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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삶] 냉철한 눈매로 세계화를 관통하다
[책과삶] 냉철한 눈매로 세계화를 관통하다
  • 박용진
  • 승인 2005.08.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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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여름, 자고 일어나면 으레 ‘세계화’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던 사람이 대통령이던 시절, 나는 몇 푼 안 되는 돈을 손에 움켜쥐고 유학길에 올랐다.
그 해 겨울, 나는 900원선이었던 원/달러 환율이 2천원으로 급등하는 놀라운 광경을 객지에서 목격해야 했다.
나야 어차피 돈 보내줄 사람도 없던 터라 별다른 충격은 받지 않았지만, 주위의 수많은 유학생들이 궁핍해진 살림 탓에 고생을 했고, 많은 사람들이 보따리를 싸기도 했다.
사정이 이쯤 되자 미국 정부에서 한국 유학생들에 한해 특별 취업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것이 내가 겪은 IMF의 시작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정년퇴직 기념으로 받았던 행운의 열쇠를 금 모으기 운동에 기부하시기도 했고, 나는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죄로 부모님을 위시한 친지와 친구들로부터 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미래에 관해 전에 없던 질문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세계화’라는 단어는 이제 그 말을 떠들고 다녔던 전직 대통령만큼이나 ‘한물 간’ 느낌이다.
중국산 생선을 먹고 칠레산 포도로 입가심을 하면서 ‘영어 캠프’와 ‘어린이 중국어 연수’를 저울질하는 요즘, ‘세계화’는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아니라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화된 사회의, 그래서 더 이상 나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8년 전 나를 괴롭혔던 그 수많은 질문들에 어떻게 답할까? 우리가 겪은 세계화는 과연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어떻게 달랐고, 앞으로 우리의 전략(그런 게 있었다면)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까? 두 얼굴 세계화, 균형 잡힌 관점서 정리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세계화의 정치경제학’ 연재물을 발전시킨 이 책에서 저자는 세계화를 둘러싼 주류/비주류 경제학의 다양한 쟁점들, 예컨대 시장 개방이 소득 분배와 빈곤에 미치는 영향, 세계화와 노동/시민운동의 갈등, 국가와 제도의 역할 등에 관한 최신 논의들을 일반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꼼꼼히 정리해 놓고 있다.
전체 3부로 된 이 책의 제1부는 자본시장 자유화나 국제교역의 증대가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지에 관한 경제학의 일반론을 소개하고, 세계화에 찬성/반대하는 사람들이 제시한 실증증거를 검토한다.
자본 및 무역 자유화의 성장 효과를 경제학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검증하는지 그리고 각 입장에서 제시한 증거들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에 관심이 있다면 유용한 부분이다.
제2부는 세계화가 사람들의 실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세계화를 비판하는 이들은 세계화가 후진국의 생활 수준을 더욱 악화시키고 각국 내의 빈부 격차와 선후진국간의 격차 또한 확대시킨다고 주장해 왔다.
실제로 80년대 이후 세계화의 진전과 동시에 소득 분배가 전 세계적으로 악화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여기서 저자는 선진국의 임금 격차 악화는 기술 진보와 그에 따른 노동시장의 재편이 주된 요인이었으며, 후진국의 빈곤 문제에 미치는 세계화의 영향 또한 반세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일방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아동 노동과 착취 공장이라는 강력한 이미지로 대변되는 세계화의 부정적 효과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후진국의 심각한 부정부패, 그리고 외국 자본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악랄한 국내 기업의 횡포 등 다른 여러 문제들을 차치한 채 세계화에만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태도 또한 견제하는 세련된 입장을 선보인다.
세계화된 경제체제에서 국민국가가 과연 존립할 수 있는지, 그게 가능하다면 국민국가의 역할은 어떻게 변화하고, 거시경제정책의 효과에 관한 이론들은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국민국가와 반세계화 운동의 미래’라는 장에서 심도 깊게 다루어진다.
마지막으로 박정희 시대부터 IMF 이후까지를 아우르는 세계화와 한국 경제를 다루고 있는 제3부는 새로운 관점에서 한국의 현 상황을 되짚어볼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장이다.
한국 경제의 기적적인 경제 성장은 자율적이고 발전 지향적인 정부가 자본 유입과 국제무역을 관리하고 외국 자본을 강력히 통제하면서 생산적인 투자를 촉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저자는 평가하는데, 발전 국가로 규정되는 이런 제도적인 구성이 국내 대재벌의 성장과 대외적 압력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변화 등으로 인해 80년대 후반 무너진 것이 90년대 금융 개방과 함께 금융위기로 폭발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IMF 금융위기의 원인을 발전국가의 해체와 부적절한 금융 개방의 조합으로 보는 이 견해는 환란을 낡은 정실자본주의의 위기로 해석했던 주류경제학이나 모든 책임을 재벌과 무능한 정부에 돌리는 비주류 경제학과는 다른 독특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편향된 이론, 골치 아픈 용어는 가라 개인적으로 이 견해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발전국가 체제가 소규모의 빈국이었던 60, 70년대 한국 상황에 적합한 제도형태였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인 경제 발전으로 그 성격과 외연이 크게 변화, 확대된 80년대 이후 한국 경제에서도 그 체제가 적합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조그만 읍내에서 급전을 운영하는데 통했던 방식이 대도시의 은행에서도 통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듯이, 국가경제의 양적, 질적 성장에 따른 새로운 주도세력의 등장과 구 제도의 파괴, 신 제도의 발전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까? 물론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사실 세계화만큼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된 주제도 드물다.
따라서 각각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론들도 극단적으로 엇갈리는데, 일관되고 균형 잡힌 관점에서 여러 주제들의 다양한 입장들(및 이들을 뒷받침하는 실증적 증거들)을 정리, 요약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 더해 세계화의 시대 흐름에 역행하지 않으면서 그 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미시적인 전략을 제시하고자 한 저자의 노력은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런 노력 때문에, 오히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내러티브가 약하고 필자의 개인적인 주장이 덜 드러나는 점이 아쉽지만, 극단적으로 치우친 주장들에 답답했던 사람들이나, 각종 미디어에서 난무하는 편향된 이론들과 골치 아픈 용어들 때문에 이 주제에 접근이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이 책의 출간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보스, 포르투 알레그레 그리고 서울 이강국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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