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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런트] 채무분쟁 세입자에 부당각서 강요
[커런트] 채무분쟁 세입자에 부당각서 강요
  • 황철 기자
  • 승인 2007.01.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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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 사건 위법 판결에도 ‘모르쇠’ 일관 … 채권자, 제도 악용 ‘가압류’ 남발도 서울시 공공임대주택을 책임지고 있는 SH공사(구 서울시 도시개발공사)가 여전히 채권 · 채무관계에 놓인 임차인으로부터 부당한 이행각서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불공정 계약 관행은 정부 산하 기관 대한주택공사(이하 주택공사)를 대상으로 수차례 문제로 지적된 사안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주택공사가 법원 해석과 국정감사를 통해 집중적인 비난에 휩싸인 사이, 여론의 사각지대에 놓였던 SH공사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이러한 관행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두운 형국. 더 큰 문제는 은행, 카드사 등 채권자들이 부당 계약을 추심 강요의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거리로 나앉지 않으려면, 돈을 빨리 갚으라는 엄포식 가압류 통보가 성행하고 있는 것. SH공사는 본지의 취재가 시작되자, 그제야 문제점을 인정하며 세입자 입장에서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할 사항이라는 원론적인 의견을 표명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SH공사에 따르면 입주자가 채무 불이행으로 보증금 (가)압류 상태에 있을 경우, ‘향후 공사 측의 불이익을 대신 책임지겠다’는 이행각서를 작성해야만 계약갱신을 가능하도록 했다.
각서에는 ‘채권자가 계약 갱신 사유로 소송을 제기해 소송 결과에 따른 부담이 제3 채무자(SH공사)에 있을 시 그 부담을 본인이 질 것이며, 또한 제3 채무자나 임차인에게 이행해야 할 사항이 있을 시 즉시 이행하겠음’이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결론적으로 채무 분쟁 시 손실 보증금이 발생하면 세입자가 이를 대신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ECONOMY21 사진
SH공사는 법적 근거도, 계약서에도 없는 각서를 공증까지 받게 하고 이를 조건으로 계약 연장을 허용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발생할 수도 있는 공사 측의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의도다.
SH공사 문완식 기획조정실 홍보부장은 “보증금의 성격이란, 연체된 임대료, 관리비 등 입주자의 채무액을 변제받기 위한 안전장치”라며 “사적인 채무관계에서 제3자인 공사가 부담을 지지 않으려고 방법을 강구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각서 자체가 법적인 효력을 가진 것은 아니고, 채무자에게 단순히 심리적 부담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같은 각서 요구는 수 년 간 영세 세입자에 대한 불공정 계약 관행으로 지목되며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그동안 논란의 진원지는 SH공사와 같은 성격의 정부 산하 기관인 주택공사. 지난해 5월 대법원은 ‘임차보증금에 가압류가 된 임차인이라도 주택공사는 채권가압류 해제 등의 전제조건 없이 당연히 갱신 계약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주택공사는 지난해까지 가압류 상태에 있는 입주자들의 재계약을 전면 불허하기로 하고, 이를 계약서에까지 명시해 논란을 일으켜왔다.
주택공사가 대법원 판결 후 고육지책으로 마련한 것이 SH공사의 경우와 같은 이행각서 강요였다.
주택공사의 각서에는 ‘임차보증금 반환 채권이 처분 제한된 임대주택에 대해 임대차(갱신) 계약을 체결한 후, 채권자의 권리 행사(임차 보증금 반환 청구 등)에 따라 임차인이 공사에 이행해야 할 사항이나, 손해가 있는 경우에는 임차인은 이를 이행 또는 부담하기로 한다’고 적혀 있어 SH공사의 것과 내용상 동일하다.
당초 채권자의 (가)압류 당초 채권자의 (가)압류 조치가 있을 경우 계약갱신을 전면 불허하던 것에서 한발 물러나, 공사 측의 손실이 발생하면 이를 세입자가 보존해 준다는 조건부 계약제로 선회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각서 강요가 ‘(가)압류 세입자 계약갱신 전면 불허’보다 진일보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여론의 집중 포화에 맞닥뜨려졌다.
대법원의 판례에서처럼, 임대주택의 재계약에 있어 어떤 형태로든 전제조건을 제시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택공사는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해당 세입자에게 이행각서를 요구해오다, 국정감사를 통해 호된 질타를 받았다.
당시 민주노동당 이영순 의원은 “공공임대로서 임대차계약의 특징상 가압류가 되더라도 임대인은 손해 볼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채권자의 대변자인냥 임대차 갱신 계약서를 쓰도록 강제하는 것은 공기업으로서 양심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대법원 판결에 따라 임대인의 손해가 없는 이상 어떠한 전제조건도 없이 재계약을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택공사는 이 의원의 공식적인 지적 이후, 곧바로 시정 조치를 내리고 현재는 이러한 계약관행을 전면 금지한 상태다.
변한수 주택공사 임대파트 차장은 “공공기관이라는 특성상 채권자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그러나 대법원 판결과 국회의 요구 등에 따라 지난해 7월18일부터 전국 모든 지부에 시정 조치를 내렸다”고 밝혔다.
“강박에 의한 불공정 거래” 문제는 이러한 부당 계약 관행이 수도 서울의 공공주택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엄밀히 따지면, SH공사의 계약갱신 관련 논란은 주택공사보다 훨씬 역사가 깊다.
SH공사가 보증금 (가)압류자에 대한 이행각서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약서에 해당 세입자의 갱신계약을 전면 금지한다는 조항을 넣어, 법적 분쟁에 돌입한 것도 SH공사가 먼저다.
SH공사는 지난 2001년 이미 해당 입주민으로부터 유사 사건으로 소송을 당해 대법원으로부터 패소판결을 받았다.
SH공사는 이때부터 세입자에게 이행각서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재계약의 조건으로 활용해 왔다.
주택공사에서 논란이 불거지기 5년이나 앞선 일이다.
시기상으로 따지면, 주택공사의 부당 각서 강요 행위도 SH공사의 사례를 벤치마킹한 인상이 짙다.
서울시의 한 법무법인 관계자는 “계약상 전혀 필요가 없는 문서(각서)를 공증까지 받게 하며 제출을 강요하는 자체가 불공정 거래의 한 근거가 된다”면서 “이는 임차인의 자발적 의사라기보다는 공사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것이 명백하므로 ‘강박에 의한 거래’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유사 기관이 문제점을 인정하고 개선하는 동안,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점은 법원 판결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라고 봐야한다”고 덧붙였다.
오랜 기간, 수차례 사회적 논란을 야기했음에도 서울시가 적절한 조치는커녕 문제를 쉬쉬한 것에 대한 질타다.
실제로 공공기관의 갱신계약 거부의 부당성을 꾸준히 제기해 오던 전국임대아파트연합회에서조차 SH공사의 행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전국임대련 박우철 가압류 대책위원장은 “주택공사의 경우 채권자의 반발 문제가 남긴 하지만, 각서 요구나 계약갱신 거부 등의 관행은 사라졌다”면서 “SH공사에 이행각서 요구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SH공사 관계자 역시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개선 방침 대해서는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SH공사 박홍선 임대팀장은 “내부적으로 논의가 있었지만, (가)압류 전 단계에서 공사의 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취지에서 관행을 유지한 것 같다”면서 “개인적으로는 공공기관으로서 채권자 이익보다 세입자 입장에 서야 하고, 향후 전향적으로 개선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황철 기자 biggrow@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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