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은행은 무엇보다도 과도한 위험을 떠맡기 싫어하는 상업은행들의 한계에 맞서 IT, BT 등 고위험이지만 미래 성장동력을 위해 자금 공급이 불가피한 기업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다.
기존 은행 중심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은행 중심의 투자은행 업무는 보수적인 문화와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로 벤처기업에 제대로 자금 공급이 될 가능성이 떨어진다.
한국증권연구원의 신보성 연구위원은 “자본시장이 위험을 감수한 리더가 모든 것을 먹는 시스템인 반면 은행은 본질적으로 대박보다는 실패를 방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얼핏 보기엔 은행 정보를 활용한 증권사 투자가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작동은 잘 안 하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때문에 그는 “증권사가 은행과의 제휴에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전제조건을 달았다.
한국형 투자은행을 논하면서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결코 단시간에 글로벌 투자은행을 육성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투자은행들의 탄생과정은 그야말로 역사적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글로벌 투자은행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존재가 아니라 수백년 동안 시장 속에서 끊임없이 숨 쉬고 대화하며 생존해온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의 투자은행 환경은 정부 주도의 기본적인 설계 단계로 수익성이 담보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태다.
글로벌 네트워크도 없는 상태에서 골드만삭스와 같은 글로벌 투자은행을 기대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꼴일 것이다.
우리보다 자본시장이 훨씬 발달한 일본에서도 노무라증권은 글로벌 투자은행 전략을 접고 지역 전문 투자은행으로 목표를 수정한 바 있다.
대기업 증권사 vs 금융지주회사 그렇다면 결국 한국의 투자은행들은 초기 한정된 국내 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을 높여 선점효과를 거두는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또한 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가 지배하는 투자은행 시장에서는 소수의 대형 투자은행이 과점시장을 형성하므로 시장은 몇몇의 대형 투자은행과 틈새시장에 특화된 중소형 투자은행들에 의해 양분될 확률도 있다.
이 과정에서 결국 성패를 좌우할 요건은 기업들과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제대로 된 기업분석을 해내느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국산 투자은행이 글로벌 투자은행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한국 투자은행이 한국 기업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렇게 국내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투자은행은 드디어 ‘한국판 골드만삭스’라는 행운의 주인공이 될 자격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인수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우는 동시에 기업들과의 돈독한 관계유지를 통해 인수합병, 구조조정 업무 등에서 신뢰와 평판을 잘 쌓는 것은 기본이다.
다만 투자은행 논의에 있어 ‘산업을 위한 투자은행’과 ‘금융허브를 위한 투자은행’은 구분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는 론스타 등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투기성 외국자본의 문제와 한미 FTA를 둘러싼 논쟁과도 궁극적으로는 관련이 있는 것이어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서구의 경우 투자은행의 생성과정은 어떻게 시장을 형성하고 성장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이었던 데 반해 우리의 경우 투자은행 논의는 10년 뒤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와 연관돼 진행됐다.
소득 1만달러 시대의 경제논리와 2만달러 시대의 경제논리는 분명 차이점이 있다.
중국의 부상으로 제조업 분야의 경쟁력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과거 수출의존형, 노동집약형, 산업중심의 전략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수출과 내수의 조화, 고부가가치형 기술집약 산업 육성, 금융강국을 이루지 못하고서 다음 단계로의 진입은 요원하다는 위기의식이 외환위기 이후 10여 년 동안 한국 사회를 짓눌러온 것이다.
이는 결국 중국에 넘겨줄 것은 넘겨주되 결코 넘보지 못할 무기들을 새롭게 개발해야 한다는 논의로 연결됐고 대선을 거치며 동북아 금융허브, 물류허브라는 형태로 구체화됐다.
여기에는 또한 외환위기를 겪으며 쌓은 부실채권 정리, 기업구조조정 노하우를 중국 등 제3의 시장에서 써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작용했다.
현재 금융허브 추진계획에서 투자은행은 선도업종으로 분류돼 있다.
결국 우리나라의 투자은행 육성 목표는 산업지원 외에 제도적 기반이 취약한 금융 후진국에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도 포함돼 있다는 얘기다.
달리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나라가 론스타, 소버린 등에 당했던 일을 중국, 러시아, 동남아 등 해외에서도 똑같이 행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자산관리공사의 해외투자 허용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증권연구원의 김형태 부원장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빗대 ‘서북공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자금중개라는 전통적 투자은행 업무에서 벗어나 최근 들어 투자은행의 핵심업무로 자리잡고 있는 자기자본투자(principal investment)를 통해 중국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 김 부원장은 사모펀드(PEF)를 ‘서북공정의 특공대’로 적극 활용해 중국전용 PEF를 만들 것도 제안했다.
투자은행, ‘서북공정의 특공대?’ 문제는 이러한 국가적 전략이 사회적 동의를 제대로 구하지 못한 탓에 실행되기도 전부터 커다란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의 확고부동한 방향제시에도 불구하고 좌파진영 중심의 투자은행 반대론자들은 변동성이 크고 취약한 우리나라의 자본시장에서 과연 투자은행을 통한 선순환 구조가 가능한지 묻는다.
또한 선순환 구조가 가능하더라도 비정규직 양산, 소득 불평등 심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묻고 있다.
영국은 영어와 런던시장의 금융 중심 지위가 있었고 미국은 달러 경제의 헤게모니가 있지만 우리는 무엇이 있는지도 묻는다.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정부가 뚜렷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금융허브 정책은 추진되고 있다.
결국 ‘금융허브가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금융허브는 무조건 나쁘다’며 대책 없이 주장하는 이들이 무리를 지어 다투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미FTA 논쟁에서도 흡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형 투자은행’이라는 당나귀는 ‘소득 2만달러’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동북아 금융허브’라는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도박사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국민을 믿는다’며 옆에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과연 우리는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 걸까. 최중혁 기자 tjp2010@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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