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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삶]17세기 네덜란드로 떠나는 여행
[책과삶]17세기 네덜란드로 떠나는 여행
  • 박복영/ 자유기고가
  • 승인 2005.11.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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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로 떠나는 여행 올 봄 파리에 갔다가 루브르 박물관에 들렀을 때 유난히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허드렛일을 하는 아낙네나 농부의 가족들을 그린 네덜란드 화가들의 작품이었다.
모두 17세기 작품이었는데 내가 알고 있는 짧은 미술 상식으로는 그런 일들이 당시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17세기라고 하면 이탈리아에서 다빈치나 라파엘로가 중세적 종교화와 결별하고 모나리자나 인간적인 얼굴을 한 성가족을 그리기 시작한 지 불과 한 세기 정도 지났을 때다.
당시에는 프랑스는 물론이고 르네상스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도 대부분의 그림들이 여전히 종교적 내용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로마의 신화나 역사를 모티프로 한 그림들이거나 왕과 귀족의 초상화 정도였다.
17세기 화가 베르메르의 작품에서 모티프 얻어 그런데 네덜란드에서는 19세기나 20세기 미술의 소재가 될 법한 것들이 어떻게 17세기에 이미 소재가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 그림들은 루브르의 그 장소가 아니라 어느 현대적인 미술관에 갖다 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의문을 가진 채 언젠가는 네덜란드 미술에 관한 책을 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루브르를 떠났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후에, 우연히 예술의 전당 미술관 한쪽 편에 있는 상점에 들어가 책을 구경하다가 <진주 귀고리 소녀>를 손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책의 표지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리에 옅은 쪽빛 띠를 두르고 영롱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내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내 눈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커다란 눈망울은 진주 귀고리만큼이나 반짝이고, 발그레한 입술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약간 벌려져 있었다.
상체는 옆으로 한 채 고개만 돌리고 있어서 곧 뒷모습을 보이고 배경이 되고 있는 검은색 공간 속으로 떠나버릴 것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쪽빛 두건과 붉은색 입술과 노란색 윗도리가 어우러져 그림의 배색은 화려했지만 그 화려함이 결코 지나치지는 않았다.
표지 그림을 보며 이 소녀의 운명은 책 속에서 어떻게 펼쳐질까 하고 제법 오래동안 혼자 상상을 해봤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 그림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얀 베르메르(1632~75년)의 작품이라는 것은 모르고 그냥 이 소설의 표지쯤으로만 생각했다.
미국의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 역시 이 그림을 몇 년 동안이나 자기 방에 걸어 놓고 상상했다고 한다.
저 소녀는 누구일까?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정숙한 여자일까 아니면 요염한 여자일까? 화가인 베르메르와는 무슨 관계일까? 그녀는 결국 무수한 상상을 자극하는 이 한 장의 그림을 모티프로 소설을 썼고, 그 소설 덕분에 말 그대로 하루 아침에 유명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되었다.
슈발리에는 소설에서 이 소녀를 네덜란드 델프트의 한 가난한 타일공의 딸로 태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화가 베르메르의 하녀로 일하게 되는 운명으로 만들었다.
소녀는 과묵하고 세심한 화가의 화실을 청소하다가 안주인 몰래 베르메르에게 물감을 만들어 주고 결국은 그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작가는 소녀의 운명을 그림이 암시하는 정도만큼만 화려하고 슬프게 만들어간다.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A girl with a pearl earring)(1665~66년)는 ‘북구의 모나리자’라고 불릴 만큼 네덜란드인들의 자부심의 대상이 되는 작품이다.
몇 년 전 덕수궁에서 열린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전’에 아쉽게도 이 그림은 오지 못했는데, 당시 네덜란드 관계자는 이 그림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네덜란드 대통령의 결심이 필요하다고까지 말했다.
베르메르는 이 그림처럼 한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실내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그림 속에는 창으로 비치는 햇살 아래서 편지를 읽거나 진주 목걸이를 들어보는 귀부인도 있지만, 레이스를 짜거나 우유를 따르는 하녀들도 등장한다.
베르메르는 델프트 길드에 등록되어 평생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작품은 고작 36점에 불과하다.
그것도 위작 논란이 있었던 ‘버지널 앞에 앉은 여인’이라는 작품까지 포함한 숫자인데, 이 작품은 최근 소더비 경매에서 3천만 달러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베르메르의 그림은 화가의 성격처럼 모두 매우 정적이고 차분하지만 상당한 깊이를 지니고 있다.
커튼이나 탁자, 지도 등의 소품을 배치해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고 때로는 바닥에 격자무늬 타일을 넣어 선원근법으로 그 효과를 높인다.
그리고 왼쪽 창으로는 빛이 들어오게 하여 진주 귀고리가 영롱하게 빛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루브르에서 가졌던 의문, 즉 여전히 성화가 유럽 미술을 지배하던 17세기에 네덜란드 화가는 어떻게 벌써 평민들의 모습과 삶 그리고 풍경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해 지금은 나름의 답을 가지고 있다.
당시 남부 네덜란드에서는 플랑드르 지방의 영향을 받아 구교가 지배한 반면, 북부에서는 신교가 우세했다.
이러한 종교적 분할은 종교적 영향력이 크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이 그림의 소재 선택에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네덜란드가 대서양 무역의 중심지로서 경제적 번영의 황금기를 구가했다는 사실이다.
1588년 영국 함대가 스페인 무적함대를 침몰시키면서 유럽 상업의 중심은 리스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다.
상업이 발전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형성되면서 그림에 대한 이들의 수요도 증가했다.
교회로부터의 수요가 아니라 시민사회로부터의 수요였다.
부유한 상인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했고 거실이나 사무실에 걸어 놓을 수 있는 그림을 필요로 했다.
성모의 자리에 소녀를 앉힌 경제적 풍요 한편 경제적 풍요는 예술에 대한 사회 전체의 경제적 배려의 폭을 넓혔다.
화가는 시장의 수요에 맞는 작품을 그리려 했고 그 결과 소위 특정 소재를 집중적으로 그리는 ‘전문화’의 발전이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
르네상스를 계기로 그림의 소재는 하느님과 그 자식에서 왕과 귀족으로 내려왔고, 네덜란드에서는 다시 상인과 평민 나아가 자연으로까지 내려온 것이다.
어느 시대나 미술 혹은 예술은 잉여노동의 산물이고 이러한 분야에 투입될 수 있는 노동량 혹은 그것을 감상할 수 있는 대중의 정신적 여유는 사회의 전반적 생산력 혹은 경제수준에 크게 좌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지나친 표현이지만 의식이 족해야 예절도 알듯이(衣食足而知禮節), 미학도 어느 정도의 풍요가 뒷받침된 후에야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법(衣食足而知美學)인 모양이다.
우리도 소득이 웬만큼 되니 이제야 그 지긋지긋한 종로통의 가게 간판이 예뻐지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도 모두 같은 이치가 아닐까. 결국 ‘진주 귀고리 소녀’를 탄생시킨 17세기 네덜란드의 경제적 풍요는 그녀의 귀에 걸린 찬란한 진주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성모의 자리에 소녀가 서 있다는 데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헤이그의 마우리츠 하위스 왕립미술관에서 그 소녀와 만날 수 있을 날을 꿈꿔 본다.
박복영/ 자유기고가 bypark@kie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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