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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국제 큰손 GIC 베일을 벗긴다
[커버]국제 큰손 GIC 베일을 벗긴다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4.07.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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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이면서 민간회사처럼 운영…천문학적 자금 운용, 국내서도 전방위 투자

“1천억달러요? 아마 1400억달러는 넘을 걸요?” 한 금융사 임원이 말한다.


“1400억달러, 더 되죠. 2천억달러는 된다는 게 통설이에요.” 한 정부 관계자가 말한다.


운용기금 2천억달러. 미국 최대의 기관 투자자인 캘리포니아공무원연금기금(CalPERS)보다 큰 규모다.
어쩌면 유럽 최대의 기관 투자자인 네덜란드공무원연금기금(ABP)보다 클지도 모른다.
GIC는 2001년 이후 기금 규모를 공개한 적이 없다.
따라서 2004년 현재 정확히 얼마나 운용하는지도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싱가포르의 국가신용등급을 트리플A로 유지시킬 만큼 운용 규모와 영향력이 크다는 소문만 국제시장에서 떠돌고 있을 뿐이다.


한국 자산시장에서도 GIC의 명성은 높다.
1999년 서울 시그마타워 인수를 시작으로, GIC는 지금까지 총 자산가치 7500억원어치의 빌딩을 서울에서 사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엔 옛 아시아나빌딩인 프라임타워와 건축 중이던 서울파이낸스센터를 샀다.
올해 들어선 현대상선빌딩이던 무교빌딩과 코오롱빌딩을 사들였고 최근엔 이랜드 계열 2001아울렛에 앞으로 5천억원을 투자하겠다는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본 계약을 진행하고 있다.


GIC는 국내 상장주도 상당량 보유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은행 1.18%, LG애드 5% 등 몇몇 기업 지분은 드러나 있지만 GIC가 보유한 전체 한국 주식 규모를 추산하기란 불가능하다.
지분 5% 이상을 보유하면 한국 금융감독원에 보고의무가 생기는데, GIC는 그 이상 보유한 종목이 적기 때문이다.
GIC는 관례적으로 주식투자 때 지배지분을 보유하지 않는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7조9천억원에 이르는 싱가포르 국적의 한국 상장주 투자자금 중 상당 부분이 GIC, 테마섹홀딩스, MAS 등 정부 유관기관 자금일 것이라는 정도다.



상식 뛰어넘는 독립성과 폐쇄성

GIC(Government of Singapore Investment Corporation). 한국말로는 ‘싱가포르투자청’쯤 된다.
싱가포르 정부의 외환보유액, 재정잉여자금, 국채 매각대금 중 일부를 전액 외화자산에 투자하는 기능을 하고 있으니 ‘Corporation’을 ‘공사’나 ‘청’으로 번역하는 것이 무리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GIC를 아는 국제 금융전문가들은 GIC를 ‘공사’가 아니라 ‘민간회사’로 본다.
공사로 보기엔 정부, 의회로부터 너무 독립적이기 때문이란다.
GIC의 투자를 받은 한 회사 임원은 “정부 기관이라지만 GIC은 완전히 민간 기관, 민관 투자자처럼 프라이빗 섹터 마인드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투자 스타일뿐 아니라 회사 운영 스타일도 우리나라의 ‘공사’와는 다르다.
정부가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지만 GIC는 지금껏 의회에 운용성과를 한번도 보고하지 않았다.
운용기금 규모에 대해서도 GIC 설립 20주년 기념으로 2001년 발간한 GIC 연감에 공개한 이후 업데이트하지 않았다.
야당이 “국민 세금이 들어갔으니 투자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해도 GIC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GIC의 독립성과 폐쇄성은 한국인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외부 감사도 외부 회계법인의 감사 없이 감사원한테만 받는다.
GIC는 여느 민간회사보다도 정보 공개에 인색하다.
GIC 등 정부회사(Government Company)는 정부가 100% 출자했더라도 회사법의 적용을 받아 의회의 직접적 관할권 안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를 방문하고 온 한 정부 관계자는 “GIC는 공기업이 아니라 일반 회사법상의 회사이므로 의회에 보고할 의무가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GIC가 싱가포르 외환보유액, 재정잉여금, 싱가포르 연금기금인 중앙후생기금(CPF)을 주요 운용자산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GIC의 독립성은 파격적이다.
한 금융사의 국제업무 담당 임원은 “정부, 의회에 대한 독립성이 GIC에게서 공기업이란 굴레를 벗기고 민간 투자기관 같은 민첩성을 부여했다”고 평가한다.


GIC가 일부 제약을 받을 때가 있긴 하다.
인사와 예산이다.
통제권자는 대통령이다.
헌법 부칙 5조는 인사와 예산과 관련해 GIC가 대통령의 통제를 받도록 하고 있다.
최고경영진과 이사 임명에 대통령 동의가 필요하고, 대통령이 동의하지 않을 땐 대통령 자문위원회가 추천하고 의회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재의결을 받을 수 있다.
재무제표와 예산안은 대통령이 승인한다.
대통령은 GIC에 대한 어떤 정보라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겉으로 보기에 GIC는 대통령 관할 조직 같다.



GIC 실세는 리콴유 전 총리

그러나 GIC의 실세는 따로 있다.
리콴유 전 총리 겸 선임장관과 그의 장남인 리시엔룽 부총리다.
리콴유 전 총리는 GIC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리시엔룽 부총리는 GIC 이사회 부의장과 MAS(Monetary Authority of Singapore) 의장을 겸임하고 있다.
MAS는 싱가포르의 중앙은행 겸 금융감독원 역할을 하는 정부기구로, 외환보유액의 일부를 GIC에 위탁한다.


그뿐인가. GIC 3분의 1 규모로 알려진 테마섹홀딩스 최고경영자(CEO) 자리엔 리시엔룽 부총리의 부인인 호칭이 앉아 있다.
테마섹은 올해 들어 한국 금융감독원으로부터 하나은행 지분 9.99% 인수를 승인받은 바 있는 투자기관으로, 한국으로 치면 정부 자산을 운용하는 자산관리공사쯤에 해당한다.
GIC가 싱가포르 외환보유액과 국채 매각대금, 재정잉여자금을 굴리는 일종의 펀드매니저로 채권·주식·선물 등 금융상품과 부동산에 단기 투자하는 반면 테마섹은 장기 투자자로 기업을 성장시켜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편다.


여하튼 GIC와 테마섹이 나눠 움직이는 정부 자산 규모는 상당하다.
MAS까지 포함하면 국가 재정을 좌우하는 주요기관의 장을 모조리 한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며느리가 꿰차고 앉은 셈이다.
정부 출자 100%의 공기업들이 의회 감시를 받지 않는 일도, 그 기업들이 한 집안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일도 현재의 한국에서라면 일어나기 어렵다.


싱가포르에선 어떻게 이런 구조가 허용됐을까? GIC 성공비결이 여기에 숨어 있다.
GIC를 전문적인 국제 투자기관으로 키운 리콴유 전 총리의 의지와 그에 대한 국내외의 신뢰 말이다.


리콴유 전 총리가 누구인가? 그는 1959년 취임해 90년 사임할 때까지 싱가포르 경제를 1인당 국민소득 400달러에서 1만2200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역이다.
현재 싱가포르 1인당 국민소득은 3만달러 수준에 이르렀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방장관은 그를 일컬어 “시대가 인물을 만드느냐, 인물이 시대를 만드느냐 하는 오래된 논쟁에서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칭송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뢰가 높은 리콴유의 평판이 독재적으로까지 보이는 GIC의 독립성을 낳은 것이다.


GIC는 싱가포르 경제발전 과정에서 축적된 잉여자산을 보존하고 증대시키자는 리콴유의 구상을 당시 싱가포르 관료들이 구체화하면서 81년 미화 75억달러의 운용자산을 가지고 탄생했다.
그의 자서전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From Third world to First)>에서 리콴유는 GIC 설립 목적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투자는 위험한 비즈니스다.
나의 기본적인 목적은 수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축한 것의 가치를 보호하고 투자한 원금에 적당한 수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수적인 운용철학은 지금도 이어진다.
GIC는 목표수익률을 미국, 일본, 독일 등 G3 평균 물가상승률을 넘는 것 정도로 잡고, 위탁받은 정부 자산의 국제적 구매력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예측 가능성, 일관성 유지가 성공비결

다른 한편으로 리콴유 전 총리는 자산운용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전 세계에서 인재를 끌어왔다.
GIC 설립 초기엔 미국과 영국의 투자 매니저들을 고용해 투자 시스템을 개발하도록 했다.
그 뒤에도 투자 전문가의 상당수는 외국인이 차지했다.
후에 세계은행 총재가 된 제임스 올펜슨도 한때 GIC의 투자자문을 지낸 적이 있다.
리콴유 전 총리는 GIC가 국제적 회사로서 개방적 조직문화를 갖도록 지휘했다.
현재 730명의 임직원 중 130명이 외국에서 영입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한 가지가 없었다면 GIC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일관성’. 한 금융사 국제업무 담당 임원은 “GIC가 정보 공개를 잘하지 않아도 국내외 투자기관들의 믿음을 얻는 건 GIC의 일관성 덕분”이라며 “조직의 투명성이 낮아도 일관성이 높으면 예측 가능성이 높아져 투자 기관들이 진출을 결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책 과정은 폐쇄적일지라도 일관성 있게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써온 싱가포르 정부와 리콴유 전 총리가 있었기에 GIC의 시도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12월, 동북아금융허브 추진전략을 발표하면서 한국 정부는 ‘한국판 GIC’의 설립을 선언했다.
싱가포르 정부가 GIC를 설립해 국제적 금융기관의 아시아 본부를 유치하고 국내 금융산업을 발전시켰던 전략을 벤치마킹하겠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한국 정부가 해외 국제 투자기관들을 찾아다니며 한국 기업을 홍보했지만 GIC와 같은 대형 투자자가 한국에 생기면 앞으로는 국제 투자기관들이 정보를 싸들고 한국으로 찾아올 터. 국제 시장의 ‘을’에서 ‘갑’이 되길 꿈꾸는 한국 정부의 소망은 이뤄질 수 있을까? 그 소망을 이루려면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할 것이다.
리콴유 같은 리더십 혹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
GIC의 서울 소재 빌딩 인수 내역(자료: 업계 종합) 구입시기/빌딩 이름/보유 상황 1999년/송파구 신천동 시그마타워/2003년 매도 2000년/중구 회현동 프라임타워(구 아시아나)/보유 중 /중구 태평로 서울파이낸스센터/보유 중 2004년/중구 무교동 무교빌딩(구 현대상선)/보유 중 /중구 무교동 코오롱빌딩/보유 중 /이랜드 계열 2001아울렛 분당점, 중계점/투자양해각서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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