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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책과삶]지식 인클로저 시대가 시작됐다
[라이프/책과삶]지식 인클로저 시대가 시작됐다
  • 김윤지/ 객원기자
  • 승인 2005.10.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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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 현재 코스닥 등록 기업 가운데 특허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기업은 어디일까? 정답은 반도체, LCD 공정장비를 만드는 회사인 주성엔지니어링이다.
2005년 5월 말 기준으로 주성엔지니어링이 소유한 특허권은 156건으로 이 회사는 인터넷기업인 NHN(104건), 이동통신회사인 LG텔레콤(80건) 등을 제치고 코스닥 특허왕으로 등극해 있다.
하지만 이 특허왕의 과거에는 특허에 대한 ‘우울한’ 기억도 숨어 있다.
반도체 공정 장비로 성장을 거듭하던 주성엔지니어링은 2002년 LCD용 장비까지 개발해 미국, 일본, 대만 등 세계 시장으로 판매처를 넓혀갔다.
그러자 이 분야를 거의 독점해 오던 미국 어플라이드 머터리얼(AMAT)사가 2003년 12월 대만 법원에 주성엔지니어링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새롭게 떠오르는 대만 LCD장비시장에서 주성엔지니어링의 영업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1년이 넘는 소송 끝에 주성엔지니어링은 특허 침해 무혐의 판정을 받았지만 그동안 대만에서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특허 침해 기업’이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대만에서는 이 장비에 대해 수주를 단 1건밖에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성엔지어링이 코스닥 특허왕에 오를 정도로 특허 출원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이런 쓰라린 경험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터다.
중제:미국에 이어 일본, 유럽 등 전방위 공격 나서 하지만 이젠 어떤 기업도 주성엔지니어링이 겪었던 경험을 먼 산 바라보듯 할 수는 없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특허권이 강화되고 있는 요즘 분위기에선 언제 어디서 ‘특허소송’이라는 칼끝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식재산 전쟁-한국의 특허 경쟁력과 대응전략>은 바야흐로 그런 특허 전성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제 특허를 제대로 모르고는 기업의 존망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특허청 사무관이기도 한 저자는 ‘특허’라는 무기가 얼마나 강력하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풍부한 사례와 자료를 가지고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저자는 2004년 봄과 가을 PDP로 촉발된 한일 기업 사이의 특허 분쟁이 지식재산 전쟁의 신호탄이라 이야기한다.
사실 특허 분쟁이 빚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미 1980년대 후반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사가 반도체 특허에 대해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을 대상으로 특허분쟁을 제기한 이후, 미국 기업들의 특허 공세는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그런데 최근의 특허 분쟁에는 전과는 다른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 공격수가 미국에서 일본, 유럽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일본은 80년대 이후 미국의 특허 공세로 막대한 특허 사용료와 소송비 등 특허에 관한 한 수업료를 톡톡히 치러 왔다.
그랬던 일본이 2002년을 기점으로 정부, 민간이 힘을 합쳐 특허와 관련된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모두 정비하더니 대대적인 공세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난 20년 동안 핵심기술을 공개하지 않기 위해 특허를 자제하던 분위기에서 180도로 자세를 바꾼 것이다.
일본의 주 공격상대는 일본과 경쟁분야가 가장 많이 겹치는 한국, 대만, 중국 등이다.
일본은 마치 지난 10년간의 부진, 즉 ‘잃어버린 10년’을 특허권으로 회복하겠다는 듯 특허소송을 물밀 듯 제기하기 시작했다.
2004년 한 해 동안 일본 기업들이 우리나라의 삼성SDI(4월), 삼성전자·LG전자·기륭전자(5월), 대우일렉트로닉스(9월), LG전자(11월) 그리고 대만의 난야테크놀로지(2월), AUO(6월), E&E(6월) 등을 상대로 모두 7차례나 되는 특허소송을 제기한 것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일본의 변화에 이어 이제는 유럽도 특허권 강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조만간 전 세계가 특허라는 새로운 분쟁 속으로 빠져들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열심히 연구해서 신제품만 내놓으면 성공하리라 순진하게 생각했다가는 먼 이국 땅에서 날아온 “당신의 제품에 나의 특허가 이용되었다”는 통지서 앞에 망연자실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 나의 머리로 고안한 건데 무슨 특허 침해냐고? 이젠 내 머릿속의 지식도 엄밀한 의미에선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 비슷한 생각을 이미 특허로 등록해 두었다면 그것은 이제 그의 사유 재산이다.
마치 16세기 영국에서 푸르른 들판에 말뚝을 박으며 자신의 사유지를 획정하던 인클로저 시대와 같이, 지식 인클로저 시대가 도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제:특허는 이제 첨단 마케팅 수단 특히 최근 선진국들이 특허소송을 마구 제기하는 것은 단지 특허 사용료만을 거두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설사 특허 침해가 아니라고 판결이 나더라도 얻는 이점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에 특허망을 구축해 놓고 이와 유사한 경쟁사의 제품이 등장하면 일단 특허소송을 제소한다.
만약 소송의 결과가 좋으면 특허료 수입을 확보할 수 있고,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에라도 경쟁사의 영업을 제한할 수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경쟁사를 협상의 테이블로 유도해 크로스 라이선싱 계약체결과 같은 부가이익을 챙기기도 한다.
특허 하나만 잘 챙겨두면 신제품의 가격과 시장점유율을 모두 유지하고, 궁극적으로는 연구 개발 투자비용을 회수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 기술 선진국들에게 특허는 첨단 마케팅 수단이다.
따라서 이제 특허에 대한 대비가 없다는 것은 기술을 개발할 두뇌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활용할 만한 전략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한국의 현실이 그렇다.
일본에 혼쭐나기 시작한 대기업들이 조금씩 준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무대책’으로 일관하고 모습이 저자의 눈에는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저자를 이를 위해 새로운 인력 양성 방법에서부터 새로운 인적, 물적 제도 구축에 이르는 ‘특허 전문 네트워크 양병설’의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안한다.
이제 선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과거 인클로저 시대 몰락했던 중소농들의 처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울타리를 치고 좋은 땅을 고를 준비를 해야 한다.
쥐꼬리만 한 월급봉투를 위해 코피를 흘리며 철야 작업을 하던 여공들의 시대가 다시 오지 않는 한, 이제 우리가 살아 갈 길은 새로운 지식 재산들을 제대로 꾸려가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김윤지/ 객원기자 yzkim@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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