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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GDP의 78%, ‘팍스 국민연금’ 시나리오
[이슈추적] GDP의 78%, ‘팍스 국민연금’ 시나리오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4.10.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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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재산 형성을 막는, 이자소득자로 하여금 근로생활자를 부러워하게 하는 저금리 기조가 원망스러운가? 그렇다면 국민연금 구조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민연금은 적정 수익률 6%대의 채권금리를 3%대 후반으로 끌어내린 장본인으로 지적받고 있다.


김영익 대신경제연구소 투자전략실장은 한국의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국고채 적정 수익률을 6%로 추정한다.
9월24일 기준 3년짜리 국고채 유통수익률은 연 3.55%였다.
무려 2.45%포인트나 차이가 난다.
물론 적정 수익률이란 이론적 수익률이다.
시장 상황이 어떤가에 따라 실제 수익률은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그러면 적정 수익률이 6%로 추정되는 시장에서 3% 중반의 수익률을 만들어낸 시장 상황은 또 누가 만들었을까?

김 실장은 국민연금의 채권 편식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그는 “650조원 규모 채권시장에서 국민연금이 보유한 채권만 100조원에 가깝다”며 “국민연금이 국고채, A등급 이상 회사채 등 우량채만 사모아 채권값을 올리면서 채권수익률이 비정상적으로 낮아졌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 6월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은 전체 자산의 88%인 98조원을 국내 채권으로 보유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채권 편식이 저금리 불러”

사실 국민연금의 채권투자 비중이 높은 것을 탓할 순 없다.
국내 금리하락엔 국내 투자자도 한몫했다.
최근 국내 기업, 개인의 채권투자 열풍은 금융통화위원회의 추가 콜금리 인하가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시장 금리를 끌어내릴 만큼 강해졌다.
국민연금은 철저히 국민 성향에 준거해 투자 비중을 정한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 보유 비중이 7.5%로 국내 가계의 주식 보유 수준과 비슷하다.
국민연금은 우리의 거울인 셈이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이 저금리 시대를 앞당겼다고 탓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국민연금의 덩치가 벌써 국내 채권시장이 감내하기 어려울 만큼 커졌다는 데에 있다.
국민연금연구센터의 재정수지표에 따르면 2010년 국민연금의 적립금 규모는 명목GDP(국내총생산)의 30%를 넘어선다.
2025년엔 45%를 넘어선다.
GDP 15% 남짓한 현재의 적립금 규모는 미래의 덩치에 비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다.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봐야 할 것은 현재 국회에 올라가 있는 정부 발의 국민연금 개정안이다.
이 개정안은 우리가 내는 보험료율은 소득의 15.9%까지 단계적으로 올리고 우리가 받는 소득대체율은 50%까지 단계적으로 내리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에 따르면 국민연금 적립기금은 2020년에 명목GDP의 절반을, 2040년에 78%를 넘어선다.
단일 기금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한다.


우리도 드디어 세계 최대의 자산가를 가지게 된다?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이때 국민연금이 자산의 20%만 주식으로 보유해도 우리 주식시장의 16%를 가지게 된다.
국민연금의 주식 포트폴리오에 들어가 있는 기업이 80여개 우량 기업임을 감안하면 한국의 우량주, 대형주가 대부분이 국민연금이란 단일 대주주의 지배를 받는 일이 현실화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더 무서운 것은 거대 규모의 펀드를 단일한 의사결정 시스템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이창용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다양한 견해, 다양한 위험 감내도를 가진 투자자가 서로 작용해야 시장이 제 기능을 한다”며 “국민연금 크기가 이렇게 커지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긴다”고 지적한다.
그의 경고는 섬뜩하게까지 들린다.
“국민연금 운용본부가 주식시장 전망이 좋다고 하면 주식수익률이 좋아지고, 채권시장이 좋다고 하면 채권시장이 좋아질 것이다.
” 시장점유율이 높은 자산가는 예언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미국의 연기금은 GDP의 95% 덩치인데도 별 문제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연기금시장에는 캘리포니아주공무원연금(캘퍼스)을 포함해 각 주 정부의 기금과 기업연금 등 다양한 참여자가 경쟁적으로 존재한다.
연기금 시스템이 국민연금 하나로 집중된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국민연금 적립금 확대는 저금리 외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부작용을 가져온다.
국가 전체의 리스크 감내도를 낮추는 것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기금이 채권, 주식에 투자하니 기금 적립도 결국 저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축과 기금 적립은 엄연히 다르다.
은행은 서민, 중소기업에도 대출해 주지만 국민연금은 중소기업 회사채를 보유하거나 서민 가계에 신용을 공급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국민연금은 공적 연금이라 원금 보전 욕구가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민 역시 연기금 주식투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국민연금은 하위법인 국민연금법에 따라 주식투자를 이미 하고 있는데도,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허용하는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반대에 부닥쳐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보수적인 우리 국민의 투자 스타일은 당분간 국민연금이 리스크 회피 성향을 유지하도록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국민연금 쪼개야”

하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산시장의 리스크는 커지고 있다.
2040년께엔 전 세계 자산시장이 엄청난 디플레이션 위기에 처하면서 금융자산을 팔고 싶어도 팔지 못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홍성국 대우증권 투자전략부장은 “북반구 전체의 고령화 현상을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 세계 인구구조가 피라미드형에서 종형으로, 다시 일자형으로 바뀌면서 전 세계 경제성장률은 저성장대에, 채권수익률은 저금리대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홍 부장은 “앞으로 인류는 대공황은 물론 이전 어느 시대에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인구구조를 가지게 된다”며 “2070년을 예상해 국민연금 재정을 추계하는 일이 무슨 의미냐”고 반문했다.


시장 투자전략가들과 경제학자들은 2가지 대안을 내놓는다.
단기적으로는 투자자산 다변화, 장기적으로는 국민연금 쪼개기. 주식투자, 해외 투자, 공공 목적 투자 등 투자처를 다변화하겠다는 보건복지부와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략은 유효하단다.
그러나 그 효과는 단기적일 뿐이다.
국민연금의 덩치가 커지면 전문가들이 지적한 부작용을 피할 수 없다.


유시민 열린 우리당 의원은 이런 문제를 의식하고 보험료율을 현행 9%로 유지하고 소득대체율만 55%로 낮춰 재정 고갈을 늦추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한마디로 ‘지금처럼 내고 덜 받는’ 것이 골자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부터 기초연금-공적 연금-기업연금 등 사적 연금의 중층 구조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반응은 시니컬하다.
한 이코노미스트는 말한다.
“중층구조 방안은 2000년에 공사연금제도 개선위원회와 월드뱅크가 만들어 내놓은 답이에요. 다 알려진 정답인데도 그동안 우리는 못 고쳤어요. 국민이 그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국민 표에 약한 국회의원이 자기 표 날아가는 법안을 주장할 수 있겠어요? 국민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국민연금 체제는 못 바꿀 거예요.”

그로부터 4년 뒤인 2004년 10월, 우리 앞엔 다시 선택지가 와 있다.
국민연금 개정안과 퇴직연금법안. 이젠 다시 국내 시장 전문가와 국제기구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때다.
우리 시장은 퇴직연금시장을 키우길, 우리 경제는 기초연금을 도입하길 바라고 있다.
국제기구는 단일 연금의 과다 성장을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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