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정보 측정해 입체영상으로 재현...곡선 측정 못하는 단점도 보완될 듯
가구나 방을 재면 컴퓨터에 그 모습이 입체영상으로 나타나는 ‘디지털 줄자’가 MIT 미디어랩의 한국인 학생에 의해 개발됐다. ‘핸드스케이프’란 이름의 이 줄자는 보통 줄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방향과 각도를 인식하고, 측정한 정보를 무선으로 근처 컴퓨터에 송신한다.
예컨대 박스를 놓고 가로, 세로, 높이를 재면 컴퓨터가 이 박스와 똑같은 3차원 모델을 화면으로 보여준다. 디지털 줄자가 측정한 각도, 길이, 방향 등 여섯개의 공간정보를 컴퓨터가 계산해 3차원 모델을 생성해내는 것이다. 매뉴얼이 필요없을 정도로 사용법 간편
핸드스케이프는 가로와 세로가 각각 12㎝, 폭은 4.5㎝로 어른 주먹만하다. 줄자의 몸체 속에 내장된 컴퍼스는 줄자가 바라보는 방향을 재고, 가속도계는 수평면에 비해서 얼마나 기울었는지를 인식한다.
이 줄자는 창고나 운송업, 유적 발굴작업, 실내 디자인에 이용할 수 있다. 특히 창고나 운송업에서는 창고와 트레일러의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익과 직결된다.
“트럭운전사가 컨테이너에 크기가 다른 수백개의 상자를 집어넣는다고 해보자. 트럭운전사가 핸드스케이프로 크기를 재면 컴퓨터는 현재 상태에서 공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다음 상자를 쌓을 위치를 컴퓨터 스크린 위에 표시해준다. 컴퓨터의 지시대로 쌓다가 보면 트레일러 안에 최대한 많은 상자를 넣을 수 있다. ” 이 장치를 개발한 미디어랩 탠저블(Tangible)그룹 이재철(33)씨의 설명이다.
핸드스케이프는 얼마 전 UCLA의 발굴팀이 이용해 진가를 발휘했다. 발굴현장에서는 지도 위에 발굴한 품목의 위치를 정확히 기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매몰되기 이전의 상황을 정확히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굴현장에서는 1m 정도의 간격으로 발굴기준선을 실로 연결해 바둑판처럼 만든 다음 새로운 것이 발굴될 때마다 이 선에서 떨어진 거리와 깊이를 잰다. 이 작업은 하루에도 수백번씩 되풀이되기 때문에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핸드스케이프는 이런 수고를 단박에 덜어줬다.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은 자를 사용하는 횟수를 줄였고, 측정치를 일일이 기록하지 않아도 됐다.
또한 이 줄자로 가구나 방의 크기를 재면 바로 도면이 나오기 때문에 건축가들이나 디자이너들이 실내 디자인을 하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일부 엔지니어들은 컴퓨터 비전 방법으로 물체의 크기와 모습을 재서 컴퓨터에 나타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씨는 줄자를 고집한다. 줄자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흔히 쓰는 친숙한 도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개발한 줄자는 사용방법이 아주 간단하기 때문에 매뉴얼도 없다.
물론 이 줄자에도 단점은 있다. 핸드스케이프는 직선만 재고 곡선은 재지 못한다. 그러나 최근 캐나다의 한 회사가 곡선 모양의 표면을 잴 수 있는 ‘휘는 줄자’를 개발했다. 두 기술을 결합하면 핸드스케이프는 현장에서 생산성과 효율을 크게 향상시킬 것으로 보인다. 세상을 재고 싶다
이씨는 홍익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MIT에 와서는 건축을 전공했다. 현재 미디어랩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이씨는 얼마 전 자기가 숙식하고 있는 방을 전시실로 개조해,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유리벽을 통해 방의 내부와 자신의 생활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퍼포먼스를 3개월 동안 열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왜 이런 줄자를 개발하게 됐을까. 그는 “토지측량사였던 아버지가 매일 세상을 자로 재는 것을 보고 자라서 그런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