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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식 세계경영 빛과 그림자
김우중식 세계경영 빛과 그림자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5.06.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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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세계에알린홍보효과인정”vs“부실·정경유착세계화”엇갈려


“김우중회장은대단한사업가인데시대를잘못만난것같다.
”노무현대통령이우즈베키스탄을방문중이던지난5월11일,카리모프우즈베키스탄대통령이노무현대통령과동행한국내기업인들과의자리에서김우중회장의부재를안타까워했다.
우즈베키스탄은1993년대우그룹이자동차공장을설립했던곳.지금도우즈베키스탄시내를돌아다니는자동차가운데상당수가대우자동차다.
우즈베키스탄뿐만이아니다.
대우의세계경영의손길이미쳤던동유럽과동남아시아에는아직도‘김우중’과‘대우’의이름을기억하는사람들이적지않다.
99년대우그룹의몰락과함께세계경영도끝을맺었지만,그흔적은여전히남아있다.


대우의세계경영에대한평가는김우중회장개인에대한상반된평가만큼이나엇갈린다.
대우경제연구소장으로김우중회장의경영전략을뒷받침했던이한구한나라당의원은“많은기업들이지금대우가했던방식을따라하고있지않으냐”고반문하며“세계경영은결코실패한것이아니다”라고강조했다.
반면,김기원방송대교수는“대우의세계경영은결국부실의세계화,정경유착의세계화에불과했다”며“세계경영이옳은방향이기는하지만,김우중식으로하면안된다는값비싼교훈만을남겼다”고평가했다.
김교수는“대우와한국을세계에널리알린긍정적인측면은있지만,엄청난공적자금을쏟아부은것을고려하면홍보효과치고는비용이너무많이들었다”고평가절하했다.


세계를 하나의 기업처럼 경영 지난 93년 초. 대우그룹이 새롭게 선보인 TV광고가 많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누가 세계를 경영하는가! 지난날 만주 대륙을 호령했던 한민족의 기상을 오늘 세계경영으로 이어간다.
우리의 땀과 기술로 지구촌을 우리의 산업기지로, 세계를 우리 시장으로, 대우는 주요 전략 사업의 현지화를 통한 세계경영으로 한민족 경제의 활로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세계경영, 대우가 있습니다.
” 바로 대우그룹과 김우중 회장의 운명을 가른 ‘세계경영’의 출발이었다.
왜 하필 그때 세계경영이란 화두를 꺼내든 것일까? 일부에서는 김우중 회장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꼽기도 한다.
대우자동차 출신으로 <대우자동차 하나 못 살리는 나라>의 저자인 김대호씨는 “당시 김우중 회장이 김영삼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게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우중 회장의 대선 출마설이 김영삼 대통령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실제로 대선 출마를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대호씨는 “국내에서는 더 이상 제대로 된 투자를 하기 어려워지자, 일찍부터 해외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많이 보아왔던 김 회장이 해외 진출로 살길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치적 갈등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정준호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90년대 초는 대우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대기업이 해외 진출에 나섰던 시기”라고 지적했다.
단순히 국내 생산품을 수출하는 데서 벗어나, 해외 현지 생산과 판매를 모색할 수밖에 없던 더 큰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정 연구위원은 “80년대 말 3저 호황을 거치면서 국내에 자금이 충분했고, 냉전체제가 와해된 직후로 ‘세계화’의 조건이 서서히 갖춰지기 시작하던 초기였기 때문에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도 해외 진출이 가능했다”고 분석했다.
무역장벽이 강화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해외 직접 투자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해외 투자에 나섰던 다른 그룹들은 적지 않은 손해를 보고 물러났지만, 대우만은 ‘세계경영’을 앞세우고 그룹이 해체되던 99년까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대우측에서는 ‘세계경영’(Global Mangement)을 ‘세계를 하나의 기업처럼 경영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세계 곳곳에 생산 거점을 만들고, 이들을 네트워크로 엮어 단일한 경영자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국과 독일의 기술연구소, 폴란드의 완성차 생산공장, 인접국가의 부품공장을 하나로 엮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폴란드에서 생산된 자동차는 폴란드 국내 시장에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전 유럽시장으로 수출하게 된다.
해외에서 생산해 해외에서 판매하고, 금융도 해외에서 직접 조달한다는 개념이다.
세계화가 진전된 요즘의 관점이나, 선진 글로벌 기업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리 새로운 경영전략이라고 할 수 없지만, 대우의 독특한 점은 동유럽과 동남아시아 등 신흥 시장에 전략의 초점을 맞췄다는 데 있다.
무주공산 신흥시장 공략에 초점 국내의 다른 그룹들은 선진국 진출에 관심을 가졌지만 대우는 달랐다.
삼성전자가 영국에, 현대자동차가 캐나다에 진출했지만, 대우는 폴란드, 인도, 우즈베키스탄 등 신흥 시장 공략에 몰두했다.
우선 신흥 시장은 선진 시장에 비해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유리한 측면이 있다.
대우그룹의 가장 큰 고민은 대우자동차였다.
GM과의 결별로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국내 자동차시장에서 대우는 현대, 기아에 밀리는 ‘2류’에 불과했다.
국내 시장에서의 경쟁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제 수준이 우리나라의 70년대 수준이던 신흥 시장에서는 충분히 경쟁이 가능했다.
대우의 세계경영은 자동차를 중심으로 대우와 대우중공업이 이를 뒷받침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또한 신흥 시장, 특히 동유럽은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막 시작해 한마디로 ‘무주공산’의 상태였다.
선진국의 기업들은 엄청난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과 위험 부담 때문에 투자를 꺼렸고, 국내 다른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우는 과감하게 밀고 들어가 시장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삼성과 현대도 영국과 캐나다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결국 대우보다 7~8년 늦게 동유럽으로 들어갔다.
대우의 해외 투자 속도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93년 말 185개에 불과했던 해외 경영기지는 98년 말에는 396개의 해외현지법인과 134개의 지사, 15개의 연구소, 44개의 건설현장 등 총 589개로 급증했다.
세계경영의 기치를 내건 이후 4.5일에 1개씩 해외공장이나 지사를 설립하거나 인수한 셈이다.
해외 고용 인력도 2만2천명에서 15만2천명으로 늘어나 국내 대우가족 9만5천명을 추월했다.
이런 엄청난 속도전은 기업 인수를 통해 세계경영을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출 국가의 민영화를 앞둔 국영기업이 주 타깃이 됐다.
최종 결정권자인 김우중 회장이 직접 현장을 뛰며 ‘기업 사냥’에 나섰다.
보통 1년 넘게 걸리는 인수협상을 대우는 6개월 만에 해치웠다.
67년 무역회사인 대우실업에서 출발해 끊임없는 인수합병을 통해 재계 2위로 성장한 대우그룹의 역사를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세계경영은 기업을 사고팔아 큰 대우그룹의 성장과정을 세계화한 것이었다”며 “양적 팽창에 치중하는 기존 방식도 그대로 되풀이했다”고 지적했다.
어쨌든 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대우의 세계경영은 다른 기업들의 벤치마킹 대상으로까지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시 대다수 기업들이 94년 이후 지속된 불황으로 큰 어려움에 겪고 있었다.
특히 반도체 가격의 폭락으로 반도체 의존 비중이 높던 삼성, 현대, LG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대우는 해외 부문의 성과를 기반으로 매년 20% 이상의 매출증가율을 기록해 부러움을 샀다.
<월스트리트 저널>과 <파이내셜 타임스>가 대우의 세계경영을 특집으로 실었고, 국내 언론은 ‘불황을 모르는 새로운 모델’이라며 치켜세우기에 바빴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이 대우의 세계경영을 연구사례로 채택하기도 했다.
‘세계경영 따라하기’가 요즘 유행하는 ‘삼성 따라하기’ 못지않은 붐을 이루었다.
98년 유엔개발기구(UNCTAD)는 대우를 세계 100대 다국적 기업 가운데 43위, 개발도상국 다국적 기업 가운데는 1위로 발표했다.
불투명한 경영, 황제식 경영도 발목 그러나 곳곳에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한창수 연구위원은 양적 성장 전략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90년대 초중반 기업경영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다”며 “철강, 조선, 자동차 등 주요 산업이 공급 과잉에 접어들어 양적 확대로는 더 이상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더구나 대우는 기술 수준이 취약하다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정준호 연구위원은 “해외 기술연구소를 통해 부족한 기술력을 메워갔지만, 엔진 등 핵심기술은 해외에 나가서도 학습 효과가 전혀 없는 것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불투명한 경영과 황제식 경영도 발목을 잡았다.
김우중 회장의 현장경영은 사실상 1인 경영이었다.
그룹 전체의 경영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김우중 회장 한 사람뿐이었다.
별도의 모니터링 체계나 견제장치가 전혀 없었다.
김우중 회장은 개발독재국 대통령, 회교권의 왕가인맥, 체제전환국의 지도자 등과 탄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딜’이 필요한 경우에는 직접 나섰다.
김 회장은 우선 ‘이익이 나도 절대 돈을 가져가지 않는다’, ‘인력고용을 최대한 늘려준다’, ‘수출을 해서 외화를 벌어주겠다’등의 3대 공약으로 상대국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는 온갖 특혜를 요구했다.
부품 무관세 통관, 법인세와 소득세 면제, 공장용지 무료 제공, 경쟁 차종 수입관세 상향 조정, 파이낸싱에 대한 정부 지급보증, 하다못해 도로와 통신 지원까지. 폴란드 국영자동차회사인 FSO도 곤경에 처해 있던 바웬사 대통령을 지원하는 대가로 무관세로 자동차를 수입해 조립 판매하는 권리를 얻어냈다.
세계경영에 ‘정경유착의 세계화’라는 비판이 쏟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재무구조의 악화였다.
대우는 그 많은 투자자금을 어떻게 조달했을까? 세계 금융기관들이 모두 대우의 ‘마술 같은’ 금융 노하우를 궁금해했다.
그러나 대우그룹 해체 후 그런 노하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세계경영은 빚으로 지탱돼 왔던 것이다.
11억달러를 투자한 폴란드 FSO의 경우, 자기자본 투자액은 40%인 4억4천만달러였고, 나머지 60%는 차입금으로 충당됐다.
폴란드와의 5대 5 합작이기 때문에 대우의 몫은 4억4천만달러의 절반인 2억2천만달러가 된다.
하지만 이 금액도 수출입은행에서 80%까지 해외 투자자금으로 빌려주기 때문에 대우가 자체적으로 집어넣은 돈은 4400만달러에 불과했다.
해외의 저금리 자금을 활용하고 수백개 은행으로 대출자금을 분산한다고는 하지만, 세계경영은 결국 ‘남의 돈’으로 덩치를 키워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적정 투자수익이 회수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빚을 끌어와야 하는 ‘위험한 도박’이었던 셈이다.
한창수 연구위원은 “지금은 브릭스(BRICs)라는 용어까지 나왔지만, 당시만 해도 신흥 시장이 대우의 기대만큼 성장을 하지 않으면서 자금흐름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설상가상으로 97년 경제위기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이 급락하고, 환율은 폭등했다.
재무구조가 흔들리자 김우중 회장은 불법과 편법에 기대기 시작했다.
해외 판매법인들의 자동차 수출대금을 해외계좌로 빼돌리고, 해외건설 공사를 허위로 조작해 실적을 부풀렸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완성차 분해조립이라는 ‘수법’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국내에서 생산된 완성차를 우크라이나 국경 지방까지 수송한 다음 해체해, 국경을 넘어 현지공장으로 가져가 조립했다.
자금난으로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금융기관의 대출을 받기 위해 짜낸 ‘묘수’였다.
검찰 수사 결과, 97년부터 3년 동안 무려 41조원을 회계장부를 조작해 부풀린 것으로 드러났다.
대우는 이렇게 조작된 회계장부를 근거로 금융기관으로부터 10조원을 대출받는 ‘사기’를 저질렀다.
“세계경영 성공했다면 산업구조조정 10년 당겨” 대우그룹 몰락 이후 대부분의 해외 사업장들은 헐값에 매각되는 운명을 맞았다.
만약 대우의 세계경영이 다른 길을 걸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준호 연구위원은 “대우는 저임 노동력에 의존하던 한계업종 중심의 그룹으로 해외 진출이 불가피했다”며 “세계경영이 제대로만 됐더라면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조정을 10년은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90년대 초반부터 한계 업종들을 해외로 빼내면서, 단계적으로 국내 산업을 첨단화, 고도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또한 정 연구위원은 ‘밖으로의 세계화’는 기업과 국가가 함께 움직여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테면, 일본은 90년대 초 동유럽 나라들에 도서관을 지어주고, 일본어학과를 만들어주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렇게 길을 닦아놓은 이후에 기업들이 본격적인 진출을 시작했다.
정 연구위원은 “동유럽 현지에서 한국 기업이 투자를 많이 했음에도 벼락부자가 돈 자랑한다는 식으로 보지만, 일본 기업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며 “그런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대우의 세계경영 현황](97년 6월말 기준, 총 538개 사업장) 아시아/135개 법인, 68개 지사, 3개 연구소, 29개 건설현장 아프리카, 중동/ 24개 법인, 27개 지사, 40개 건설현장 오세아니아/ 5개 법인, 1개 개발, 1개 지사 유럽/ 73개 법인, 15개지사, 1개 건설현장, 5개 연구소 중남미/ 54개 법인, 20개 지사, 3개 연구소, 1개 건설현장
백기승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 이사
“세계경영은 계속돼야”
백기승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 이사(현 유진그룹 전문)는 해외 도피 중인 김우중 회장의 입장을 언론에 전달하는 창구역할을 해왔다.
백 이사는 김우중 회장의 귀국을 앞두고 회사에 휴직 신청을 했으며, 조만간 사무실도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백 이사는 “김우중 회장의 귀국은 대우 사태의 종결을 의미한다”며 “이 정리 과정을 통해 대우와 김우중 회장의 공과와 대우 사태 처리 과정을 재점검해 보는 것이 우리 경제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경영’의 핵심은 뭔가? 세계를 권역별로 놓고 브릭스(BRICs) 등 잠재성이 있는 시장에 들어가, 네트워크화하는 것이다.
완제품 수출단계, 반제품 조립단계, 현지 생산단계를 차례로 거치면서, 10년 정도는 그 시장에서 함께 성장해 나간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대우는 코어 핵심부품사업과 라이선스 수수료 중심으로, 기존 제조업보다 한 단계 높은 하이테크 중심으로 옮겨간다.
또 하나는 글로벌 소싱이다.
국가 단위를 벗어나 가장 경쟁력 있는 곳에서 싸게 부품을 공급한다는 개념이다.
부채를 끌어다 외형만 부풀린 것 아닌가? IMF 이후 많은 기업과 금융회사, 부동산이 외국 자본에게 넘어갔다.
그들이 자기 돈 갖고 와서 투자하나. 결국 빚이다.
남들이 들어와서 빚으로 우리 기업을 사들이는 것은 상관없고, 우리가 나가서 똑같이 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할 수 있나. 당시 우리가 투자한 것은 계획한 것까지 합쳐봐야 350억달러, 약 35조원에 불과하다.
IMF로 국가신용등급이 갑자기 6단계 떨어지고 환율은 2배로 뛰면서, 진행 중이던 100억달러 규모의 투자가 부채가 돼버리면서 어려움에 빠졌던 것이다.
검찰에서는 국내 재산 해외 도피하고 하는데, 은행에 갚기 위해 쓴 돈들이다.
그때 대우가 그걸 안 갚았으면 어떻게 됐겠나. 신용이 깨져 한국 기업은 다시는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는 대우 사태가 구조적인 문제였다고 하지만, 우리는 유동성의 위기였다고 믿는다.
지금 살아남은 해외사업장들은 엄청나게 잘 되고 있다.
당시에는 해외사업장에서 손실을 보고 있지 않았나? 공장을 짓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조업은 손익분기점 맞추는 데 최소 3~4년을 본다.
자동차는 10년이다.
단순 잣대로 투자 실패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94년에 처음 투자를 시작했고, 97년이면 불과 3년째다.
투자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보고 하는 것이다.
자꾸 부채비율을 문제 삼는데, 부채비율을 맞추기 위해 투자를 안 하는 게 문제인가, 아니면 미래를 위해 투자를 안 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인가, 한번 따져볼 문제다.
선진 시장보다 신흥 시장에 치중한 이유는? 선진시장에 가서는 승부가 잘 안 된다.
그들이 이미 훨씬 나은 시설로 제조공장의 기반을 쥐고 있다.
선진국은 마케팅 중심으로 파고들고, 신흥 시장에서 싼값에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선진시장에 들어가면 된다.
세계경영은 여전히 유효한가? 한국의 상황은 지금도 똑같다.
우리 경제에 다른 돌파구가 있나. 자원, 제조업 기반, 금융, 하나같이 부족하다.
고용은 없고 분배가 잘 안 된다.
계속 샘물이 들어와야, 파이가 커져야 나눠 먹을 것도 생긴다.
계속적으로 성장 기반을 가져갈 필요가 있고, 세계경영은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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