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먼 바다에 정박해 있는 배들 보이시죠? 뱃머리가 왼쪽에 있으면 일본이나 중국으로 가는 배고 오른쪽에 있으면 인도나 중동, 유럽으로 가는 배입니다. 기름을 넣거나 짐을 옮겨 실으려고 잠깐 정박해 있는 것이죠. 아시아와 중동, 유럽을 오가는 배들은 모두 이 길목을 지날 수밖에 없습니다. ”
STX팬오션 싱가포르법인 최임엽 상무의 이야기다. 싱가포르 동부 해안에 있는 테마섹 타워 42층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컨테이너 항구와 그 너머로 드넓은 태평양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2005년 기준으로 이 항구의 물동량은 2320만TEU에 이른다. 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한 개 분량인데 2320만TEU의 컨테이너를 한 줄로 늘어놓으면 지구를 세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가 된다.
싱가포르는 물류 중심지가 되기에 최적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말라카 해협은 깊이가 평균 50미터, 폭이 최소 20km 정도 밖에 안 되지만 이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인도네시아 바깥으로 돌아가려면 항로가 1500km 이상 늘어나게 된다. 이 해협을 바다의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바다의 실크로드, 최적의 물류 중심지
실크로드가 끝나는 이곳에서 이 배들은 연료를 보충하거나 환적 화물을 처리한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출발한 짐들을 이곳에 풀어놓고 사우디아라비아나 네덜란드 등 최종 목적지에 따라 다른 배로 옮겨 싣게 되는데 이런 환적 물량이 싱가포르 전체 물동량의 85%를 차지한다. 세계 환적 화물의 5분의 1이 이 항구에서 처리된다.
이처럼 싱가포르 항구는 지리적 조건뿐만 아니라 효율성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완벽한 자동화 설비 덕분에 트럭 한 대가 세관을 통과하고 하역을 끝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5분, 우리나라 부산항이 40분이나 걸리는 것과 비교된다. 배 한 척이 들어와서 환적을 끝내고 출항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이곳에서는 2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싱가포르 항만공사는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11개 나라에 19개의 항만을 운영하고 있다. 물류 산업은 싱가포르의 전략 산업 가운데 하나다. 부두 이용료와 크레인 사용료 등 배 한 척이 들어와 지출하는 비용은 평균 70만달러. 하루에 평균 60여척 이상이 들어오니까 날마다 400억원 이상을 벌어들인다는 이야기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지만 세계 3위 규모의 정유시설을 확보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인프라가 구축돼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럽으로 가는 배들은 싱가포르까지 갈 연료만 채우고 출발했다가 이곳에서 나머지 연료를 채워 넣는다. 물론 가격도 훨씬 싸다. 굳이 연료를 처음부터 가득 채우고 무겁게 출발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싱가포르의 면적은 692㎢, 서울보다 조금 넓은 정도지만 인구는 460만명밖에 안 된다. 이 조그만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7490달러(2005년 기준)에 이르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싱가포르는 일찌감치 물류와 금융산업에서 확실한 경쟁력을 확보했고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고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흔히 우스갯소리로 자신들을 ‘리콴유 주식회사의 종업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우스갯소리는 자조적이기 보다는 언뜻 자부심이 묻어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콴유는 1959년 이후 50년 가까이 1당 독재체제를 이어오고 있는 인민행동당의 전 총리다. ‘리콴유 주식회사’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독특한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리콴유가 물러난 뒤 고촉통 전 총리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가 지금은 리콴유의 아들인 리센룽이 총리를 맡고 있다. 리콴유는 1990년 물러난 뒤 선임장관에 이어 고문장관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데 그의 영향력은 아직도 여전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나라의 흥선대원군 정도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포르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말레이시아에 편입됐다가 인구 폭동을 겪으면서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한다. 그때가 1965년, 가뜩이나 GDP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던 영국군대까지 떠나면서 싱가포르는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다. 그때만 해도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도 채 안 되는 별 볼 일 없는 나라였다.
자원도 없고 인구도 많지 않고 땅도 비좁은 이 나라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은 사람이 바로 리콴유였다. 그는 해외 자본을 끌어들여 산업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치안과 환경을 통제하는데도 신경을 썼다. 일찌감치 물류와 금융산업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도 그의 판단이었다.
싱가포르항만공사가 싱가포르 물류산업의 핵심이라면 테마섹홀딩스는 금융산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테마섹은 100% 싱가포르 정부 소유의 국영기업이면서 싱가포르항만공사를 비롯해 싱가포르항공과 싱가포르개발은행(DBS), 싱가포르투자청(GIC), 싱가포르텔레콤 등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리콴유 장기 독재에 큰 불만 없어
테마섹은 스탠다드차타드은행과 인도네시아의 다나몬은행 등 여러 외국계 은행의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하나금융지주회사의 최대주주도 바로 이 테마섹이다. DBS는 태국의 타이다누은행과 홍콩의 다오헹은행 등을 인수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외환은행 인수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GIC는 일찌감치 우리나라에 들어와 광범위한 부동산 투자를 벌이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 알짜배기 국영기업들의 주인이 누구냐다. 테마섹의 사장은 리콴유의 며느리(리센룽의 부인) 호칭이다. GIC의 이사회 의장은 여전히 리콴유가 맡고 있고 리콴유의 둘째 아들 리센양(리센룽의 동생)은 최근까지 싱가포르텔레콤의 사장을 맡아왔다. 이 정도면 ‘리콴유 주식회사’라는 우스갯소리가 공연한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