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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아시아의 중산층 ⑦ 태국 - 외환위기 후유증 “아직도 진행중”
[기획취재] 아시아의 중산층 ⑦ 태국 - 외환위기 후유증 “아직도 진행중”
  • 이정환 기자
  • 승인 2007.01.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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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은 있지만 중산층 거의 없어… 고가시장-중저가시장 철저하게 양분

12월의 태국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주황색 가사를 걸친 창백한 표정의 스님들. 골목골목마다 불교 사원이 가득 들어찬 이곳 방콕에도 크리스마스는 온다.
백화점과 음식점들은 요란한 크리스마스 장식을 내걸고 손님들을 유혹한다.
전체 인구의 95% 이상이 불교 신자라는 사실이 언뜻 믿기지 않을 정도다.


스쿰윗 22번가에 새로 들어선 엠포리움 백화점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2천바트(6만원) 이상 구매 고객에게 886만바트 상당의 랜드로버 승용차를 비롯해 720만바트 상당의 콘도 회원권, 400만바트 상당의 다이아몬드 반지 등 모두 2천만바트의 경품을 나눠주는 행사를 시작했다.
2천만바트면 우리 돈으로 6억원 정도다.


서울의 웬만한 백화점 못지않게 화려한 인테리어.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샤넬과 아르마니, 버버리, 프라다 등의 명품 매장에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스피커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왔고 천정부터 늘어선 크리스마스 장식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외국 관광객들도 많았지만 거의 대부분이 태국 현지인들이었다.


태국은 불법 복제의 천국이지만 백화점 음반매장에서는 클래식 CD 한 장이 500바트(1만5천원)가 넘었다.
인터넷 카페에서는 커피 한 잔을 포함해 한 시간에 300바트를 받았고 지하 식당에서 4인 가족이 제대로 저녁 식사를 하려면 5천바트 이상을 치러야 할 정도였다.


크리스마스와 국왕의 생일

일부 중산층들이 이렇게 화려한 크리스마스를 즐긴다면 대부분 태국 사람들에게는 국왕의 생일이 훨씬 더 중요한 명절이다.
12월 5일은 라마 9세, 푸미폰 야둘야뎃 국왕의 79번째 생일이었다.
시내 곳곳에 국왕의 사진이 내걸렸고 거리에는 노란색 셔츠를 입고 국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태국에서 노란색은 국왕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이정환 기자태국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한해의 마무리, 그 이상의 큰 의미는 없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뒤덮인 화려한 백화점을 즐길 수 있는 여유 있는 중산층은 전체 국민의 5% 정도,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이질적인 종교가 기묘하게 뒤섞인 12월의 축제 분위기는 이 나라 중산층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태국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준을 정하기 나름이겠지만 대부분이 중산층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중산층이 거의 없기도 하죠.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태국은 아직도 빈부격차가 심합니다. 하이 소사이어티, 줄여서 하이소라고 하는데 하이소와 일반 중산층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LG전자 태국 법인 성낙길 상무의 이야기다.
성 상무에 따르면 태국은 가전제품 가격이 세계에서 가장 싼 나라다.
일찌감치 시장을 개방한 덕분에 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가전제품 회사들이 태국에 생산 공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05년 기준으로 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749달러, 그리 높은 소득수준은 아니지만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 안정돼 있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베트남에서 최소 150달러를 줘야 하는 21인치 TV가 태국에서는 85달러 밖에 안 합니다.
대졸 사무직 노동자 평균 월급이 200달러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그리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죠. TV와 세탁기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입니다.
지방으로 내려가도 마찬가집니다.
태국은 대도시와 지방의 격차가 거의 없습니다.


태국에서는 고가의 수입 명품과 승용차를 비롯해 LCD TV 등 고가 가전제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한편으로 보급형 가전제품의 저가 경쟁도 치열하다.
월급의 10배가 넘는 휴대전화를 선뜻 집어 드는 이웃나라 베트남과는 상황이 또 다르다.
고가 시장과 중저가 시장으로 철저하게 양분돼 있다는 이야기다.
중산층의 구매여력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렇다보니 일부 가전제품 회사들은 심지어 손해를 보면서 파는 경우도 많다.
세계적인 브랜드의 제품들이 전면전을 벌이면서 결국 브랜드보다는 누가 더 낮은 가격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느냐가 경쟁의 관건이 되는 상황이다.
태국에서 최근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규 설비투자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해 미국의 하드디스크 생산업체 시게이트가 태국을 떠난 것은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태국에 최대 규모의 생산라인을 갖고 있는 시게이트는 8억달러 규모의 신규 생산라인을 말레이시아에 짓기로 했다.
태국 정부는 부랴부랴 조세감면 기간을 7년에서 15년으로 늘려주겠다고 설득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했다.


태국은 일찌감치 시장개방과 외자유치에 성공했지만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잃었다.
한때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내수시장도 한계를 맞고 있다.
가뜩이나 거대한 중국이나 인도와 경쟁에서 뒤지고 있고 베트남의 발 빠른 추격에도 아무런 대응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태국은 이미 투자가 다 끝났습니다.
외형적으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죠. 부가가치를 늘리는 방법을 찾아야 할 텐데 투자자 입장에서는 설비를 뜯어 다른 나라로 옮겨가는 게 더 싸게 먹힐 수도 있습니다.
태국은 이미 후진국을 벗어났고 중진국 대열에 올라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투자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끝나지 않은 외환위기의 후유증

태국의 경제성장률은 2003년 7.0%에서 2004년에는 6.2%로 2005년에는 4.5%로 계속 줄어들었다.
지난해에도 4.15% 정도에 그친 것으로 추산된다.
태국 정부는 시장개방과 외자유치에만 주력했을 뿐 정작 독자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많은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문제는 그 일자리의 수준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의 변화를 살펴보면 태국 경제의 한계가 어디에서 비롯했는지 알 수 있다.
1986~1997년 중반 사이 10년 동안 외국인 직접투자는 4869억바트였는데 1997년 중반부터 1999년까지 2년 반 남짓한 동안에는 5887억바트까지 늘어난다.
그런데 이를 달러화로 환산하면 1910만달러에서 1490만달러로 오히려 줄어든다.


바트화로는 늘어났는데 달러화로는 줄어든 것은 그 기간 동안 바트화 가치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외국 자본 입장에서는 적은 돈으로 훨씬 더 많은 자산을 취득할 수 있는 황금 기회였던 셈이다.
태국 기업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수출 가격이 낮아진 덕분에 수출이 크게 늘어났지만 이미 이들 기업들 대부분이 외국 자본에 넘어간 뒤였다.


태국의 외환위기는 우리나라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외환위기 이전 태국에는 15개의 시중은행이 있었는데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대부분 ABN암로나 HSBC, 싱가포르개발은행(DBS) 등의 외국계 은행에 넘어갔거나 인수합병을 앞두고 있는 상태다.
살아남은 은행도 대부분 외국인 지분이 지분 한도인 49%까지 가득 차 있는 상태다.


또한 자동차나 전기전자 등 알짜배기 수출기업들도 대부분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
일본의 미츠비시나 도요타, 야마하 등은 외환위기를 놓치지 않고 지분을 크게 늘렸고 마츠시타와 NEC, 우리나라의 삼성전자 등은 현지 파트너의 지분을 사들여 손을 털게 만들기도 했다.
에이서와 엡손은 사바비리야컴퓨터의 지분 51%를 사들였다.


내수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슈퍼마켓 체인과 할인매장 등을 거느린 센트럴그룹과 CP그룹 등이 테스코나 델하이츠 등에 잇따라 팔려나갔고 까르푸와 마크로 등 할인매장 등도 재빨리 상권을 장악했다.
세븐일레븐도 동네 구멍가게의 몰락을 재촉했다.
이밖에 시암시멘트그룹이나 태국정유산업 등 민영화 기업들도 잇따라 헐값에 팔려나갔다.


출라롱콘 대학 경제학과 파숙 퐁파이칫 교수는 외환위기가 가져온 변화를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외국인 지분 비율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금융과 수출 제조업은 대부분 외국인 소유가 됐다.
둘째, 수출이 외국 자본과 외국 기술력에 의존하는 비율이 더욱 높아졌다.
문제는 이들 외국 기업들이 얼마든지 태국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시중은행의 소유권이 외국 자본에 넘어가면서 기업 신용대출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들 은행들은 태국의 신흥기업들에 투자할 생각이 전혀 없다.
넷째, 정부의 부채가 크게 늘어났다.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인 힘을 쏟을 여유가 많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10년, 경제의 역동성이 크게 꺾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뿌리 깊은 정경유착과 쿠데타

파숙 교수는 정경유착과 지하경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규제를 완화하고 알짜배기 기업들을 팔아넘기는 과정에서 정부 관료들은 막대한 뒷돈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그때 살아남은 기업 대주주들과 정치인들이 경제를 아직까지 망쳐놓고 있습니다.
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이 나라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파숙 교수는 태국의 지하경제가 국내총생산(GDP)의 8~13%에 이른다는 통계도 내놓았다.
태국의 지하경제는 카지노와 불법 복권, 축구 도박, 마약 밀매, 무기 밀거래, 인신매매 등 6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995년 기준으로 2860억바트에서 많게는 4570억바트 수준인데 10년이 지난 지금은 70% 규모까지 늘어났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지난해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퇴각은 이런 맥락에서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로 읽힐 수도 있다.
중산층들이 잇따라 부정부패로 얼룩진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에 나섰고 9월에는 쿠데타까지 터졌다.
탁신은 끝까지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주목할 부분은 태국의 중산층이 정부의 정경유착 관행에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태국은 전통적으로 군부와 귀족들이 정권을 잡아왔는데 외환위기 이후 기업가 출신의 탁신이 총리가 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난해 탁신 반대시위에 나섰던 이들은 그동안 탁신의 인기영합 정책에 열광하며 탁신에게 힘을 실어줬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태도 변화는 탁신의 무분별한 시장개방과 기업친화적인 정책에 대한 반발로도 이해할 수 있다.


쿠데타로 새로 들어선 태국 정부는 지난해 12월, 강도 높은 외환규제 정책을 도입했다가 이틀 만에 자진 철회한 바 있다.
바트화 환율을 안정시켜 수출을 늘리고 투기적인 외환거래를 차단하겠다는 의도였지만 국제 투기자본의 반발을 이겨내기에는 힘이 달렸다.
태국 경제는 철저하게 외국 자본에 종속돼 있고 그 뿌리는 너무 깊다.


미국 시카고 대학 아담 세보르스키 교수는 일찌감치 1인당 국민소득 2천달러 미만의 나라에서 쿠데타가 많고 6천달러가 넘으면 사라진다고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태국은 지금 그 경계를 막 통과하고 있다.
다만 외환위기가 가져온 구조적인 변화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의 출현을 늦추고 있는 상황이다.


국왕에 절대적인 충성을 보내는 한편으로 쿠데타를 기꺼이 반기는 태국의 중산층, 그들이 외환위기가 만들어낸 구조적인 모순과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앞으로 태국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전망이다.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하는 태국 불교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좀 더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맞서 싸우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방콕=이정환 기자 cool@economy21.co.kr

|인터뷰| 라피 스리순톤 LG전자 태국법인 세일즈 매니저“30억 자산 하이소는 폐쇄적 로열 패밀리” 신흥 부자들이 넘쳐나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태국에는 소수의 상류층만 있을 뿐 여유 있는 중산층이 빈약하다. 라피 스리순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계 기업에서 중간 관리자 정도의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그나마 중산층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라피는 LG전자 태국법인에서 세일즈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당신이 태국의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가. 연봉은 어느 정도 되나. 올해 나이는 38. 월급으로 9만바트 정도 된다. (우리 돈으로는 270만원) 에이백 대학을 나왔고 이곳이 두 번째 직장이다. 나 정도면 평범한 중산층보다는 잘 사는 편이다. 생산직 노동자들과 비교하면 10배 이상을 받는 셈인데 주거 형태나 차량이나 자녀 교육 등 소비 패턴을 대략 이야기해 달라. 단독 주택에 살고 있는데 시세가 400만바트(1억2천만원) 정도 된다. 월급을 받으면 절반은 부인에게 주고 절반은 내가 관리하는데 달마다 3만바트(90만원) 정도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 교육비로 들어간다. 자녀 교육비를 아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월급의 20% 정도는 저축을 한다. 차는 볼보, 80만바트(2400만원)를 주고 샀다. 저축을 해서 어디에 쓸 생각인가. 집을 더 늘려갈 계획이고 노후 준비에도 보탤 계획이다. 중산층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주거환경의 차이에서 두드러진다. 같은 아파트라도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가격이 확 달라진다. 조금 살만한 동네 같으면 월세 기준으로 한 달에 6천바트는 줘야 하고 좀 좋은 아파트는 월세만 5만바트까지 나간다. 스쿰윗 같은 경우는 매매가가 2천만바트가 넘는 아파트도 있다. 생산직 노동자들 월급이 6천바트 정도라는 것과 비교해보라. 하이 소사이어티, 이른바 하이소와 당신 같은 중산층은 얼마나 차이가 나나. 하이소라면 자산이 최소 1억바트(30억원)는 돼야 할 거다. 기업체 사장들이거나 정부 관료들, 이른바 로열 패밀리들이다. 1타에 1만바트짜리 내기골프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이소가 아닌 사람이 이들의 네트워크에 들어갈 방법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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