저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공단이 요구하는 기준에 절대 부합할 수 없다.
이 사건은 행정소송에서 과로사로 인정됐는데, 공단측이 자신들의 인정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여 항소, 상고를 거듭한 끝에, 대법원에서 유족의 승소가 최종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발병시간도 논란거리다.
법적 인정기준에 따르면 근무시간 중에 발병하지 않은 경우에는 “그 질병의 유발 또는 악화가 업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음이 시간적·의학적으로 명백”해야 한다고 한다.
세상에! 필자가 10년 간 과로사 사건을 100건 넘게 다뤄 보았어도, 죽은 사람이 업무로 인해 죽었다고 명백하게 소견을 내리는 의사를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인과관계를 긍정하는 의사라 할지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고 사료된다”는 식의 매우 소극적이고도 신중하면서 또한 방어적인 표현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공단 패소율 높지만 법 개정 움직임 없어 공단측의 인정기준이 매우 형식적이고 수량화된 기준을 내세우고 있음에 비해, 법원의 과로사 인정기준은 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이다.
물론 법원은 별도의 인정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먼저 법원은 과로를 정의하는 기준조차 제시하고 있지 않다.
다만 해당 사건의 구체적인 업무의 내용, 성격, 근로시간, 작업강도, 책임강도, 업무 스트레스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과로 여부를 판단할 뿐이다.
구체적인 사건을 놓고 실사구시의 태도로 사망한 자의 업무내용을 따지지 않는다면, 근로시간이나 작업량의 측정이 어려운 사무직이나 영업직, 전문직의 과로를 판단할 길이 없을 것이다.
IMF 이후 구조조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과로의 척도에 포함시켜 숱하게 과로사로 인정한 판례가 나오기 또한 어려웠을 것이다.
법원은 과로와 사망과의 의학적 인과관계를 명백하게 요구하는 공단의 인정기준에 비해 훨씬 탄력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판결문에 흔히 인용되는 문구로, “업무상 사망은 업무와 사망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지만, 그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반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그 입증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또한 법원의 과로사 인정법리가 공단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문구가 하나 있다.
“업무와 사망과의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보통 평균인이 아니라 당해 업무수행자의 건강과 신체 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법리다.
이는 “재해자의 사망은 기존에 개인이 갖고 있던 질병의 자연적인 경과 과정에 의한 것”이라는 공단의 논리에 대응한다.
20대 건강한 청년과 60대 노인이, 아무런 지병이 없는 사람과 동맥경화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과로에 대한 민감도가 같을 수 있겠는가. 법원과 공단의 과로사 인정기준이 이렇게 다르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미망인들은 공단에서 유족급여를 주지 않겠다는 처분을 받고 망연자실하게 된다.
공단의 협소한 인정기준 때문에 불쌍한 남편을 위로해 줄 수도, 결손가정으로나마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경제적 버팀목을 갖게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미망인들의 눈물을 조금이나마 닦아 줄 수 있는 길은 멀리 있지 않은 것 같다.
노동부는 미망인들과의 과로사 관련 행정소송에서 자신들 기준의 협소함 때문에 공단이 패소하는 비율이 높은 데도 불구하고(뇌혈관 및 심장질환 패소율 30%대), 업무상재해인정기준을 수정하지 않고 있다.
간질환도 지난해 7월 개정된 기준에서 포함이 됐지만, 간질환중 과로와 관련된 것은 제외된 상태다.
법원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정해 왔던 대목이다.
혹시 법원과 같은 기준으로 과로사 인정을 하는 것보다는 법원에 제기되는 소수의 사건에 대해서만 사후적으로 보상하는 것이 낫다는 경제적 논리를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아니라면 업무상재해 인정기준을 완화하라는 끊임없는 제기에 대해 노동부나 공단이 진실하게 응답해야 할 것이다.
정경심/법무법인 한울 부설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실장 www.hanul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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