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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주유산천기] 연분홍 벚꽃이 봄바람에
[장태동주유산천기] 연분홍 벚꽃이 봄바람에
  • 장태동 전문기자
  • 승인 2007.03.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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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다랭이마을에서 만난 막걸리 … 비탈 타고 올라오는 바다가 좋다 신록의 봄, 꽃나무들이 땅 밑 양분과 물을 빨아 올려 푸르른 새살을 만든다.
양지바른 산기슭에 벌써 냉이가 올라오고 생강나무도 움이 맺혔다.
이 때쯤이면 남해 다랭이 마을 동백꽃도 봉오리 끝을 내밀고 주막집 막걸리가 농익는다.
막걸리와 동백꽃이 이다지도 하나같은 것은 서정주 시인의 시 때문 이련가. 그의 시 <선운사 동구>를 보자. 선운사 골째기로/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피지 안했고/막걸리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이 시를 알고부터 나는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에 먹는 막걸리를 최고로 쳤다.
이것이 바로 ‘감성이 미각을 지배한다’는 나의 맛에 대한 생각과 딱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다.
시인이 고향의 동백꽃 구경길에 올랐는데 가보니 때가 일러 동백꽃을 보지 못했다.
나이 들어가며 꽃과 나무에 대한 애정이 깊어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꽃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미련으로 남았고 그 마음 달래려 막걸리집에 앉았는데, 오호! 막걸리집 주모가 쉰 목소리로 부르는 육자배기 가락에서 동백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게 아니겠는가. 붉디붉은 동백꽃도, 쉰 소리로 꺾어지는 막걸리집 주모의 노래 가락도 무슨 사연이 있어 그렇게 피 토하듯 절절하단 말인가. 막걸리와 동백꽃을 이렇게 받아들이고 나서부터 나는 매년 봄꽃놀이를 떠나게 됐고, 그 길에서 꽃피는 동네의 막걸리를 두루 먹어볼 수 있었다.
비록 막걸리집 주모는 없었지만, 서정주 시인처럼 절절한 꽃 사랑도 없었지만, 꽃에 취하고 술에 취하면 내 입에서 봄 타령 한 곡조는 절로 나왔고 자리를 함께한 사람들도 흔쾌히 그 분위기를 즐겼다.
남해 벚꽃 구경, 그 길 끝에서 만난 다랭이 마을 봄꽃여행길마다 먹어 본 막걸리 중 마음까지 사로잡은 맛은 없었다.
벚꽃 떨어져 꽃비 되어 내리는 하동 화개동천 거리의 술집은 꽃은 좋았으나 막걸리는 별로였고, 구례 산동 별 닮은 산수유 노란 꽃은 때가 일러 피지 않았는데, 산수유 막걸리는 그런대로 입맛은 채워주었다.
남해는 벚꽃이 유명해서 발길을 놓았는데, 남해 첫머리에 바다와 육지를 잇는 남해대교가 꽃보다 먼저 여행자를 반긴다.
그렇게 찾은 남해에서 벚꽃 구경을 하면서 섬의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꽃길은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남해대교를 건너서 섬의 남쪽으로 가는 새로 난 도로이고, 다른 하나는 옛 도로다.
꽃길은 옛 도로가 낫다.
남해 여행 지도를 들여다보며 갈 곳을 궁리하다가 ‘다랭이 마을’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찾았다.
이름이 예뻐서 다른 생각 없이 그 길을 택했다.
‘다랭이’라는 말에서 보이듯이 마을은 바닷바람 걸러질 곳 하나 없이 바로 바람이 몰아닥치는 비탈진 마을이다.
산자락이 바다로 곤두박질치는 형세를 하고 있으니 마을 또한 그 비탈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게다가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논 또한 비탈의 운명. 그 운명을 고스란히 안고 사는 마을 사람들은 비탈진 논을 오르내리며 여름에는 논농사를 짓고 봄에는 마늘을 캔다.
바다를 마당으로 동백을 친구로 삼고 … 비탈진 골목길로 내려간다.
회칠한 벽과 담장, 낡은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대문 없는 집은 그 기둥이 집의 역사를 말해준다.
추억에 빠져 골목을 따라 내려가며 마을 구경을 한다.
골목에서 뛰어 노는 어린 애들이 보인다.
좁은 골목길에서 만난 아저씨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마을 안에 민박집이 있어서 그런지 외지에서 온 여행자들이 낯설지 않은 눈치다.
골목을 따라 내려가다가 대문 기둥에 문패처럼 달려 있는 ‘시골할매 막걸리’ 표지판을 보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Economy21
막걸리집이라고는 하지만 마당에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다다.
마당가에 키 작은 나무 몇 그루 보인다.
동백나무였다.
선운사 뒷산이나 여수 오동도, 거제도 동백 숲 등 동백꽃 유명한 곳에 있는 동백나무는 모두 사람 키보다 훨씬 컸는데 이곳 동백나무는 사람 눈 아래에 묻힌다.
이유를 물으니 동백 씨를 심어서 키운 나무란다.
동백나무에 주었던 눈길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바다가 보인다.
옻칠 벗겨진 나무 상에 겉절이와 막걸리 잔으로 쓸 사발이 놓였다.
거기에 1.5리터 플라스틱 병에 막걸리가 담겨 나왔다.
바다안개 뿌연 저녁, 노을도 없는 바다에서 비탈을 타고 바닷바람이 올라온다.
봄이지만 제법 쌀쌀한 바람이었다.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지만 씨부터 자란 그 수고로움에 작은 동백나무에 정이 붙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막걸리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누구의 수필 문장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걸인의 안주, 왕의 술’이었다.
안주는 겉절이 하나였지만 막걸리 맛만큼은 최상의 수준이었다.
함께 여행길에 오른 후배와 나는 남은 술을 한 번에 마셔버리고 잔을 또 채웠다.
그때 이웃에서 아저씨가 마실 왔고 우리는 아저씨에게 한 잔 권했다.
아저씨는 한사코 마다했다.
둘이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후배는 운전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서너 잔을 더 마셨다.
바다를 마당삼고, 씨동백을 친구삼아 한 잔 두 잔 들이킨 술이 두 병이 넘었다.
우리는 그 맛을 두고 그냥 일어설 수 없어 막걸리를 빚은 사람이 누군지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주인아줌마를 불렀다.
알고 보니 막걸리를 담은 사람은 그 집 할머니였다.
대를 이은 할머니표 막걸리 바다를 마당삼고, 씨동백을 친구삼아 한 잔 두 잔들이킨 술이 두 병이 넘었다.
우리는 그 맛을 두고 그냥 일어설 수 없어 막걸리를 빚은 사람이 누군지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주인 아줌마를 불렀다.
알고 보니 막걸리를 담은 사람은 그 집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들을 피해서 다랭이 마을로 들어왔다.
이렇게 맺은 다랭이 마을과 할머니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는 열여섯 살에 시집을 갔다.
시집을 와보니 시댁 식구들이 술을 좋아했고, 그래서인지 집에서 술을 빚어 먹었다.
당시에는 집에서 술을 담가 먹지 못했다.
이른바 ‘밀주금지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에는 세무서에서 밀주단속을 했었는데 할머니집에서는 단속의 눈을 피해서 술을 담가 먹었던 것이다.
이것이 다랭이 마을 막걸리 제조법이 그 맥이 끊어지지 않고 그대로 전해지게 된 이유였다.
새색시가 시집 와서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술 빚는 일이었다.
집안 내력이 그러하니 그 일을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그 일을 배우게 됐다.
부지런한 할머니의 손끝은 겨울조차 놀고먹는 걸 못 본다.
손수 술밥을 만들고 누룩을 뜨면서 바다 향 짙은 막걸리를 만드는 것이다.
다랭이 마을 막걸리는 동백꽃 피고 질 때 먹어야 제 맛이다.
꽃 피고 지는 때가 한 나무라 할지라도 바로 옆 줄기가 다르고 옆 가지가 다르니 꽃피고 꽃모가지 떨어지는 구경은 꽃핀 뒤로 족히 한 달은 볼 수 있을 것이다.
남해 수평선이 보이는 막걸리 집 마당에 앉아 있으면, 바람이 실어 오는 바다냄새와, 씨를 심어 키운 동백의 향기, 그리고 농익은 막걸리 냄새가 어우러진다.
장태동 전문기자 · 여행작가 jjkokr89@hotmail.com

가는길

*대중교통 : 서울서 남해까지 간다.
남해 시외버스정류장에서 가천 방향 군내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면 된다.
버스는 1시간에 1대 꼴로 있다.
요금은 1인당 3천원 정도다.
택시를 타면 2만원 넘게 나온다.

*자가용 : 서울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진주에서 남해고속도로 하동 방면으로 달린다.
진교IC로 나와 남해 방향 국도를 이용한다.
남해대교를 건너 검문소에서 관광안내 팸플릿을 받아서 지도를 참고하면 된다(가는 길이 조금 복잡하다). 아니면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읍소재를 빠져 남면 방향으로 가다가 남면 해안도로로 접어든다.
그 길을 따라 가천마을 방향으로 가면 된다.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20~30분 정도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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