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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 타임머신]'하늘이 무너져도 영화사업 하겠소'
[이코노 타임머신]'하늘이 무너져도 영화사업 하겠소'
  • 김우일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
  • 승인 2007.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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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세계정복 의지 다져 … 막내아들 영화산업 구설수 ‘부전자전?’ 몽골의 ‘영웅’ 칭기즈칸은 정복자이자 냉혈한 전투가다.
영토확장을 위해선 무엇이든지 마다치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뜻밖에도 철학에 심취한 여린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철학이 ‘무소유(無所有)’였다는 점이다.
세계정복자가 ‘무소유’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니? 이처럼 아이러니컬한 얘기도 없을 게다.
그러나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소유의 철학’ 칭키즈칸 칭기즈칸은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으로 따지면 귀족 태생이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부족도 잃었다.
그래서 혈혈단신 도망자 신세로 드넓은 초원을 떠돌아 다녔다.
그는 ‘보금자리’가 없었다.
아니, 그 의미를 몰랐다.
도망치다 잠들면 그곳이 집이었고 안식처였다.
남의 땅이라도 자기가 둥지를 틀면 그곳이 보금자리였다.
무소유의 철학에 심취한 칭기즈칸은 세계정복에 대해서도 “내가 가서 깃발을 꽂으면 내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세계경영’을 꿈꿨던 김우중도 칭기즈칸처럼 독특한 면모가 있었다.
‘경영자’라기 보단 차라리 ‘예술인’에 가까운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영화를 좋아했다.
특히 중국 무협영화를 즐겨봤다.
임원회의 휴식 시간 때 중국 무협영화를 틀어놓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던 일화는 여전히 회자되는 이야기다.
김우중의 열정 덕분인지 대우그룹은 다른 재벌기업보다 일찍 영상사업에 뛰어들었다.
물론 수많은 진통 끝에 영화사업에 진출했지만…. 군사정권이 막바지로 치닫던 1987년으로 돌아가 보자. 어느 날, 김우중은 예고도 없이 임원들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 이내 ‘폭탄’에 가까운 선언을 했다.
임원들도 깜짝 놀랄만한 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우중: “영화사업에 진출하려 합니다.
” 임원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부 임원은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
아예 “승산이 없다”고 경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총수’ 김우중은 ‘결정’을 빨리 내린다.
그것도 ‘나홀로 결단’이 많다.
때론 총수다운 모습이지만 ‘독단적’이라는 비판에 휘말리기 십상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김우중은 순전히 혼자 영화사업 진출을 결정했다.
그는 임원회의 직후 대우그룹 주력사였던 대우전자 내에 ‘영화사업부’를 신설했다.
이후 세음미디어를 설립하고 우일영상까지 인수했다.
여기까진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그는 재직 시절 50여편의 영화에 대략 5억원, 많게는 10억원까지 선뜻 투자했다.
그는 영화계의 숨은 ‘큰손’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김우중의 ‘영화사랑’은 무척 유별났다.
최근 김우중의 막내 아들이 경영에 참여한 영화투자사에 100억원대의 수상한 돈거래가 포착돼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영화를 광적으로 사랑한 김우중 그리고 영화사업에 거액을 투자한 아들. ‘부전자전’일까, 아니면 ‘뭔가’가 숨어있는 것일까. 예체능계에 강점 지닌 김우중 영화 뿐 아니다.
그는 체육에서도 많은 재능을 뽐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종목은 축구. 매년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던 대우 계열사별 축구대회에 빠짐없이 참석해 볼을 찰 정도로 그는 축구를 즐겼다.
대우그룹에 ‘프로야구단’이 없었던 이유도 김우중의 남다른 ‘축구사랑’ 때문이다.
사실 대우그룹 고위관계자들은 내심 ‘프로야구단’이 있었으면 했다.
김우중에게 수차례 ‘간청’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 오히려 축구단 대우로열즈의 창단을 선언하는 ‘깜짝수’를 선보였다.
83년 한 임원회의 때 오고 갔던 김우중과 대우 고위관계자들의 ‘설전’을 정리해 본다.
김우중: 여성배구단을 없애고 축구단을 만들려고 합니다.
대우그룹 기조실 관계자들은 반기를 들고 나섰다.
돈도 안되고 홍보 효과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우그룹 기조실 A씨: 축구단은 적게 잡아도 연간 30억원의 비용이 소요됩니다.
배구단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대우그룹 기조실 B씨: (축구단은) 홍보효과가 높지 않습니다.
그룹 이미지를 향상시키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축구단’을 만들 바엔 ‘야구단’을 창단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김우중이 누군가? 고집 하나로 세계경영을 꿈꾼 주인공이다.
고집이라면 ‘천하제일’이기도 하다.
그는 단호했다.
한걸음도 양보할 뜻이 없었다.
그는 축구단 창단을 거세게 밀어붙였고 ‘대우로열즈’를 이내 명문구단으로 만들어냈다.
다음은 김우중의 축구사랑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한 토막. 김우중은 비서실에 전화를 자주 걸지 않는다.
그런데 꼭 거는 날이 있었으니…. 그날은 대우로열즈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비서실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김우중의 기분은 경기 결과에 따라 천양지차였다.
승리하면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지었지만 지기라도 하면 “대체 뭣 하는 ××이야”라며 욕설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칭기즈칸과 김우중은 ‘이성’ 보단 ‘감성’이 발달한 인물들이었다.
어쩌면 ‘세계경영’이라는 다소 무모한 꿈을 꿀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은 아닐까…. 글= 김우일 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오리발 CI와 일장춘몽 ‘오리발’ 취급당한 ‘세계경영’ 포부 ⓒECONOMY21 사진
김우중의 세계경영 의지는 대우그룹의 ‘오리발 CI’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일명 ‘오리발’은 대우그룹의 미래였고 김우중의 자부심이었다.
오리발의 기원은 ‘대우가(大宇歌)’이다.
초창기 대우그룹 직원들은 매일 아침 ‘사가(社歌)’를 불렀는데 가사는 이렇다.
“~대우주 해와 달이 번갈아 뜨는 육대주 오대양은 우리들의 일터다~” 세계를 바라보는 김우중의 야망이 읽히는 노래구절이다.
‘대우가’에 흡족했던 김우중은 이제 그럴 듯한 CI가 필요했다.
‘세계경영’ 의지를 한눈에 표현할 수 있는 그런 CI였다.
오리발 CI를 꼼꼼히 훑어보자. 오리발의 파란색은 하늘과 바다를 동시에 의미한다.
바다와 하늘로 쭉 뻗어나가자는 뜻이다.
타원형을 하얀색으로 가로지르는 것은 6대양을 의미하고 나머지 파란색은 5대주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대우그룹 CI는 왜 오리발로 통했을까. 여기엔 숨겨진 이야기들이 꽤 많다.
YS(김영삼)정권 때의 일이다.
당시 재계엔 ‘1등 상품’이 곧 ‘1등 기업’이라는 말이 정설처럼 떠돌았다.
그런데 대우그룹은 늘상 2등이었다.
가령 자동차는 현대차를 누르지 못했고, 가전제품은 옛 럭키금성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우그룹 사람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만년 2등 대우그룹이 사실상 ‘1등 기업’이라고 여겼다.
바로 이 즈음, 대우그룹 고위관계자 모씨의 입에서 ‘오리발’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다.
“~ 동물나라의 왕을 뽑는 날이었습니다.
후보는 오리, 상어, 호랑이, 독수리, 코끼리였습니다.
상어는 헤엄을 잘 쳐서 의기양양했고, 호랑이는 누구보다 잘 뛴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죠. 물론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동물은 독수리였습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자신이 왕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물들 틈새에서 코끼리가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잘 날고 잘 뛰고 그럭저럭 헤엄치는 동물을 왕으로 추대하자.’ 그것이 바로 오리였습니다.
‘오리’는 사실상 1등 입니다.
” 그렇다.
‘오리발’은 사실 2등 기업 대우그룹을 위안하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오리발’이 꼭 좋은 뜻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YS정부는 대우그룹을 시종일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겉은 탄탄해 보이지만 내실은 형편없다’는 게 이유였다.
YS정부 관계자들에게 대우그룹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었던 셈이다.
당시 정부 고위관계자 모씨는 대우그룹 관계자들만 만나면 ‘마구잡이식’으로 쓴 소리를 늘어놓았다는데…. 바로 그 때 ‘오리발’이 등장한다.
“~대우그룹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오리발’ 같은 존재다~.” DJ(김대중)정부 집권시절, ‘공중분해’된 대우그룹. 하지만 ‘패망’의 전조(前兆)는 YS정부 때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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