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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하벌라르표 커피, 세계화를 쏘다
[서평] 하벌라르표 커피, 세계화를 쏘다
  • 이정환/ 월간 <말> 기자
  • 승인 2004.06.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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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를 먹을 때는 장갑을 끼는 게 좋겠다.
코스타리카와 온두라스의 바나나 농장에서는 5일에 한 번씩 비행기로 농약을 뿌린다.
이곳에서 뿌려지는 수많은 농약 가운데는 다른 나라들에서 오래전에 금지된 파라콰트 같은 독성 농약도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돌’(Dole)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바나나가 대표적이다.


이들 농장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들은 대부분 심각한 피부병과 불임증을 앓고 있다.
포장 부서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바나나를 물에 헹구고 스티커를 붙이는 이들은 손톱이 짓무르는 것은 물론이고 비염과 안질, 위암, 온갖 폐 질환 등으로 고생하고 있다.
바나나는 이렇게 제3세계 노동자들과 그들의 환경을 파괴하면서 만들어진다.
다국적 기업들은 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세계를 떠돌고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존엄성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으면서 착취당하고 병들어 간다.
열심히 일하지만 이들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다국적 기업들은 세계 시장을 쥐고 흔들면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멕시코의 커피 농장에서는 중간 상인을 코요테라고 부른다.
그들은 농부들이 가져온 커피를 보고 “아주 질이 낮은 형편없는 커피구먼” 하고 말하곤 했다.
그들은 이 커피를 1킬로그램에 25센트씩 주고 사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농부들은 항구에 나가면 같은 커피를 95센트에 팔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코요테들이 말하는 것과 달리 이들이 만드는 커피의 품질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농부들은 속고 있었다.


하벌라르 커피의 실험은 여기서 시작됐다.
막스 하벌라르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식민지 인도네시아에서 원주민 운동에 앞장섰던 그의 이름이 이 새로운 커피회사의 이름이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제 하벌라르와 거래하는 농민들은 소득이 3배 이상 늘어났다.
절망적인 가난에 시달리던 농민들에게 하벌라르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했다.



더 많은 임금 지급된 ‘공정거래’ 커피

하벌라르는 협동조합 형태로 발전해 1985년에는 직접 커피 공장을 짓기도 한다.
조합은 조합원들의 커피를 코요테들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사준다.
조합원들은 기꺼이 회비를 내고 조합은 그 회비를 모아 새로운 공장을 짓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냥 원료를 파는 것보다 가공해서 제품을 만들어 팔면 훨씬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벌라르는 이렇게 만든 커피를 직접 유럽으로 수출하기로 한다.


농장의 농부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하면서 더 환경 친화적인 농산물을 만들고 제값을 받고 파는 것, 그것이 하벌라르가 생각한 다국적 기업의 노동 착취에 맞서는 방법이었다.
잘사는 나라들에게 값싼 동정을 구걸하기보다는 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하고 살아남겠다는 의미에서, 이들은 이 커피를 ‘공정거래’ 커피라고 부른다.
당연히 여기에는 농부들 노동의 가치를 공정하게 치르겠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그러나 하벌라르의 이 야심만만한 실험은 곧 벽에 부딪힌다.
가장 큰 문제는 농부들에게 더 많은 돈을 치를수록 커피의 가격이 올라가고 그만큼 경쟁력도 떨어진다는 데 있다.
우리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조금 더 낼지언정,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커피를 마시지는 않는다.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과 실제로 그들이 만든 커피를 사서 마시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가뜩이나 하벌라르의 커피는 후진국의 농부들이 만든 원산지 상품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맛과 품질이 다른 회사 커피보다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있지만 소비자들은 선뜻 하벌라르 커피를 사기를 꺼린다.
“많은 소비자들에게 하벌라르 커피는 ‘이념’을 위해 존재할 뿐 ‘제품’으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이 문제와 씨름해 왔습니다.
구매 의욕과 구매 행위 사이에 괴리가 있는 셈이죠.” 하벌라르의 창립자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신부의 이야기다.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생산비용에 포함시켜야

우여곡절 끝에 88년 슈퍼마켓을 비롯한 소매 시장을 뚫고 들어가는 데 성공하지만 하벌라르 커피는 여전히 싸구려 커피라는 인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벌라르의 네덜란드 시장 점유율은 아직 4% 수준에 머물러 있다.
스위스에서 15%를 차지했을 뿐 다른 나라의 점유율은 더욱 형편없는 수준이다.


하벌라르는 커피에 이어 바나나와 코코아, 꿀 등으로 사업 영역을 꾸준히 넓혀 나갔다.
커피가 시장 진입의 문턱에서 좌절한 것과 달리 상표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바나나는 다국적 기업들의 시장을 상당 부분 잠식해 들어갈 수 있었다.
하벌라르는 노동의 대가를 공정하게 치르는 대신 농부들에게 살충제와 인공 비료를 전혀 쓰지 않도록 했다.
이 바나나는 ‘공정거래’ 바나나라는 이름으로 팔려나갔다.


하벌라르는 시장의 원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원가를 낮추는 기업이 더 많은 돈을 벌고 결국 시장에서 살아남는 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문제는 기업들이 생산성이나 기술 혁신, 시장 전략으로 경쟁하기보다는 손쉽게 외부로 비용을 전가하는 전략을 선택한다는 데 있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더 많이 깎고 환경을 더 많이 해치는 기업이 경쟁력 있는 기업이 되고 결국 그런 기업들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다.


하벌라르가 주장하는 ‘공정거래’의 원칙은 경제적 효율성을 기본으로 하되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기업의 생산비용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국적 기업들이 가난한 나라에서 한 상자에 4.2달러씩 주고 사들이는 바나나를, 하벌라르는 7.25달러에 사들인다.
하벌라르는 7.25달러가 지속가능한 경제를 위한 합리적인 시장 가격이라고 말한다.
이 가격은 농부들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 가치이기도 하다.
힘겨운 싸움이지만 하벌라르는 결국 이 ‘공정거래’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게 이들이 세계화에 저항하는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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