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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뚜앙떼리요르]유괴의 역설
[푸뚜앙떼리요르]유괴의 역설
  • 임현우 경영컨설턴트
  • 승인 2005.10.1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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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게리 그레이 감독의 1998년 영화 <네고시에이터>에서 경찰측 협상가인 크리스 경위(케빈 스페이시 분)는 악당과 협상을 벌이면서 매우 인상적인 대사를 남긴다.
“너는 네이던을 죽였고, 나는 대니를 죽였다.
이제 내 손은 너만큼 더러워졌다…협상을 하기에 좋은 상황이다.
” 최근 발표된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중의 한 명인 토마스 C. 쉘링이 분석한 ‘유괴의 역설’은 이 영화 속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
다음과 같은 가상의 상황을 생각해 자. 백 생은 사업가 박원모를 유괴하여 몸값을 챙기고, 박원모가 석방을 요구하자 고민을 시작했다.
‘석방하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까, 그냥 죽여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렇게 백선생이 주저하는 것을 본 박원모는 약속한다.
“풀어주면 절대로 신고하지 않겠다.
그러니 그냥 석방해 달라.” 하지만 백 생은 여전히 미심쩍다.
‘지금이야 신고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석방된 다음에 그 약속을 지킬까? 고하여 나를 처벌하고 몸값을 되찾으려고 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결국 이 상황에서 약속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살인이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신고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자신에게 해롭기 때문에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게임이론가들은 이러한 약속을 ‘신뢰할 수 없는 공약’이라고 한다.
쉘링은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박원모에게 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중요한 범죄를 실토하고 그 증거를 백 생에게 제시하라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전략을 추천한다.
예를 들어 박원모가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살인죄를 백 생에게 고백하면, 백선생의 예상이 바뀐다.
‘석방된 후에 신고한다면, 나는 그의 살인죄를 폭로하여 보복할 수 있다.
박원모가 신고하여 몸값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유해한 일이 된다.
따라서 박원모는 신고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살인을 저지를 필요 없이 석방해도 되지 않을까?’ 이제 박원모는 ‘자신의 손 역시 더럽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약속의 신뢰도를 높였다.
쉘링은 이처럼 갈등상황에서 ‘공약의 신뢰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밝히고, 신뢰성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분석해 이를 경제학을 포함한 모든 사회과학의 중요한 문제로 부각시켰다.
이제 노사협상, 기업합병협상, 가격경쟁, 전쟁과 외교 등의 모든 갈등의 현장에서 쉘링의 개념과 시각은 기본을 이룬다.
특히 냉정 시대 군비 경쟁과 제한에 있어서 그가 끼친 영향은 막강했다.
자연과학분야의 노벨상과는 달리 경제학 분야의 노벨상은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매번 논란을 남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러 개의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라는 극찬부터, 단지 흥미로울 뿐 경제학 발전에 실질적인 기여를 한 바가 없다는 평가까지 다양하다.
게다가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그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참여해 국방부의 장관과 차관인 맥나마라와 맥노튼의 배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그의 전략에 따른 미국의 선택이 그의 이론적 예측과는 달리 참패로 귀결되었다는 비판은 여러 가지 점에서 아픈 지적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호오와 무관하게, 그의 분석과 이론을 배제하고는 복잡한 갈등양상을 분석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절판된 그의 대표적인 두 저작 <갈등의 전략>과 <미시동기와 거시행동>의 한국어판은 이번 노벨상 수상에 힘입어 곧 다시 출판될 것이다.
지식과 즐거움을 위하여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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