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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삶]에너지 관점에서 그려본 대안사회의 밑그림
[책과삶]에너지 관점에서 그려본 대안사회의 밑그림
  • 박복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 승인 2006.02.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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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 혁명 제러미 리프킨 지음/이진수 옮김 민음사 펴냄 /1만4천원 지금 인류는 1차 에너지원의 40%를 석유에 의존하고 있어 석유공급에 차질이 발생하면 누구에게나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대부분의 나라가 에너지 안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혈안이 된 나라로는 단연 중국과 인도를 꼽을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최근 2〜3년간 세계 곳곳에서 유전 개발에 참여하거나 닥치는 대로 유전을 사들이고 있다.
이 두 나라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우선 국민소득 2천 달러 미만의 저소득국가로서 앞으로 석유소비의 급속한 증가가 예상되는 나라들이다.
그리고 1990년을 전후해 석유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환되면서 석유안보에 극도로 예민해졌지만, 사실은 지금도 석유자급률이 30%를 웃도는 나라들이다.
시장경제의 경험이 짧고 여전히 경제운용에서 정부의 역할이 압도적이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따라서 유전 매입을 위해 정부가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고 그 리스크도 정부가 부담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한 나라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서유럽 선진국이나 일본의 에너지 안보정책의 핵심은 에너지 소비 억제와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맞춰져 있다.
EU는 신재생에너지 점유율을 2010년까지 12%로 높이는 계획을 추진 중이며, 스웨덴은 얼마 전 15년 이내에 석유의존을 완전히 끊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일본은 미래에너지 개발을 위해 총 15조원 이상의 자금을 투자하고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소득 2만 달러대에 진입한 1990년대부터 석유소비량이 정체상태에 있거나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석유수입 선진국 중 거의 유일하게 석유소비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미국도 최근 대통령 국정연설에서 석유중독증을 줄이고 청정에너지 개발 투자를 늘리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석유소비를 계속 늘리면서 유전을 챙겨두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에너지원인 석유 소비 자체를 줄이는 이런 정책이 바로 선진국형 에너지 안보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석유문명 앞에 닥친 위기와 그 대안 그렇다면 정부가 지나치게 많은 리스크를 부담해 과잉투자를 유발한 결과 쓰라린 경제위기를 경험했으며, 이제는 제대로 된 시장경제를 지향하면서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눈앞에 둔 우리는 후진국형과 선진국형 에너지안보정책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그 답은 자명하다.
정부에 대고 유전을 확보하라고 외칠 것이 아니라, 석유 이후의 새로운 에너지 문명에 대비하라고 강력히 주문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수소에너지가 석유나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명한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이 쓴 <수소혁명>에 다시금 손이 간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난 100여 년간 지속되어온 석유의 시대가 지금 극도의 위험에 직면해 종말을 앞두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의 논지는 분명하다.
첫째, 앞으로 20여 년 안에 세계 석유생산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천연가스 생산이 절정을 이루고 그 후에는 생산이 계속 감소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전망은 석유지질학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허버트 정점 이론’(Hubbert's Peak theory)에 근거한 것이다.
둘째, 석유의 사용과 더불어 지구 환경 전반에서 발생하는 엔트로피도 증가해, 석유문명은 그 활력이 떨어져 종말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주장은,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소모되지는 않지만 이용 가능한 에너지 중 일정 정도는 변형과정에서 상실되어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근거한 것이다.
셋째, 앞으로 세계는 석유를 점점 중동에 의존하게 되지만 중동에서는 이슬람 원리주의가 강화되고 석유가 정치화되면서 걸프지역과 서방과의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추론은 중동의 경제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
넷째, 현재의 석유문명은 송전망과 같은 중앙집중화된 인프라와 석유 의존적인 농업 및 제조업 기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교란에도 쉽게 와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명한 객관적 사실과 9·11사태나 캘리포니아 정전사태와 같은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석유문명 앞에 닥친 위험과 위기에 대안 그의 대안은 수소에너지를 이용해 분산된 혹은 분권화된 에너지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대안이 이미 전 세계에서 실험되고 있으며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수소경제의 안전성, 환경친화성, 민주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처음 읽다가 책장에 꽂아두었다.
허버트의 석유 조기고갈론이나 엔트로피 이론에 대한 그의 공감이 감히 아마추어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책 첫머리에서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아내어 흥미를 유도하는 그런 수작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잠이 오지 않는 밤에 그의 책은 다시 내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는 내가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희망을 다시 꿈꾸게 했다.
‘소외되지 않은 글쓰기’. 리프킨은 바로 소외되지 않은 글쓰기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지식인이다.
근대 사회학 최고의 화두인 ‘소외’란 무엇인가? 자신의 삶이 자아로부터 이탈되는 것이고, 소외의 핵심은 바로 ‘노동과정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즉 분업화된 노동의 결과로 개인의 노동이 조직화된 노동의 일부로만 존재할 뿐 개인의 삶의 관점에서는 생계유지에 필요한 화폐획득의 수단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한 인간 노동의 이런 본질적 변화는 당시 지식인, 특히 사회학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고, 결국 ‘소외’라는 화두가 모든 문제의 밑바탕에 있었을 것이다.
체제의 부속품으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개인의 주체성과 삶의 총체성을 회복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의 한결같은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전원이나 공동체에서의 삶에 대한 기억이 없는 우리는 우리 삶이 그리고 우리 노동이 ‘소외’되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또 일한다.
비교의 준거(reference)가 없기 때문이다.
‘파편화되지 않은 글쓰기’의 전범 지식인들이 노동과정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바로 파편화되고 제한된 시야에서 연구하고 글을 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파편화된 학문하기 혹은 전문화된 글쓰기는 마치 9가지는 전혀 모르면서도, 1가지에 대한 지식만으로 10가지를 안다고 떠드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리프킨은 소수경제에서 석유에 관한 ‘지질학’을 말하고, 에너지에 관한 ‘열역학’을 말하며, 문명의 흥망성쇠에 관한 ‘역사학’을 말하고, 지구온난화에 관한 ‘생태학’을 말할 뿐 아니라, 중동의 종교와 사회체제에 관한 ‘지역학’을 말하고, 미래 에너지 수소에 관한 ‘미래학’을 말한다.
미래 에너지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다각적인 차원에서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 학문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30쪽이 넘는 주석과 그 속에 인용된 참고문헌들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파편화되지 않은 글쓰기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소외되지 않은 글쓰기를 위해 이처럼 학문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자칫 전문성의 결여를 낳을 우려가 높다.
하지만 <수소혁명>에서 보인 중동사회에 대한 그의 분석은 내가 그 어떤 중동 관련 전문서적에서 본 것보다도 탁월한 것이었다.
내가 다시 이 책을 손에 들었을 때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이유도 이 부분에서 그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엔트로피>, <바이오테크 시대>,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 <유러피언 드림> 등 자신의 대부분의 저작에서 리프킨은 네트워크에 기초한 분권화된 사회, 환경친화적 사회, 공동체적 사회 등의 필연성, 당위성, 가능성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수소혁명>은 결국 에너지 차원에서 이런 사회가 필요하고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박복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bypark@kie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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