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수출가공업체를 운영하던, 지금으로 따지면 벤처기업인 시절에 그는 공장건설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언제 땅 사서 언제 짓느냐는 식이었다.
그의 머리 속엔 온통 전광석화 같은 수출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우중은 ‘공장인수’(부산공장)를 꾀했다.
하지만 금새 문제가 생겼다.
‘실탄’(인수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천하의 김우중도 ‘돈’에 굶주렸던 시절이 있었으니…. 이것이 인생사다.
박정희와 김우중의 운명적 만남 김우중은 ‘정면돌파’를 즐긴다.
체질상 ‘측면공격’은 즐기지 않는다.
인수자금을 마련키 위해 그는 당시 최고의 은행이었던 제일은행장을 찾아갔다.
김우중은 ‘집요’하다.
먹잇감이 발견되면 놓는 법이 없다.
그는 제일은행장 집 앞에서 살다시피 했다.
인수자금을 융통해 달라고 바짓가랑이도 붙잡았다.
하지만 젊은 청년의 ‘꿈’은 노년의 제일행장을 설득하지 못했다.
아마도 멋모르는 객기쯤으로 치부됐을 게다.
김우중은 절망했다.
마지막 보루 제일은행장까지 그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런 김우중 앞에 ‘귀인(貴人)’이 등장했으니….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자! 박정희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경제를 부흥시켜야겠는데 도통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에게 ‘수출’이라는 명제를 던져준 사람은 흥미롭게도 대구사범고등학교 시절 스승이었다고 한다.
당시 스승은 박정희를 불러다 놓고 늘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여보게! 박군. 약해 빠진 우리나라의 국력을 키우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해! 오로지 힘! 지금의 적은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이야. 이를 물리치기 위해선 무엇보다 힘을 기르는 법을 배워야 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강해지는 비결을 배우는 것도 중요해. 가장 손쉽게 적진 속으로 들어가는 비법을 습득하는 거야!…” 박정희는 스승의 조언을 떠올리면서 적진 속으로 파고들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고, 이내 ‘수출’이라는 키워드를 만들어냈다.
더 큰 가르침을 얻을 요량이었을까.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장을 시켜 스승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납치된 스승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승에겐 네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찾아냈던 것이다.
스승의 아들 중 첫째는 육군 대령, 둘째는 교수, 셋째는 수출전사, 넷째는 대학생의 신분이었다.
수출전사…. 바로 스승의 셋째 아들이 김우중이었다.
박정희와 김우중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던 것이다.
권력자의 힘에 기댄 출발 1967년. 두 사람은 세종로에서 독대했다.
박정희는 젊은 김우중을 보자마자 한국 경제개발의 유일한 대안은 값싼 노동력과 열심히 일하는 근면성과 만들기 쉬운 봉제품을 수출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김우중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동상이몽(同床異夢) 아닌 이상동몽(異床同夢)이었던 셈이다.
김우중이 언급했던 당시 대화 내용을 더듬어 보자. “여보게 젊은이! 칭기즈칸은 총칼로 세계를 지배했지만 자네는 총칼이 아닌 와이셔츠로 전 세계를 지배하게. 그것만이 우리나라가 살 길이야. 칭기스칸의 ‘후예’ 김기즈칸이 되게. 그리고 내가 뭐 도와 줄 것 없어?” 김우중은 당차게 답했다.
“예! 각하의 말씀이 백번 지당합니다.
각하, 요번에 수출전진기지로 공장을 인수해야 하는데 수출금융으로 좀 도와 주십시오.”박정희 역시 기다리기 싫어하는 성격. 직답은 곧바로 날아왔다.
“음, 알았어. 칭기즈칸의 정신을 본받아야해. 창조, 도전, 희생의 정신 속에 24시간 열정으로 일해야 해”라면서 박정희는 비서를 불러 세웠다.
“어이! 김 비서, 제일은행장 들어오라고 그래.” 김우중의 세계경영은 박정희로부터 시작됐다.
정권의 힘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정권의 압력에 눌려 김우중의 세계경영 꿈이 산산이 무너질지 누가 알았으랴? 그래서 인생만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부르는 가 보다.
박정희가 칭기즈칸을 거론한 때문인지, 김우중의 인생사는 칭기즈칸과 너무도 빼닮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세계 정복을 꿈꿨다.
인류 역사상 누구도 이룩하지 못할 금자탑을 세웠다는 점도 비슷하다.
김우중과 칭기즈칸. 그들의 인생사를 이제 따라가 보려 한다.
글= 김우일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정리= 이윤찬 기자 chan4877@economy21.co.kr
76년 그룹공채로 대우그룹에 입성한 그는 그룹기획조정실 경영관리팀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이사, 상무,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으로 대우그룹의 흥망성쇠를 모두 경험한 주인공이다. 대우그룹에서 퇴사한 이후엔 대우건설, 대우인터내셔널의 인수작업에 참여했고 현재는 서경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학생들에게 산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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