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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좋아하는 일만 해라-나카무라 슈지 지음
[서평] 좋아하는 일만 해라-나카무라 슈지 지음
  • 백우진/ <포브스코리아> 기
  • 승인 2004.04.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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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레이브 나카무라’의 인생역전 드라마

“이 책, 강력 추천한다.
정말 신나게 읽었고 가슴에 담아놓은 구절 역시 많았다.
한국과 일본의 시스템은 유사하거나 거의 동일한 점이 많았고 기업문화 부분에서는 더욱 그런 점을 느꼈다.
교육 역시 마찬가지.”

인터넷 서점 예스24에 올라온 독자 서평이다.
이 독자는 이어 “카타르시스를 느낀” 구절을 소개한다.
그 중 하나. “일본의 기업이 대학에게 기대하는 것은 젊고 자신감 없는 예스맨을 대량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특히 세칭 일류대학에서 온 시험귀신들의 경우 기업의 구미에 더욱 맞는다.


사람마다, 같은 사람이라도 처한 상황마다 책은 다르게 다가온다.
일본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 상당 부분 한국에도 해당된다.
하지만 나의 ‘코드’를 울린 부분은 나카무라가 열악한 환경을 딛고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이었다.


먼저 저자를 소개해야겠다.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 1954년생. 도쿠시마(德島)대 공학부와 대학원 졸업. 79년 중소기업이었던 니치아(日亞)화학공업에 입사. 20년간 휴일도 없이 반도체 개발에 파고들어 300여건의 특허를 출원. 제품이 성공하지 못한 탓에 ‘찬밥’ 신세. 93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휘도 청색 발광다이오드(LED)를 제품화하며 ‘인생역전’.


청색 LED 개발해 노벨상 물망

청색 LED는 모니터, 전광판, 휴대전화 등에 쓰인다.
휴대전화 번호판 뒤에 들어 있는 청색 LED가 바로 나카무라 특허로 만들어진 부품이다.
청색 LED 개발은 난제로 여겨져왔다.
빛은 빨강색에서 청색으로 갈수록 파장이 짧아진다.
파장이 짧으면 어두워진다.
강하고 선명한 푸른빛의 LED는 21세기까지 불가능하다는 예상도 있었다.


93년 12월. 나카무라는 손댄 지 5년여 만에 청색 LED를 개발했다.
그는 일약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일본인’으로 떠올랐다.
다른 기업들이 수백억 엔을 투자하고도 진척을 보지 못한 일을 나카무라는 혼자서 불과 5억여엔에 해냈다.
그는 장비를 대부분 직접 만들었다.


나카무라의 첫 번째 성공요인은 CEO와의 담판이었다.
그는 88년에 창업자 사장에게 청색 LED에 전념하겠다고 보고해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는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공학부에 1년간 유학을 다녀왔다.


89년 취임한 신임 사장은 지원은커녕 훼방을 놓았다.
나카무라는 92년 3월에 기존과 다른 방식의 청색 LED 시제품을 내놓았다.
밝기 등이 떨어져 상용화할 단계는 아니었다.
그 상태에서 제품을 출시할 경우 경쟁업체들이 연구성과를 가로챌 위험이 컸다.
그런데도 사장은 “바로 제품을 출시하라”고 지시했다.
나카무라는 이를 무시했다.
회장이 된 창업자로부터 허락을 받아놓은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두 번째 성공요인은 배수진. 고생 끝에 개발한 제품이 팔리지 않자 회사에서는 그를 무위도식하는 존재로 취급했다.
니치아의 주력제품은 형광등과 브라운관 안쪽에 입히는 형광체였다.
반도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회사에서는 시장성이 없는 제품 개발을 그에게 맡겼다.
이는 그가 개발한 제품이 성공하지 못한 진짜 이유였다.
계속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되자 나카무라는 억울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청색 LED에 ‘최후의 도박’을 건 것이다.
그는 전화도 받지 않고 회의에도 불참한 채 실험에 몰두했다.



“밑바닥까지 내려가면 열쇠가 나온다”

어떤 여건에서건 무슨 일이건 끝장을 본다는 자세가 가장 결정적이었다.
나카무라는 지구력과 문제해결 능력에서 남달랐다.
“아무리 현실에 낙담해도 한번 시작하면 자꾸자꾸 빠져드는 성격”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고등학교 때엔 대학에서 이론물리학이나 수학을 전공하려 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권유로 공학부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싫어하는 암기과목도 달달 외워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이론적인 공부를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지도교수는 실험을 중시했다.
논문이나 자료를 들여다보는 그를 지도교수는 꾸짖곤 했다.
“그런 건 아무리 읽어도 별로 도움이 안 돼. 손을 움직이고 몸을 써서 물건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거라네.”

나카무라가 입사했을 당시 회사는 전체 임직원이 200명뿐이고 개발과에는 서너 명밖에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장비를 직접 만들어야만 했다.
대학원 때의 경험이 도움이 됐다.
그는 이렇게 맘에 맞지 않거나 불리한 여건에서도 실력을 쌓아갔다.


문제해결 능력은 직접 인용하는 편이 낫겠다.
“그처럼 큰 격차가 있었는데도 다른 사람에겐 없는 장점이 내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직감이다.
예리한 직감은 내가 어떤 특정한 상태에 놓일 때 더 강렬하게 빛난다.
이 상태는 밑바닥까지 가는 고독이다.
연구개발이란 실패의 연속이다.
나는 점차 고독해진다.
잊혀진 존재가 되어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장비를 개량하고 다시 실험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 상태로 1년 반, 2년이 지나면 드디어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맨 밑바닥에 다다른다.
그 순간 내 집중력은 참으로 비상하게 곤두선다.


열쇠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견됐다.
우연히 참석한 응용물리학회에서 그는 핵심장비를 “누르듯이” 가동하는 기술에 관해 듣는다.
이 부사는 나카무라의 귀에 쏙 들어왔다.
“꼭 그 학회가 아니었더라도 상관없는 것일지 모른다.
밑바닥에 떨어져 언제나 그 장비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 무엇이든 그 일과 연결짓고 있었다.
혹시 주전자 뚜껑을 보고서 생각이 났을지도 모른다.
” 뉴턴의 사과와 같은 힌트였던 셈이다.


인생역전 드라마는 해피엔드로 끝맺지 못한다.
적어도 그가 회사에 몸담고 있는 동안에는. 회사는 청색 LED로 연간 10억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리게 됐지만 보상은 형편없었다.
그는 99년에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지금은 미국 산타바바라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이 일본의 기업문화와 학계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진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은 2002년에 일본에서 나왔다.
국내에 책이 번역돼 나온 1월 말, 도쿄(東京)지방법원은 ‘니치아는 나카무라에게 특허 대가로 200억엔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는 마침내 좋아하는 일을 한 결실을 손에 쥐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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