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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판정보류’ 현대건설 운명
[포커스] ‘판정보류’ 현대건설 운명
  • 곽정수(한겨레 경제부)
  • 승인 2000.11.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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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회생을 위한 외줄타기냐, 백기투항이냐 갈림길 11월3일 오후 서울 명동회관에서 채권단이 제2차 기업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퇴출기업 명단을 공개하면서 현대건설을 ‘판정 보류’로 발표하는 순간, 서울 계동의 현대사옥은 침울했다.
사무실에서 텔레비전으로 이를 지켜보던 현대의 한 임원은 “혹시나 했는데 우려했던 결과가 그대로 나왔다”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발표 하루 전인 11월2일 오후 7시께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싱가포르항공편으로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 회장이 빨리 들어와 정부와 채권단이 요구하는 대로 대주주 일가 사재출자와 서산농지 매각을 포함한 추가자구안을 내면 현대사태가 해결될 수 있을텐데라며 정 회장에 비난의 화살을 던졌다.
하지만 현대건설의 내부 자금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정 회장이 들어와봐도 별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
정몽헌, 귀국해도 뾰족한 수 없었다 현대의 주장대로라면 올들어 10월까지 채권단이 회수해 간 현대건설의 차입금은 9200억원에 이른다.
반면 이 기간중 현대의 자구금액은 7천억원에 그쳤다.
2천억원 이상이 회사 밖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현대건설의 손광영 이사는 “기존 자구안이 100% 이행돼도 자금수지를 맞추기가 쉽지 않은데, 여신회수가 계속돼 감당을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현대건설의 올 4분기 자금수지 전망을 살펴보면 총 예상수입이 2조5332억원으로, 이자를 포함한 지출 예상액 2조4834억원을 빼면 498억원이 남는다.
하지만 4분기 중 만기가 돌아오는 총 차입금 9888억원을 다시 빼면 9390억원의 자금부족이 발생한다.
물론 이미 네차례에 걸쳐 발표한 자구안 중 4분기 중에 계획된 1조1033억원이 100% 이행되면 1643억원의 자금이 남는다.
하지만 문제는 현대가 이미 내놓은 총1조6천억원의 자구계획 가운데 4천억원 정도는 이행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데 있다.
현대가 건설의 회생을 위해서는 채권단의 신규자금 지원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대가 대주주의 사재출자와 서산농장 매각 등을 모두 포함시켜 다섯번째 추가자구안을 마련했음에도 채권단이 현대건설을 ‘판정 보류’로 분류한 것은, 역설적으로 정부와 채권단 스스로 추가자구안이 건설의 회생을 위한 필요충분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 건설업체 순위 17번째, 건설 중인 아파트 3만호, 국내 공사현장 418개, 거래업체 2500개, 공사계약 잔고 14조7천억원, 국내 해외건설 수주의 60%, 차입금 5조4천억에 이르는 ‘항공모함’ 현대건설이 침몰할 경우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정부와 채권단이 고의로 ‘현대 고사작전’을 펼리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이미 채권단에 제출한 다섯번째 자구안에 정 회장과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갖고 있는 계열사 지분 가운데 그룹 경영지배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것을 팔아 건설에 출자하는 방안을 포함시켰다.
정 회장의 경우 전자(보유지분 1.7%)와 종합상사(1.22%) 주식을 팔아 건설이 보유하고 있는 상선지분(8.69%)를 매입하고 나머지는 건설의 유상증자에 참여한다는 계획이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도 현대차(2.69%)와 중공업(0.51%) 지분을 팔아 건설 유상증자에 참여하고, 건설의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매입한 1894억원도 출자금으로 전환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건설 회사채와 기업어음을 출자전환하는 것은 부채축소 효과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건설의 유동성을 늘리지는 못하는 한계를 안고 있다.
따라서 대주주의 주머니를 톡톡 털어 사재출자를 해봐야 현대건설 유동성 확대에 실질적인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은 1600억원대에 불과하다.
관건은 서산농장 매각 건이다.
현대는 3123만평에 이르는 서산농장을 조성하는 데 6421억원이 들어갔기 때문에 이 정도는 받아야 하고, 최대한 양보하더라도 공시지가인 3621억원은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정부는 동아건설 김포간척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시지가의 66%선(2400억원) 이상은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현대는 정부가 서산농장의 가격을 후려치는 것을 보면 건설을 회생시킬 생각이 별로 없는 것 아니냐고 의심한다.
더욱이 채권단이 3일 현대건설을 판정 보류로 분류하면서 앞으로 연말까지 기존 차입금의 만기연장은 되겠지만 물대어음 지급, 해외부채 상환은 건설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한 것은 사실상 ‘건설 포기’ 의중을 확실히 드러낸 것으로 보고 있다.
채권단은 6, 7일 중으로 전체 채권단협의회를 열어 제2금융권에 대해 건설의 만기도래 차입금에 대한 회수자제를 요청한다는 계획이지만 현대는 큰 기대를 않고 있다.
정씨일가, 돈과 경영권 모두 날아갈까 위기감 여기에 현대의 고민이 놓여 있다.
이미 차입금 회수로 자금흐름이 마이너스인 상태에서 앞으로도 제2금융권의 차입금 회수 가능성은 여전하고, 사채출자와 서산농장 매각으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은 4천억원 선에 불과한데 채권단은 신규자금 지원은 절대 없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는 최악의 경우 대주주 사채출자 뒤 법정관리가 되면 돈은 돈대로 날리고 회사 경영권도 뺏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현대 관계자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정몽헌 회장과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 김경림 외환은행장과의 협의가 결렬된 것은 다섯번째 자구안 내용 때문이 아니라, 채권단이 신규자금 지원을 해야 한다는 정 회장의 요청과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정부와 채권단의 입장이 팽팽히 맞섰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부와 채권단은 신규자금 지원을 거부하는 대신 새로운 해결책으로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등 형제회사들이 도움을 주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건설이 보유하고 있는 현대아산(20%·900억원) 및 현대석유화학 지분(11.6%·618억원), 인천 철구사업부지(425억) 등을 자동차와 중공업 등이 나눠서 사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논의하기 위해 3일 오전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입원해 있는 서울 현대중앙병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가족회의가 참석 예정자들의 불참으로 무산됐듯이, 형제기업들은 지원 불가라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가족회의 예정 사실이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재경원의 고위 관계자가 2일 저녁 일부 기자들에게 이를 흘린 데서 비롯됐다.
형제기업의 지원 방안은 정부의 단순한 희망사항이라기보다 사실상 요청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하다.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에게 가족회의에 꼭 참석하라며, 예정돼 있던 중국출장을 만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MK(정몽구 회장)는 중국출장 대신 지방출장을 떠나는 것으로, 거부의사를 명백히 했다.
오히려 형제기업들은 가족회의 개최 사실이 시장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며 2일 밤부터 지원 불가 방침을 서둘러 밝히는 등 진화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현대차의 한 임원은 “대주주인 다임러크라이슬러와 소액주주의 권익을 보호하고 투명경영과 시장원리를 충실히 지켜야하는 상황에서 건설을 지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MK가 개인적으로는 도와줄 수 있지 않느냐는 얘기도 있지만, MK는 도와줄 돈이 없다”면서 “왕회장(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유산을 MH(정몽헌 회장)가 다 가져가고 MK는 단돈 1원 한푼 받은 게 없다”고 잘라말했다.
현대중공업 임원도 “정몽준 고문이 형제기업들이 도와줘야 한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진 것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정부, ‘퇴출’ 내리든가 아니면 ‘지원’ 했어야 사실 정부가 외환위기 이후 투명경영을 위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적극 추진하고 재벌그룹의 계열사간 부당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해온 점을 생각한다면 현대 형제기업의 건설 지원 유도는 전혀 명분이 없는 짓이다.
재계에서는 정부와 채권단이 형제기업 지원이라는 편법을 쓸 게 아니라 아예 퇴출결정을 내리던가, 아니면 성실한 자구이행과 연계시켜 신규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정도’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결국 현대건설은 채권단의 추가지원이 없이 사채출자를 포함한 다섯번째 자구책을 이행하며 계속 독자회생이라는 힘겨운 줄타기를 할 것인지, 아니면 조기에 두손을 들어버릴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정몽헌 회장은 그동안 몇차례 기회가 있었음에도 시간을 끌다가 최악의 상황을 맞은 자신의 ‘판단 미스’를 뒤늦게 후회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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