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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파고 또 파고, 깔고 또 깔고
[포커스] 파고 또 파고, 깔고 또 깔고
  • 이경숙
  • 승인 2000.06.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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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속인터넷망 중복투자 기형성장 우려...정통부 대책협의 부산 실효는 미지수
지난 5월30일, 정보통신부 회의실에 15명의 초고속통신망 전문가들이 모였다.

한국통신, 하나로통신, 데이콤, 두루넷, 지엔지네트웍스 등 통신사업자들과 정보통신부쪽 실무자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통부는 ‘통신망의 효율적 구축방안’이란 제목의 문건을 한부씩 돌렸다.
지난번 첫 모임 때 통신사업자들의 의견을 수렴해 정리한 내용이었다.
열람 뒤 곧 회수해간 그 문건에는 초고속통신망의 구조를 바꿀 만한 제안이 담겨 있었다.
참석자들이 귀띔해준 시안의 내용 가운데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렇다.
우선 ‘전화국-가입자 구간 전화망의 전면개방’이다.
가령 한국통신망이 깔려 있는 아파트에 살지만 하나로통신 서비스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집의 한국통신 전화선을 하나로통신측에 팔도록 해 서비스를 개통해주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 전화망이 들어와 있는데 다른 사업자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 새로 망을 깔 필요가 없다.
두번 세번 도로를 파헤치거나 기존 설치망을 놀리지 않아도 된다.
중소 규모의 망사업자들은 시내망 사업 진출이 더 편해진다.
한국통신, 하나로통신 등 2개 사업자가 분점하고 있던 시내 기간망이 제도적으로 확보되기 때문이다.
또 지방자치단체가 여러 사업자의 도로 굴착 신청을 한꺼번에 허가하도록 유도하거나 제한하자는 방안도 나왔다.
한번만 땅을 파 여러개 망을 한꺼번에 구축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도로굴착 불편 치러도 서비스 혜택은 못 받기도 이 모두 시민의 입장에선 ‘여태껏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내용들이다.
그동안 망 설치에 따른 불편은 불편대로 겪고 서비스는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시장 경쟁은 치열해도 정작 소비자는 서비스 선택권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서울 대방동의 정지연(34)씨는 얼마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집 바로 앞에 한국통신 초고속통신망이 매설되는 걸 보고 가입을 신청했는데 ‘망이 깔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한 것이다.
알고 보니 망은 정씨가 사는 아파트 앞만 지나갈 뿐 단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파트 단지의 가입희망자 수가 많지 않자 한국통신이 단지 안에는 망을 깔지 않았던 것. 하나로통신도 마찬가지 이유로 가입할 수 없었다.
정씨는 통신사업자들이 도로굴착을 하는 동안 먼지투성이의 울퉁불퉁한 도로를 걷는 불편을 참아냈는데도 초고속망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매우 속이 상했다.
그는 최근 다른 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야 초고속통신을 쓸 수 있었다.
반면 수요가 많은, 목 좋은 자리에선 사업자들간에 ‘땅 따먹기’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인천 만수동의 한 아파트에 사는 윤아무개(39)씨는 지난 4월 아파트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무리의 사람들을 봤다.
초고속인터넷 판촉중인 통신회사 직원들이었다.
서로 자기네 플래카드를 눈에 잘 띄는 담장에 걸려다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그 아파트를 ‘접수’한 것은 한국통신과 하나로통신. 일부 주민들은 부녀회장 등 주민대표에게 ‘다른 서비스를 받고 싶다’며 강한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심지어 부녀회장이 하나로통신쪽에서 뒷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인천에서도 크기로 소문난 이 아파트 단지에는 한국통신, 하나로통신의 광케이블망이 깔렸으며, 요즘엔 두루넷이 케이블망을 깔고 있다.
한국전력 배전주도 수난시대다.
인터넷망 수요가 급증하자 업체들이 통신설비를 허가없이 전봇대에 설치하는 사례가 함께 급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엔 케이블방송사나 중계유선사들이 통신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자체 망을 까는 경우도 많아졌다.
문제는 전봇대에 걸친 망이 많아지면, 풍압도 높아져 사고 위험이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배전주 하나당 허용되는 통신망 수는 한전 통신망을 제외하고 세개다.
한국전력은 7월30일까지 현장조사를 실시해 불법으로 설치된 설비에 대해선 정상요금의 세배까지 위약금을 부과하거나 자진철거 또는 강제철거를 지시할 예정이다.
물론 가입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업자들과 충분한 사전협의를 거쳐 진행하겠다는 게 한전의 방침이다.
그렇지만 철거작업이 시작되면 일부 가입자들의 피해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무리한 사업확장은 통신사업자가 저지르고 불편과 대가는 가입자들이 치러야 할 판이다.
싼 게 비지떡이니 좀 참으라고? 통신사업자들은 “치열한 시장경쟁 덕에 그만큼 저렴하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영국은 14만원선, 미국은 10만원선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3만~4만원 안팎의 돈으로 초고속인터넷서비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초고속망 사용자들의 기본요구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사용자들은 싼 요금보다는 빠른 전송속도와 안정적인 통신망 사용을 더 원한다.
한국통신 경영연구소가 조사한 ‘데이터통신 서비스의 이용현황’ 자료에서도 우리나라 초고속인터넷 수요자들은 상품 선택 기준으로 월 이용료보다 안정성과 전송속도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신위원회에 접수된 민원도 대부분 ‘광고와는 달리 통신속도가 너무 느리다’, ‘기일이 지났는데도 통신망을 달아주지 않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가열되고 있는 설비투자 경쟁이 과연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도 의문이다.
기간망 사업자들은 올해 설비 투자비용으로 저마다 막대한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표 참조) 이는 많은 기간망 확보라는 이점과, 거대한 부실투자의 위험을 동시에 잉태하고 있다.
삼성증권의 장성민 연구위원은 “기존 설치망이나 영업력 등 자사의 역량을 우선 파악한 뒤에 투자규모를 결정해야 한다”며 “앞으로 생존의 관건은 초기비용이 해소될 수 있는가 여부”라고 우려했다.
100만 가구용 설비를 설치했는데 20만 가구의 가입자밖에 확보하지 못한다면 나머지는 고스란히 부실투자가 돼버린다는 것. 그는 “현재로선 사업자들 가운데 한곳 정도만이 균형있는 투자와 성장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기업 역량에 맞는 성장 추구해야 하기야 어느 사업자가 부실투자를 원하겠는가. 문제는 성장세를 예측하기 어려운 시장 상황과, 막 경쟁에 가속이 붙은 사업자들의 엇갈린 이해관계다.
증권가에선 초고속인터넷시장이 올해 6천억원, 내년엔 1조억원, 내후년엔 1조7천억원 규모로 겅중겅중 증가하리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렇게 성장세가 가파른 만큼 눈앞의 시장을 전망하기가 어렵다는 게 관계자들의 고민이다.
정보통신부측은 “사실 전기통신기본법 18조와 30조의 규정만 이행된다 해도 현재 마련중인 ‘통신망의 효율적 구축방안’이 필요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공동설비 구축과 사용, 공동매설에 대한 사항들이 권고조항으로 법제화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에 얼마만큼의 수요가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운 시장 여건에서 이 조항들은 현실화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정보통신부쪽의 설명이다.
한국통신의 전화가입자망을 필요에 따라 매각하도록 하는 것 등의 대책이 나온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정부가 사업자들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시내망 사업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한국통신, 하나로통신은 “타사가 요청하면 지금도 전화가입자망을 내주고 있는데 굳이 또다른 대책이 필요 하냐”, “얼마 뒤면 시장에 의해 자연히 정리될 것”이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지엔지네트웍스 등 시내망이 없는 사업자들은 “중복투자라는 지적에 공감하고 있다”며 “영업에선 경쟁하더라도 시설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보유망의 규모와 사업자 수가 해당기업 주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지난해 말 영국 정부가 통신사업자 브리티시텔레콤(BT)의 가입자망을 2001년 7월부터 개방하도록 했을 때 브리티시텔레콤은 이 때문에 주가가 30% 가량 급락했다며 강한 불만을 나타냈었다.
등록 및 상장기업이 대부분인 우리 기간망사업자들이 흔쾌히 망 공유를 결의할 수 있을까. 기간망사업을 ‘시장논리’에만 맡기기에는 ‘시장’은 너무 이기적이다.
하나로가 두루넷을 앞질렀다!
하나로통신이 초고속인터넷망사업의 일일인자로 떠올랐다.
삼성증권이 지난 5월 업체별 가입자수를 조사한 결과 하나로통신 가입자는 35만6천명으로, 두루넷을 8천명 차이로 앞질렀다.
그러나 두 업체의 시장점유율은 크게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막강한 기간망을 기반으로 한 한국통신 ADSL의 공세 때문이다.
지난해 12월부터 본격 서비스를 시작한 한국통신은 시장 진입 5개월 만에 가입자 32만8천명을 확보해 점유율 28.7%를 차지했다.
초고속인터넷망 가입자는 지난 1월 32만9천명에서 5월 현재 114만3천명으로 거의 두두배 가량 늘어났다.
삼성증권은 올해 초고속망 가입자가 330만명으로 급증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 말의 32만명보다 열배 이상 늘어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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