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6:14 (목)
[한국사 간신열전]원간섭기는 간신들의 전성시대-홍복원 3대·기황후
[한국사 간신열전]원간섭기는 간신들의 전성시대-홍복원 3대·기황후
  • 최용범/ 역사작가
  • 승인 2006.03.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시대 원간섭기는 뒤틀린 시대였다.
간접지배란 형태였지만 원의 간섭을 받아야 했던 시기였던 만큼 정치는 한껏 왜곡됐다.
물론 대몽항쟁기에는 어려운 전투 속에서도 유·무명의 많은 장수와 병사들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숱한 민초들은 짓밟히고 수탈당했다.
그러나 이런 민족의 수난기에 나라 안팎에서는 민족을 배반하고 적의 품에 안겨 고려 침공의 앞잡이가 되었던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부원배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친일부역자로 활동했던 다수의 친일파의 행각과 이들의 행위는 동일선상에 있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그리고 뿌리 깊게 부원활동을 한 자는 홍복원 3대였다.
그의 아버지 홍대순은 고종 5년(1218) 몽골군이 강동성으로 쫓겨왔던 거란 잔당을 칠 때 마중나가 몽골군을 받아들였다.
그의 아들 홍복원 역시 18년(1231) 몽골의 1차 침입 때 강동성에서 문을 열고 몽골군에 가장 먼저 항복한 선진적인 부원배였다.
그는 항복한 데 그치지 않고 몽골군의 길잡이가 되어 침략의 향도 역할을 자임했다.
홍복원은 고종 20년(1233) 서경의 낭장으로 있을 때는 아예 반란을 일으켜 서경 땅을 몽골에 바치고자 하였다.
필현보와 함께 선유사 대장군인 정의와 박론전을 죽이는 반란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최이가 가병 3천을 보내 필현보를 잡아 요참형에 처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홍복원이 원으로 도망가자 최이는 그의 아비 홍대순과 처자 및 동생 홍백수를 포로로 잡았다.
원으로 간 홍복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고려를 치라며 끊임없이 원을 부추겼고, 원의 고려 침공 때는 앞잡이가 되어 따라들어 왔다.
최이는 홍복원을 회유하기 위해 홍대순에게 대장군 벼슬을 주고, 홍백수는 낭장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홍복원의 고려 괴롭히기는 잠시 줄어들었다.
그러나 홍복원 일가가 고려에 대해 ‘이를 가는’ 일이 발생했다.
인질로 원에 있던 영녕군 순은 홍복원의 집에서 묵으며 후하게 대접받았다.
그러나 영녕군 순은 고려의 왕족이었다.
그의 눈에 홍복원 일가의 부원 반역활동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게다가 왕족인 자신에 대해 홍복원은 불손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자 고종 45년(1258) 영녕군은 원의 황족인 그의 처의 힘을 빌어 홍복원을 관에 고발해 맞아 죽게 하였다.
홍씨 일가의 재산도 몰수되고, 아들인 홍다구도 족쇄와 수갑에 묶여 관에 끌려가야 했다.
홍다구만은 파견하지 말아줬으면 홍다구는 2년 만에 복권돼 고려군민총관이란 벼슬을 받아 투항한 고려 관민을 통할(統轄)하게 되었다.
권세를 쥔 홍다구 형제는 아버지를 죽인 개인적 원한을 잊지 않고 고려를 괴롭히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원종 15년(1274) 원이 일본을 정벌할 때 홍다구는 감독조선관 군민총관으로 고려에 와서는 갖은 횡포를 부렸다.
기일을 엄하게 한정하고는 심하게 독촉을 해 남의 전쟁에 동원된 고려 백성의 고통은 심대했다.
사람을 각 도로 보내 공인(工人)을 징집해 전국이 소란스러워질 지경이었다.
그가 얼마나 동족을 학대했는지 2차 일본원정 때는 원의 세조 쿠빌라이에게 홍다구를 감독관으로 파견하지 말아달라는 탄원을 할 정도였다.
충렬왕은 홍다구뿐만 아니라 몽골군의 일원이 된 홍다구의 지휘 하에 있는 고려 군사들도 파견하지 말라는 탄원을 받기기까지 했다.
이들은 고향에 들어와서는 몽고족이나 한족 출신의 군인들보다 더한 억압과 수탈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오랜 전쟁이 남긴 동족에 대한 학대였다.
홍다구는 2차 일본원정 때는 감독관이 아닌 정동도원수(征東都元帥)로 임명됐다.
이때 김방경이 위득유 등의 모함으로 옥에 갇혀 있었다.
홍다구는 김방경을 심문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홍다구는 김방경이 인망이 높은 것을 시기해 그를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방경에게 참혹한 고문을 하여 허위자백을 받아 고려에 죄를 씌우고자 했지만 끝내 김방경은 허위자백을 거부했다.
일본의 역사소설가인 진순신은 홍다구를 ‘역사상 일종의 기형적 인물’이란 평을 내리기도 하였다.
홍다구 외에도 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한 자들 역시 적지 않았다.
고종 때의 이현은 추밀부사로서 몽고에 사신으로 갔다가 2년 동안 억류당했다.
그는 억류해 있는 동안 몽고군의 장군에게 고려를 침략할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강화에 수도를 두었으므로 추수 전에 육지를 공략하면 세수미를 받지 못해 강화 사람들이 곤궁해질 것이다.
” 침략군에게는 적절한 조언이었다.
그는 몽고장군 야굴의 길잡이가 되어 항쟁하는 산성의 병사들에게 투항을 권유했다.
이현은 고려인 포로들에게서 빼앗은 재물을 모두 자기 것으로 챙겼는데 은비녀만 바구니 하나에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현은 회군하는 몽고병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현은 반역죄가 적용돼 기시형(棄市刑)에 처해져 사람들에게 맞아죽었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바다에 던져지는 참형에 처해졌다.
기황후, 고려 공녀 출신으로 음모술수 10단 홍다구 일파가 원간섭기 전반기의 부원배였다면 기황후 일족은 원간섭기 후반의 대표적 부원파였다.
기황후는 고려의 공녀 중 가장 크게 출세했던 여성이었다.
그녀 자신이 원 순제의 제2황후였고, 그의 아들은 북원의 황제가 되었다.
이를 두고 기황후를 여걸로 보기까지 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결론을 미리부터 말하면 기황후는 복잡했던, 그러나 원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황실 내부 권력 투쟁의 1인자였을 뿐이었다.
원나라 말기는 황족간의 제위 계승을 둘러싼 싸움으로 국력을 소진했다.
이 시기의 원 황실은 환관과 황비, 그리고 유력 척족 간의 음모와 술수가 판치는 아수라장이었다.
기황후는 이 암투 속에서 비정한 술수를 써서 궁중의 권력자로 올라섰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을 개인의 영광으로 치부할 수는 있어도 고려의 입장에서는 원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불행이었다.
기황후는 행주 사람으로 총부산랑 기자오의 막내딸이었다.
충숙왕 때 원에 공녀로 보내진 뒤 궁녀가 되었다.
그녀가 공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원에서 먼저 자리 잡고 있던 고려인 환관 박불화와 휘정원사 독만질아의 도움 때문이었다.
기황후는 정치투쟁에 민감한 궁궐의 여인들, 곧 조선의 명성황후처럼 역사책을 열심히 보면서 권력투쟁을 준비했다.
그녀는 어린 순제를 사로잡아 아들 애유식리달랍(뒤의 북원 소종)을 낳았고, 끝내 제2황후에 올랐다.
원의 황후는 몽골족의 2대 유력가문 출신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지만 고려 출신 환관들과 그녀의 술수로 꿈을 이뤄냈다.
이 과정에서 황후인 답날실리를 모역사건에 연루시켜 죽이기도 했다.
그녀는 권력을 잡는 데 미인계를 쓰기도 했다.
고려 출신 미녀들을 다량 보유한 뒤 이를 원나라의 실력자에게 보냈던 것이다.
모친 생일 잔치 탓에 물가 오르기도 기황후는 권력을 잡자 자정원이란 황후의 부속관청을 설치했다.
이곳에는 고려인 환관만이 아니라 원나라의 고위 관리들도 포함돼 ‘자정원당’이란 세력을 형성했다.
기황후가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에 원황실에서는 고려 여자가 가득했고, 그녀들이 쓰던 의복, 그릇, 음식 등이 주류 사회의 ‘명품’ 대접을 받았다.
고려 여자를 처첩으로 얻어야 출세할 수 있다는 의식도 퍼져 고려 여성의 주가가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기황후의 영광은 고려의 고통이었다.
그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자 고려에 있던 그의 오빠 기철을 비롯 기씨 일족은 전횡을 일삼았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맘대로 빼앗고, 국왕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기황후의 모친 생일을 위한 잔치에 5천필이 넘는 베를 써 물가가 오를 지경이었다.
이들 기씨 일가의 벼락출세를 보고는 공민왕 때 권겸이나 노책 같은 자는 자신의 딸을 원 순제와 황태자에게 바쳐 태부대감과 집현전 학사가 되기도 했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부역활동을 일삼았다.
특히 기철은 충혜왕 때는 고려를 원의 한 성으로 만들자는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공민왕의 반원자주화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갖은 책동을 부렸다.
그러나 기씨 일파는 공민왕 5년(1356)에 반원정책을 본격적으로 펴기 시작한 공민왕에게 한순간에 제거되었다.
기황후는 아들인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에게 ‘네가 나를 위해 원수를 갚아야 한다’며 군사 1만명을 주고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쇠약해진 원의 군대는 고려에 들어오자마자 최영의 고려군에게 대패해 17명만 살아 돌아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과연 이런 기황후를 걸물이라 할 수 있을까? 작은 나라에서 산다고 대국의 고관이나 황족이 되면 무조건 좋아하는 우리의 풍조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인물과 사건이다.
한편 이들 부원배만큼 적극적인 반역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왕의 주변에서 아첨 행위를 일삼으며 진정한 간신의 면모를 보인 자들도 적지 않았다.
원간섭기 고려의 왕이 원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는데 이에 따라 고려의 왕자들은 성장기를 원에서 보냈다.
그러다 왕이 되면서 고려에 귀국하게 되었다.
자연 왕의 최측근은 원에서 보필했던 인사들이었다.
한마디로 측근정치가 부식되기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다.
가장 개혁적이었던 공민왕도 초기에는 이들 측근에 의지했다.
측근들과 노는 데 바빴던 충렬왕

▲ 그림 설명
물론 측근이라고 해서 모두 듣기 좋은 말이나 하고 왕의 비위만 맞추는 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민왕의 개혁노선을 충실히 보필하던 측근들도 상당수였다.
그러나 간신은 지도자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쉽게 부식된다.
왕도 사람이라 놀기 좋아하고, 듣기 좋은 말에 귀 기울이기 마련이다.
특히 혼군(昏君)은 간신에게 쉽게 넘어간다.
충렬왕의 대표 간신인 오잠의 행태는 2급 간신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충렬왕은 재위 전반기에는 문란해진 고려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와서는 피곤한 정치개혁 대신 측근들과 노는 데 바빠졌다.
여기에 부채질을 한 것이 오잠이었다.
오잠은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 정통관료였음에도 왕의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비서 격인 승지로서 왕의 전속 악단을 조직했다.
전국을 돌며 미인 기생을 선발하는가 하면 개경의 무당과 관비 중 가무에 능한 자를 뽑아 남장을 시킨 뒤 일종의 뮤지컬을 공연하기도 했다.
향각이란 왕실 전용극장에서 이뤄진 공연 중 지금도 가사가 전하는 <쌍화점>을 오잠이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쌍화점(아라비아 만두집)에 쌍화(만두) 사러 갔더니 아라비아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만두집 밖으로 나간다면 다로러 기로러 조그만 새끼 광대 네가 퍼뜨린 줄 알겠노라 아, 나도 그곳에 가서 나도 손목 좀 잡혀 봤으면 좋겠네 2급의 간신이 하는 전형적 행태를 보인 오잠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충렬왕의 뒤를 이어 충선왕이 즉위한 뒤 실권을 잃자 유청신 등의 구세력과 함께 고려를 원의 한 성(省)으로 삼아달라는 청원을 하는 반역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
달콤한 권력만 얻을 수 있다면 나라든, 의리든 상관할 바 없다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면 충신이 생각난다고 했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나라나 조직이 어려울 때면 그만큼 간신이 서식하기 좋은 때다.
간신의 출현 빈도에 주목해봐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