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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삶]세계화를 옹호하는 레스터 서로우를 기억함...
[책과삶]세계화를 옹호하는 레스터 서로우를 기억함...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 승인 2005.12.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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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좌파라 부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 그에게 세계화는 왜 진보적인가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 레스터 C. 서로우 지음 현대경제연구원 옮김 청림출판 1만8천원 레스터 서로우 교수의 수업을 한 학기 들은 적이 있다.
2004년 상반기였으니, 그가 지금 소개하려고 하는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 (원제목: Fortune Favors the Bold)를 출판한 지 불과 두세 달 지나서였다.
첫 시간 수업에 들어온 서로우 교수는, 모든 교수가 첫 시간에 그렇듯이 두 권의 교재를 사라고 했다.
한 권은 자료집이었고, 또 한 권은 책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그 책이 본인이 쓴 <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였다.
조그만 학교 서점의 재고는 순식간에 동이 났고 서로우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에 책을 가져다 놓고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한 권씩 팔았다.
순간 무례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세계적 경제학자가 학생들을 상대로 이렇게 책 장사를 해도 되는 것인가? 이것이 서로우 교수가 그토록 목청 높여 주장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인가?” 그러나 묵직한 그 책을 집어들고 표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그 억하심정은 눈 녹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에게 감사 드리는 일에 관한 한,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감사의 글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첫 문장의 유려한 비유, “세계화는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부터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세계적 석학’의 거대 담론이 주는 부담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장미의 이름>이나 <다빈치 코드>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의 이면에 대한 흥미진진한 한 편의 이야기 보따리 같았다.
내용에 동의하느냐 여부를 떠나서,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일류 저널리스트의 글을 읽는 것처럼 경쾌했다.
“세계화가 가난을 해결한다”는 도발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서로우는 세계화를 이야기한다.
때로는 매우 열정적으로, 때로는 매우 냉소적으로 세계화를 옹호하고 세계화 반대자의 논리를 격파한다.
너무나 명쾌해서 도발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의 논리가 이어진다.
첫 번째 도발은 세계화가 가난을 퇴치하고 있다는 얘기다.
반세계화 운동 진영에서 세계화가 빈곤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주장을 펴는 것에 대한 정면 대응이다.
서로우는 1700년의 세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와 가장 가난한 나라 사이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거의 같았다.
모두가 비슷한 기술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뒤 3세기 동안, 세계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2000년이 되었을 때, 가장 부유한 나라의 1인당 GDP는 가장 가난한 나라보다 140배가 컸다.
그러니 세계화가 가난을 확산시킨 것 아니냐고 목청을 높일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 기간 동안 1인당 GDP 절대 액수가 줄어든 지역은 전 세계에서 오직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 뿐이다.
그 지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역외 무역량이 줄어든, 다시 말해 세계화가 후퇴한 곳이다.
세계화가 진행된 다른 모든 지역에서 빈곤 그 자체는 줄어들었다.
빈부 격차가 커졌을 뿐이다.
두 번째 도발은, 세계화는 좌파적 주장도 아니지만 우파적 주장은 더욱 아니라는 주장이다.
사실 좌파에도 우파에도 세계화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거부감을 가진 사회주의적 좌파 세력은, 세계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서 일국 수준에서 생산수단의 공동체적 소유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반세계화를 외친다.
그러나 세계화가 빈곤층과 제3세계를 더 빈곤하게 만든다는 좌파 반세계화 진영의 주장은 서로우를 움직이지 못한다.
사실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화 물결의 가장 큰 수혜자는 대표적 제3세계 국가였던 중국이다.
세계화가 진행되고 반세계화 운동이 거세지는 동안에도, 제3세계 국가들의 소득은 계속 늘어났다.
세계화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만 빼고 말이다.
반대로 세계화로부터 옛 사회주의의 세계주의적 성격을 떠올리는 국수주의적 우파 세력은, 세계화가 한 국가의 문화 순혈주의를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반세계화를 외친다.
특히나 미국 문화가 세계화의 옷을 입은 채 국경을 무너뜨리고 침탈해 온다는 게 이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다.
그러나 정말 미국 문화가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세계 문화가 미국을 침투하고 있는 게 맞다.
할리우드는 이미 이민자 출신 배우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러셀 크로우, 니콜 키드먼, 장 클로드 반담, 캐서린 제타존스, 아놀드 슈워제너거가 그들이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프랑스의 비방디에게 인수되었다.
미국 유수 대학 학생의 30~40%는 외국인이고, 세계를 지배하는 스포츠는 유럽의 축구, 세계를 지배한 장난감은 일본의 포켓몬과 레고다.
미국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가? 오히려 세계 문화가 미국을 지배하고 있다.
미국은 단지 흡수하고, 재가공해 확산시킬 뿐이다.
두 개의 도발을 기초로, 세 번째 도발이 나온다.
서로우는 유엔이나 세계은행 같은 세계 정부적 성격의 기구들의 역할을 지지하면서도, 그들이 제3세계 국가들을 돕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제3세계 국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은 세계화의 피해로부터 구제해 주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화의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는 일이다.
그래서 국제 기구들은 제3세계에게 대출 지원을 퍼붓는 대신,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 세계화 시대의 시장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지식 자산을 갖출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서로우는 주장한다.
여기까지 듣고 보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평정심을 잃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다.
쌀시장 개방 문제를 놓고 한국 농민들은 당장 굶게 생겼다며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한가롭게 세계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이야기하다니.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마라도나가, 사회주의 국가 쿠바의 지도자 카스트로가,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 같은 이들은 이념과 인생사는 다르지만 한 목소리로 반세계화를 외치는데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지. 머리로는 고개를 끄덕인다 해도, 가슴으로까지 세계화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기는 아직 이른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서로우의 강의 시간 때 모습이 좀 위안이 될지 모르겠다.
서로우는 자신의 수업 시간에 미국의 대표적 좌파 지식인 중 한 명인 로버트 라이시 교수(브랜다이스 대학)를 초청해 강의를 맡긴 적이 있다.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라이시는 그 시간에 미국 노동문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유럽식 사회체제를 찬양하다시피 했다.
서로우는 때로 “우리 좌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말을 내뱉곤 했다.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서 주류경제학, 즉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도구는 반드시 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데에도 비슷한 정도의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
행운의 여신은 왜 용감한 자의 편인가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이 책의 원 제목 ‘Fortune Favors the Bold”는 호머의 일리아드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네이스를 쓴 로마 시인 버질의 싯구다.
운명에 끌려 다니는 주인공 아이네아스를 통해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노래하던 로마 시인의 글을, 세계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세계 경제 흐름에 부딪친 지금의 국가, 기업, 개인들의 운명에 빗댄 제목이다.
“세계는 우리의 의사에 관계없이 흘러가고, 용감하게 게임에 뛰어든 사람들도 질지 모른다.
그러나 용감하게 뛰어들지 못한 사람들은 분명 지고 말 것이다.
행운의 여신은 용기 있는 자의 편이다.
” 그 문학적 감수성이 번역판 제목에서는 사라져 버린 점이 못내 아쉽다.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timelast@ser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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