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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궁중의 배신과 음모에 대한 기록
[북리뷰]궁중의 배신과 음모에 대한 기록
  • 김영식 기자
  • 승인 2008.05.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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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무열왕계 중대왕실 126년의 욕망과 포부, 허무까지 고스란히 갈무리 ‘어미가 제 아이를 죽여 종이 완성되고, 그 아이의 원성이 종소리에 실려 울린다’는 에밀레종. 전설 속의 아이가 금방이라도 한스러운 절규를 쏟아 부을 것 같은 이 비극의 종이 지금도 경주박물관 안뜰에서 그 아픈 사연과는 무관하다는 듯 천 년의 침묵으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종은 그 어떤 사료보다도 리얼하게 신라 궁중에서 벌어진 배신과 음모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여덟 살 어린 몸으로 37대 임금에 올랐으나 모후 만월부인의 배신으로 인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가련한 청년 혜공왕! 서라벌 사람들이 신라 말기 실력자들의 눈을 피해 혜공왕을 추모하는 은밀한 제식에서 나지막하게 읊조리던 피 묻은 제문이 에밀레종의 전설인 셈이다.
또한 기본구조와 양식에서도 이 종은 인류가 수천 년 이상 제작해 온 모든 악종류(樂鐘類)의 ‘기본 윤리’에 철저하게 저항하고 있다.
화살 통을 방불케 하는 원통과, 그것을 등허리에 짊어지고 있는 영웅적인 풍모의 거대한 용 등 모든 요소가 일반의 통념을 비웃는다.
아울러 구성 요소 하나하나에도 역사 속의 낯선 이야기들이 서리서리 감겨 있다.
고리 노릇을 하는 정상부의 하나의 용은 동해 용왕으로 환생한 문무왕을 형상화하고, 용의 등허리에서 뻗어 나온 원통은 만파식적(신라 때의 전설에 나오는 피리)을 나타낸다.
종복에 새겨진 꽃다운 비천은, 문무왕이 피리를 짊어진 채 동해 창파를 헤치고 뭍으로 치달아 오르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 종체의 어깨 쪽으로 올려붙인 꽃집 네 곳에 장식된 36송이의 연꽃은 다름 아닌 천하를 말한다.
결과적으로 용왕이 달려오는 천판(天板)은 바다, 36송이의 연꽃은 땅, 비천이 춤을 추는 종복(鐘腹)은 하늘로 읽혀진다.
천·지·해가 삼위일체로 어우러진 하나의 우주가 에밀레종인 셈이다.
이렇듯이 에밀레종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통일 전쟁과 당나라와의 독립전쟁에서의 승리로 이 땅에 최초로 평화의 시대를 열었으나 결국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린 신라 무열왕계 중대왕실 126년 동안의 욕망과 포부, 그 끝에 찾아온 허무까지 고스란히 갈무리되어 있다.
1981년 말 에밀레종의 음관이 만파식적(신라 때의 전설에 나오는 피리)이라는 노학자의 주장이 실린 신문보도를 보고 저자 성낙주는 깊은 감동을 받는다.
저자는 이때 받은 충격으로 인해 에밀레종을 공부하게 됐고 앞으로도 꾸준히 첨성대, 도깨비 귀면 등 우리 겨레의 유산들에 감춰진 언어를 풀어내는 데 힘을 기울일 생각이다.
그는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지금 서울 중계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영식 기자 igl7777@economy2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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