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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인터넷의 엽기 괴짜들 "엽기하세"
[문화] 인터넷의 엽기 괴짜들 "엽기하세"
  • 오철우
  • 승인 2000.06.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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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미쳤나?” 인터넷의 인적 드문 뒷골목에서 우연히 접속해 들어간 사이트가 충격을 던져준다.
이름하여 ‘부엌칼학생창작단’. “새천년 저질쓰레기 엽기문화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자”는 선언이 부엌칼 그림과 함께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곳저곳에 핏빛이 선연하고, 게시판엔 입에 담기 힘든 잔혹한 욕설이 어지럽다.
이곳에 등록된 회원 사이트들도 ‘사이코네트워크’ ‘여고생패륜아협의회’ ‘자아존엄성파괴공작단’ 등등, 이름이 주는 상상만으로도 섬짓하다.
파괴와 일탈은 이곳에선 미덕으로 통한다.
또다른 뒷골목의 사이트들은 누가 더 단순·무식하고 지저분한지를 겨루는 방문객들로 시끌벅적하다.
얼마나 더러워질 수 있을까, 누가 더 더러운 얘기를 올리느냐가 이곳의 평가 잣대다.
이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단순무식과 삼류저질문화를 존경한다”고 외친다.
어떤 이는 ‘엽기인’을 자처하기도 한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충격적 사진들을 모아놓은 사이트에 방문객이 들끓고, 욕으로 대화를 나누는 욕 대화방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야쿠자가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을 통해 일본어를 배우는 사이트가 있는가 하면, 사이버 감옥에 혐오하는 사람을 가둬놓고 고문을 가하는 사이트도 나타난다.
어린이들의 다정한 친구 텔레토비가 살인마로 변신한 만화까지 통신망에 떠다닌다.
” 사이버문화연구실 www.cyberculture.re.kr의 민경배 실장(대학강사·사회학)은 이런 현상을 “가상공간의 엽기 신드롬”이란 말로 요약했다.
“우리는 저질 삼류문화의 배설구” 엽기 신드롬을 몰고오는 인터넷의 괴짜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부엌칼학생창작단 www.buakal.net을 운영하는 고지윤(24)씨는 대전에 사는 대학생이다.
고씨는 영화, 음악, 만화 등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신세대다.
세련된 감각의 부엌칼 웹사이트를 혼자 개발하고 운영할 정도로 만만찮은 웹 프로그래밍 실력을 과시한다.
그는 자기만의 가상공간에서 독특한 창작활동을 벌이는 데 대단한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의 창작 주제는 신체절단. “신체절단을 주제로 한 예술창작집단”이라고 스스럼없이 자신을 소개한다.
“신체절단은 별다른 뜻이 없는 소재일 뿐”이라고도 한다.
사실 그의 사이트에선 끔찍한 상상력이 발휘된다.
핏빛은 단골 색깔이며 자료실엔 신체가 훼손당하는 그림들이 게시된다.
<오18쇼>란 제목의 비디오 작품은 광포했던 80년 5월의 폭력을 소재로 다룬 것이다.
왜 폭력과 파괴의 엽기적 광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이틀간 네차례의 전자우편 인터뷰에 응했다.
사이트 분위기가 섬뜩하다.
왜 굳이 이런 사이트를 만드는가.
모두들 아름다운 것들만 한다.
(세상엔) 반대도 있는 것이다.
특별한 뜻은 없다.
(이곳 사이트에서) 정보를 교류하는 사람들은 어떤 성격인지 궁금하다.
다들 평범하고 착한 사람들이다.
세상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파괴본능을 너무 자극하는 것 아닌가. 나도 그리거나 만들 때 보면 무서울 때도 있다.
인간은 원래 파괴본능을 감추고 있다고 본다.
인터넷의 엽기 신드롬을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는 엽기를 생각한 적이 없다.
획기적인 비전문 창작집단일 뿐이다.
오래 전부터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오프라인의 생활은 어떤 모습인가. 사이트는 (내) 삶의 작은 부분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삶엔 많은 차이가 있다.
나는 법학도이며, 안경을 끼고 다니고 착하다.
법을 배우는 건 정말 싫다.
아트를 하고 싶다.
“오프라인의 삶은 즐겁기 짝이 없고 내겐 소중한 사람들이 많다”고 소개하는 고씨는 부엌칼 사이트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평범한 대학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부엌칼은 누구나 마음 깊숙이 감춰둔 원초적 욕망의 끄트머리를 잡아당겨낸 것일지도 모른다.
제멋대로 ‘엽기적으로’ 놀자 섬뜩함의 다른 곳엔 제멋대로 노는 엽기인들이 있다.
원초적 본능엔 재미가 있다.
‘고딩’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스타크래프트 게임동호회 ‘엽기길드’ www.swreviews.com/yg는 스타크래프트 마니아들 사이에선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인기 사이트다.
게임동호회를 일컫는 ‘길드’란 말에 엽기까지 붙었으니, 이름대로 ‘엽기적으로 노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정해준 게임규칙은 이곳에선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스타크래프트 제멋대로 가지고 놀기가 이들의 주특기다.
마치 어릴 적 로봇 장난감을 갖고 놀다 싫증이 나면, 로봇의 팔다리를 바꿔끼우는 괴상한 놀이를 시작하듯이, 스타크래프트는 이들에게 놀이의 대상이다.
길드장 박재완(18·인천 계산고3)군은 “게임은 규칙을 잘 활용해 이기는 게 목적이지만 우리는 즐기기 위해 게임을 한다”고 말한다.
‘엽기실험실’은 스타크래프트 마니아들에게 주목받는 코너다.
전투능력이 없는 일꾼을 싸움에 동원하는 것은 게이머들에게 어처구니없는 짓일 뿐이다.
하지만 엽기실험실에선 일꾼을 동원해 싸움을 벌이거나, 항상 이기고 패하도록 설정된 캐릭터들의 관계를 무시한 채 게임을 벌이기도 한다.
스타크래프트 마니아들의 눈엔 ‘엽기적 전술’인 셈이다.
길드장 박군은 “왜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게임을 해야만 하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런 재미 때문에 엽기길드엔 괴팍한 실험을 앞두고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를 놓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국내 엽기 신드롬의 원조는 아무래도 유머와 사진이다.
유덕상(30)씨는 지난 1년간 취미 삼아 모아온 기이한 사진과 유머들을 모아 5월 초 ‘엽기하우스’ www.ggame.net를 열었다.
그는 별 생각없이 연 자신의 사이트에 보내오는 네티즌의 호응에 한껏 고무돼 있다.
“홍보도 제대로 못했어요. 그런데 어디서 알고 왔는지 요즘엔 하루 3500명 이상씩 방문하더라고요.” 뜻밖의 호응이 일자 그는 요즘 날마다 새로운 자료를 퍼올리느라고 바쁘다.
유씨에게 ‘엽기’는 일상의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충격과 일탈의 재미다.
“되풀이되는 일상의 따분함을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고 생각해요. 왜 정해진 틀에 따라 살아야만 하는가, 이렇게 반문하는 심리겠죠. 항상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현실세계에 싫증나 유치하고 지저분한 게 대접받는 엽기에 묘한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요.” 단순·무식·지랄 “진수를 보여주마” 엽기가 유행하는 시대다 보니, 엽기를 상품화한 벤처기업의 인터넷 사이트까지 열렸다.
4월20일 문을 연 네오닉스의 단무지 www.danmoozi.com는 아예 엽기의 대중화를 겨냥해 “저질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인터넷 방송국을 열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단순, 무식, 지랄이라는 글자를 따 이름도 ‘단무지’다.
단무지 제작팀이 엽기인으로 나선 것은 올해 초 개설했던 연예인 관련 사이트의 실패 경험이 한몫했다.
“일부러 사이트의 격식을 유지하는 일이 싫었죠. 과연 뭐가 주류문화고 비주류냐 하는 팀 내부의 반란이 있었어요. 연예 관련 사이트가 실패로 판명나자 솔직한 욕망을 표출하는 사이트를 한번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2박3일의 창고합숙토론이 이어졌죠.” 4월3일부터 박시형(23·대리)씨 등 4명이 서울 반포동 사무실의 1평 남짓 창고에 틀어박혀 합숙토론을 시작했다.
‘엽기’는 자연스럽게 토론 주제로 등장했다.
피아노는 클래식을 연주하고, 코딱지는 남의 눈을 피해 파야 하고, 등등의 고정관념과 격식은 왜 항상 유지돼야 하는 것인가. 박씨는 “단무지는 누구나 작가가 되고 가수가 되는, 비주류 삼류문화가 기를 펴고사는 가상공간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포부를 밝힌다.
단무지팀은 오는 6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엽기 이벤트를 함께 벌이는 새로운 기획을 준비중이다.
이미 남녀 엽기미팅 이벤트를 비오는 날 벽제 화장터에서 벌여 호응을 얻었다는 자신감도 내보이고 있다.
일탈욕망과 인터넷의 만남 사실 엽기는 갑작스런 흐름이 아니다.
딴지일보 www.danji.com를 비롯한 패러디 사이트와 웹진들이 기성 권위주의를 조롱하면서 ‘엽기’라는 말을 애용해왔다.
일탈의 속시원한 배설효과 덕에 이들 사이트들은 새로운 문화흐름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 뒤 유사 사이트들이 속속 등장하고 엽기는 더이상 신선한 자극을 주지 못했다.
지난해 8월 나우누리 www.nownuri.net의 유머작가 김호식(25·필명 견우74)씨의 ‘엽기적 그녀’라는 제목의 유머시리즈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면서, 엽기는 신세대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행어로 다시 주목받았다.
김씨는 이런 인기 덕에 유머작품집 ‘엽기적 그녀’를 출간해 최근까지 주요 서점가의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김씨는 “엽기는 잔혹과 폭력의 수식어로 쓰여왔지만 네티즌들 사이에선 기성문화와 구별되는 개성을 상징하는 수식어로 순화돼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웹진 <임펄스> 편집장 한지현(신경정신과 전문의)씨는 “사람이 항상 좋은 꿈만 꿀 수 없듯이 나쁜 꿈도 존재하고 필요하다”며 “엽기는 이런 의미에서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의 욕망이 인터넷에 표출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엽기란 말이 퍼진 데엔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을 독특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잠재의식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단무지팀의 배종현(30) 과장은 “새롭게 등장하는 사이트 수식어일수록 더욱 쉽게 검색될 가능성이 높다”며 “엽기란 수식어가 유행하는 것은 무수한 인터넷 사이트들 가운데 자신이 색다르게 검색되려는 무의식의 전략일 수 있다”고 풀이했다.
“원초적 욕망을 들추는 꿈의 효과”
하지원 용인정신병원 과장, 웹진<임펄스> 편집장 “인터넷 가상공간의 기능 가운데 일부는 우리가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현실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간에서 욕구의 대리충족이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점점 꽉 짜여지고, 삶은 물샐틈없는 유·무형의 제재를 받고 있다.
인생은 정해진 대로 살아가도록 은근히 강요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일탈을 꿈꾸고 파격을 원한다.
마음속 어디에선가 ‘다 때려 치워’하는 속삭임도 있다.
엽기는 바로 이런 일상의 규칙과 예측가능한 결과를 뒤트는 것이다.
일상의 탈출이다.
사람의 상상력에 원초적 공격성이 덧붙여져 엽기의 문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쁜 꿈 또는 공격적인 꿈이 있기에 인간의 의식은 보호받을 수 있게 됐다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엽기문화를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엽기는 언제나 하위문화를 이루고, 반도덕이라는 특징을 띠어왔다.
엽기 마니아 역시 비주류문화의 사람들이다.
엽기문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면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 많아봐야 몇만명의 방문자를 지닌 소규모 엽기사이트는 인터넷 가상사회의 포트폴리오를 위해 존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또 막아봤자 사람의 욕망은 바뀌지 않을 테니 누군가가 다시 만들 것이다.
포르노 사이트를 누구도 없앨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양한 소수문화의 하나일 뿐
민경배 사이버문화연구실 실장, 대학강사(사회학) “일상탈출의 욕망은 이전에도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노래방이 처음 등장했을 때 마치 가수가 된 듯한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사람들이 열광했다.
놀이동산의 자이드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이제 일상으로 편입됐다.
엽기는 일종의 ‘구분짓기’다.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 낯설게 여겨 일부러 회피하는 것에 오히려 몰입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짓는 것이다.
엽기문화엔 자기만의 독특한 하위문화를 즐기면서 일상에서 분리되려는 전략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엽기 신드롬이 인터넷문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인터넷이 엽기문화를 확산시켰다.
엽기의 생산 측면에서 보면 인터넷에선 누구나 정보의 생산자가 될 수 있다.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엽기물을 간단하게 만들거나 복사해 배포할 수 있다.
유통 측면에선 인터넷이란 지구촌 통신망이 순식간에 폭넓은 배포를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소비 측면에서 인터넷은 정보의 소비자가 직접 정보를 찾아서 가져오는 방식이다.
마니아들에겐 친화력 있는 정보의 소비구조인 셈이다.
엽기 신드롬은 크게 우려할만한 일은 아니다.
광대한 인터넷 가상공간에서는 소수의 다양한 문화집단을 인정해야 한다.
그게 가상공간의 미덕이다.
극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수문화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인터넷에는 공통의 관심을 중심으로 가상공동체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엽기문화 역시 이런 공동체를 이루는 독특한 공통관심의 하나일 뿐이다.
지나치게 확대해서 볼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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