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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마에스트로’의 화려한 퇴장
[특별기고]‘마에스트로’의 화려한 퇴장
  • 박종현
  • 승인 2006.01.2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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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 시대는,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나드 케인스는, 화폐생산경제에서는 ‘고용’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문제가 ‘금리’라는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변수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금리를 통제하는 최종적인 의사결정자가 바로 중앙은행의 수장인 것이다.
사실상의 세계 중앙은행 수장인,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연준) 의장이 19년간의 ‘장기집권’을 뒤로 하고 퇴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87년 당시 레이건 대통령이 폴 볼커 의장의 후임으로 그를 지명했을 때 세상의 반응은 차가웠다.
엄청난 경기후퇴를 낳기는 했지만 불가능해보였던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터프가이’ 폴 볼커에 비해, 닉슨 정부 시절에 대통령 고문으로 정치에 처음 입문한 후 컨설팅 업체를 이끌고 있던 그린스펀은 중책을 수행하기에 적절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취임 2개월 만에 일어난 ‘검은 월요일’의 주가폭락 사태를 가볍게 수습했을 뿐 아니라 이후의 러시아 디폴트 위기, 초대형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탈의 파산, 2000년의 미 주가거품 붕괴 등을 별 탈 없이 해결하면서 “세상을 구한 현자”가 되었다.
미국 경제가 고주가 행진 속에서 유례없는 장기호황을 달성했음에도 물가안정 기조가 유지될 수 있었던 점 또한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세상을 구한 현자”? 거품양산의 주범?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이 없지는 않다.
우선, 90년대 중반부터 미 연준의 확장적 통화정책 기조를 집요하게 문제삼은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잡지는 그린스펀이 미국의 자산가격 거품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했으며 나아가 사실상 이를 방조해왔다는 비판을 오랫동안 제기해왔다.
90년대에는 경제가 완전고용 수준에 접근했음에도 정보기술 혁명에 기초한 ‘신경제’의 출현이라는 미명 아래 금리를 인상하지 않아 주가거품을 키웠으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증시 붕괴, 엔론 사태, 9·11 테러 등에 맞서 지나치게 금리를 낮춤으로써 부동산거품을 새롭게 발생시켰다는 게 비판의 논거다.
실제로 그린스펀은 96년 12월, 미국의 주식시장을 일러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이라고 경계하면서도, 정작 민주당 일각에 의해 제기된 증거금 인상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있다.
이러한 선택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금융시장에서는 투기에 따른 주가상승과 펀더멘털을 반영한 주가상승을 중앙은행이 사전적으로 판별해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장에 대한 신뢰’라는 그린스펀 자신의 오래된 신념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거품이 터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유동성을 신속하게 공급함으로써 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는 해도, 이러한 구제금융의 제공은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그린스펀의 철학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주식시장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모건스탠리의 이코노미스트 스티븐 로치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한다.
즉 그린스펀이 저금리 기조를 지나치게 오래 유지한 결과, 미국에는 과잉지출 또는 경상수지 적자 확대, 동아시아 국가들에는 과잉저축이라는 형태로 전 세계적 차원에서의 글로벌 불균형 또는 거품을 키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회사 소속인 앤디 시에의 경우에는 약간 다른 평가를 내놓고 있다.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을 두 국면으로 나누어, 90년대의 경우에는 케인스주의적 글로벌 부양책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이 전 세계의 주요한 수요 원천이라는 역할을 맡도록 함으로써 러시아와 중국 등 사회주의권의 체제전환을 돕고 나아가 세계화가 한층 진전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는 공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편, 그린스펀이 인플레이션을 강경하게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었으며, 이로 인해 고용이나 성장과 같은 실물부문이 부당하게 위축되었다는 또 다른 입장에서의 비판도 존재한다.
미국의 진보적 시사주간지인 <네이션>의 윌리엄 그라이더나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특히 그린스펀에게‘금리조정에 따른 분배효과’에 주목한다.
‘물가안정’과 통화가치 수호라는 명분 위에 채무자보다는 채권자에게, 노동자보다는 자산가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금리를 조정함으로써 국민경제의 분배구조를 악화시켰다는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실제로 그린스펀은 전임자인 볼커와는 달리, 인플레이션 강경파(inflation hawk)는 아니었다.
90년대 중후반에 실업률이 낮아짐에 따라 인플레이션을 우려한 많은 사람들이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요구했음에도, 그린스펀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계적 금융위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 공세적인 금리인하를 주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이 다른 연준 의장들과 차별성을 보일 수 있었던 부분은 바로 유연성에 기반한 놀라운 상황 대응능력이었다.
그는 새로운 문제들이 불거질 때마다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해내곤 했다.
그 자신이 유능한 중앙은행가로의 평판을 얻고 있는 머빈 킹 영란은행 총재가, 알프레드 마셜에 대해 바친 케인스의 헌사를 그대로 적용해 그린스펀이야말로 “수학자이자 역사가 그리고 철학자로서의 재능을 함께 갖춘 희귀한 존재로서의 위대한 경제학자”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어쨌든 <네이션>의 그라이더는 그린스펀이 30년대의 매리너 에클스 의장 이래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가장 강한 연준 의장이었다고 평가한다.
에클스가 완전고용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 개입주의적 중앙은행의 전통을 세웠다면, 이러한 전통을 최종적으로 해체하고 통화가치와 금융안정을 추구하는 새로운 중앙은행을 구현한 사람이 바로 그린스펀이라는 얘기다.
또한 그린스펀은 자본가와 지식인의 파업을 그린 소설 <아틀라스>를 통해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공격적인 개인주의’를 열정적으로 옹호한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아인 랜드의 사상을 현실로 옮기려 했던 실천가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린스펀의 가장 큰 역할은 통화정책을 통해 물가와 금융시장을 안정시켰다는 점보다는, 신자유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새로운 미국사회의 건설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가장 강한 연준 의장” 그는 금융통화정책의 영역을 넘어서, 여러 사회·경제적 의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미국 시민들이 연방정부 예산의 삭감, 작은 정부, 사회보장제도의 민영화, 감세, 소유자사회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의제’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동의를 하게 된 데에는 사심 없는 ‘현자’ 그린스펀의 지지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그가 실물과 금융에 대해, 약자와 강자에 대해 균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실물에 대해서는 ‘자기책임’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반면, 금융에 대해서는 시장의 붕괴를 막는다는 명분 위에 지나치게 관대한 기준을 적용했던 것이다.
그라이더가 그를 ‘외눈박이 왕’에 비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가 금융시장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미국 경제는 외형상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삶의 질은 피폐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일각의 비판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린스펀은 임기 말에 이르러 그동안의 명성을 크게 훼손시키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는 과거 클린턴 대통령의 집권과 함께, 행정부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지출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연준은 총 수요 축소에 따른 경기후퇴를 막기 위해 금리인하를 단행한다는 정책 공조를 주도함으로써 당파를 초월한 중앙은행 수장이라는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에는 감세안을 지지하고 군비지출에 따른 막대한 재정적자 누적을 사실상 방관함으로써, 기존의 ‘신념’과 정치적 중립성을 깨뜨렸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분명한 건 그린스펀은 단편적이고, 때로는 상호모순적인 자료들로부터 누구보다 정확하게 경제의 흐름을 읽어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내린 판단을 시장이 수긍하도록 하는 데 가장 탁월한 소통능력을 발휘한 연준 의장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퇴임 이후 그동안 누적된 부동산 거품이 터지고 이 과정에서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에 커다란 파장을 미친다면, 그동안 쌓아왔던 위기관리자로서의 평판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마에스트로’ 그린스펀에 대한 최종 평가는, 앞으로 부동산 거품 문제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그리고 벤 버냉키 차기 연준 의장이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아직은 ‘미래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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