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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박용범 베베콤 사장
[사람들] 박용범 베베콤 사장
  • 이희욱 기자
  • 승인 2004.09.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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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속 아기 온라인서 실시간으로 보세요” 중학교 시절부터 사진과 영화에 푹 빠진 ‘할리우드 키드’가 있었다.
어른이 된 그는 소원대로 사진작가로 국내에서 입지를 다졌다.
단편영화와 뮤직비디오를 거쳐 상업용 영화에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2004년 현재, 그의 명함에는 벤처기업의 ‘사장’이란 직함이 새겨져 있다.
몇 문장으로 박용범(43) 베베콤 www.bebecom.co.kr 사장의 삶을 요약하기엔 분명 무리가 있다.
국문학도의 길을 버리고 패션사진과 영화 공부를 위해 파리 유학을 떠난 그가 한국땅을 다시 밟은 것은 1993년. 학연도, 지연도 몰랐던 박용범 ‘작가’는 외국에서 배운 대로 무작정 포트폴리오를 들고 유명 광고대행사를 찾아간다.
이 패기 넘치는 작가의 팔딱팔딱 뛰는 감각과 주체 못할 자신감은 금세 그를 일류 패션작가의 반열로 올려놓는다.
그와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두세 달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시련은 98년에 찾아온다.
그가 아내 다음으로 삶의 동반자로 아끼던 친구가 갑작스런 질병으로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사람이 심연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 때마침 구원처럼 영화제작의 제의가 들어오고, 그는 지푸라기 잡듯 덥석 상업영화에 손을 댔다.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을 리 없었다.
‘박성일’이란 예명으로 만든 이 영화는 세간의 잣대로 보자면 참담하기 그지없이 끝났다.
제작과정에서 제작사로부터 ‘말 못할’ 말썽이 생기면서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실패는 불 보듯 뻔했다.
그래도 그는 개봉을 강행했고, 감독으로서 책임을 다했다.
영화는 혹평 속에 잊혀갔지만, 그는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개봉 당일, 그는 집에 들어서며 활짝 미소를 지었고, 그를 본 아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까지도 얼마든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직도 ‘작가’란 직함은 그의 재기를 보증하는 후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영상전문가의 시각을 의료분야로 돌린 것이다.
그가 2001년 설립한 베베콤은 태아와 신생아의 동영상을 웹사이트를 통해 산모나 가족에게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서비스를 내놓았다.
비디오 테이프에 영상을 녹화해 주던 방식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접속해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서비스인 것이다.
삼성제일병원과 강남차병원 등 국내 대형 산부인과를 중심으로 2년6개월에 걸쳐 시범 서비스를 실시하는 등 꼼꼼한 검증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매출 한푼 없이 15억원을 투입했다.
혹독한 검증과정을 거치면 어디서든 인정해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였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정식 서비스 한 달째. 서비스 확장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한 달 평균 출산건수가 1천건 이상인 전국 130곳 대형 산부인과 가운데 40여곳이 베베콤의 서비스를 도입했다.
필요한 장비와 시스템은 베베콤이 모두 부담했다.
병원은 돈 한푼 안 들이고 산모와 가족에게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다, 웹사이트 홍보도 덤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루 50여명이 방문하던 병원 홈페이지가 우리 서비스 도입으로 600여명으로 늘어난 곳도 상당수”라고 박용범 사장은 자랑한다.
“보수적인 병원 사회의 벽을 뚫기가 가장 어려웠다”며 슬며시 웃는 박용범 사장. 그는 안락한 삶이 보장된 작가로서의 기득권을 버렸다.
그 이유는 이렇다.
“출산은 한 가족의 고귀한 행사이자 신나는 이벤트입니다.
한 생명의 탄생을 온 가족이 공유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로, 하나의 가족 문화로 정립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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