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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투자기법 '밀물' 업계 초긴장
선진투자기법 '밀물' 업계 초긴장
  • 이원재
  • 승인 2001.06.2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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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리티 슈로더 등 외국 투신사 잇따라 국내 진출 선언... 가치투자 일반화될 듯
“과학적 투자, 시스템 투자는 우리가 국내 최고”라며 자랑을 늘어놓던 유리에셋 서경석 상무는 외국계 펀드의 국내 진출 얘기가 나오자 사뭇 긴장하는 표정이 됐다.
“국내에서는 우리가 최고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우리가 벤치마킹하고 있는 곳은 앞서서 과학적 투자기법을 적용해 성과를 본 외국 펀드다.
그들과 직접 경쟁해야 한다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유리에셋만의 얘기가 아니다.
최근 세계적인 외국계 투신운용사들이 잇따라 한국 시장을 본격 공략할 방침이라는 전략을 천명하면서, 국내 투신업계는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그동안 외국계 펀드들은 해외에서 운용하는 펀드를 한국 증권사 창구를 통해 판매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예 국내에 투신사를 세우고 펀드매니저들을 조직해 국내에서 직접 운용하는 펀드를 팔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한국진출 서두르는 피델리티와 슈레더 국내 투신업계를 가장 긴장시키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세계 최대규모 뮤추얼펀드인 피델리티의 한국 진출이 임박했다는 소식이다.
영국 런던의 피델리티 본사는 2주 전 ‘한국 시장 진출을 서두르라’는 지시를 아시아태평양본부를 통해 서울사무소로 전해왔다.
피델리티는 현재 서울사무소를 두고 해외펀드를 가져와 한국투신증권이나 시티은행 등을 통해 그대로 파는 업무만 하고 있는 상태인데, 올해 말 또는 내년 초에는 펀드 운용도 하고 판매도 할 수 있는 투신증권사 설립 인가를 받는다는 것을 목표로 뛰고 있다.
1804년에 설립됐고 현재 260조원의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영국 투자신탁회사 슈로더는 피델리티보다 한발 더 앞선 모습이다.
슈로더투신운용은 이미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예비인가를 받았고, 이변이 없다면 7월 중 본인가를 받아 영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프루덴셜보험이나 프랑스의 BNP파리바의 경우 독자적인 투신사 설립은 아직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국내 투신사와 합작하는 방식의 진출을 적극 모색하고 있다.
프루덴셜은 제일제당 계열인 제일투자신탁증권에 1100억원을 우선주와 전환사채 매입 방식으로 투자했다.
계약 옵션에 이들을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게 돼 있어, 마음만 먹으면 1대주주로 올라설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굿모닝증권과의 합작관계를 청산하고 100% 외국법인으로 전환한 템플턴투신운용의 경우 이미 각종 펀드평가사들이 발표하는 국내 수익률 1위 투신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정황에 미루어 외국 투신사들의 국내 진출은 그리 간단히 볼 사안이 아니다.
피델리티 이재형 서울사무소장도 “5년 이내에 국내 5위 투신사가 되는 것이 피델리티의 목표”라고 말한다.
국내 투신사들이 수십년 동안 닦아온 시장을 순식간에 뒤엎을 수 있는 비책이라도 갖고 있는 것일까? 사실 역사가 오랜 세계적인 외국 펀드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과학적 투자기법을 사용해왔다.
조직 안에 리서치 기능을 갖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국내 투신운용사들과는 달리, 세계적 펀드들에게는 시장과 기업에 대한 리서치가 펀드 운용의 핵심이다.
피델리티의 리서치 인력은 전세계에 걸쳐 1년에 무려 4만7천개 기업을 방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방문한 기업 모두에 투자하는 것은 아니다.
방문한 기업들의 데이터를 꼼꼼히 분석해 투자할 만한 기업을 몇 번 걸러낸 끝에 최종적으로 5% 정도를 추려낸다고 한다.
이렇게 추려진 기업들은 피델리티 펀드의 투자대상 기업이 되며, 담당 펀드매니저는 적당한 시점에 판단을 해서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
물론 이런 방대한 작업은 개별 펀드 규모 자체가 방대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해외 펀드는 1개 펀드가 1조원대를 넘어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 회사가 주식형이든 채권형이든 종류별로 한개씩의 펀드만 운용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
따라서 펀드 하나를 운용하기 위해 수십명의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가 달라붙는 게 가능하다.
투자자 성향에서도 차이가 난다.
미국 투자자들의 경우 ‘연금 대신 뮤추얼펀드를 들었다’는 얘기가 흔할 만큼 장기투자 위주로 간접투자에 접근한다.
한번 사면 5년은 갖고 있겠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펀드매니저들도 단기수익에 급급해 무리한 투자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순간적으로 20~30% 빠지는 것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주가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만 신경쓰면 되므로 아무래도 기술적 분석보다는 기업 펀더멘털을 중시하는 가치투자를 하게 된다.
지난해 이후 미국 나스닥지수가 50%나 빠졌지만 뮤추얼펀드 투자자들은 그래도 대부분 돈을 벌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여기서 나온다.
한 투신사가 수십개의 상품을 개발해 운용하고, 몇 명 안 되는 펀드매니저가 수많은 펀드를 모두 관리해야 하는 한국 상황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국내에는 100억원 미만짜리 소규모 펀드만 수두룩하다.
게다가 한국의 주식형 펀드들은 산업별·지역별 분류도 돼 있지 않고 대부분 엇비슷한 종목에 투자하는 ‘그 나물에 그 밥’이다.
한국의 간접투자 시장이 자산운용 규모로는 세계 10위권이라지만, 지나치게 작은 펀드들이 많아서 운용 환경은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국내 펀드매니저들의 얘기다.
가치투자와 장기투자 일반화 될 것 투자자들이 단기 성향이고 시장환경도 판이한 국내 시장에 와서 외국계 펀드가 성공할 수 있을지 회의 섞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제일투신 국제업무팀 서재홍 과장은 “외국 투신사가 한국에 진출하면 어떤 기본적 운용철학을 갖고 있더라도 어느 정도는 한국 상황에 적응해야 성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3개월 만기 스폿펀드가 가장 인기를 끄는 한국에서 3~5년을 내다보고 투자하는 뮤추얼펀드가 얼마나 팔리겠느냐는 비아냥도 들린다.
그러나 한국 시장도 장기투자 중심의 시장으로 바뀌는 시기가 임박했고, 그렇게 된다면 외국계 펀드들이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진단이기도 하다.
동양오리온투신 김자혁 상무는 “상장시가총액의 32%를 외국인이 차지하고 있고, 기업회계 감시 강화를 통해 기업 재무구조가 개선되고 있는 등 한국의 간접투자 시장도 구조적 변혁을 겪고 있다”며 “조만간 시장변동성이 줄어들고 미국식의 가치투자·장기투자가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피델리티 이재형 소장은 “단단해 보이기만 했던 일본에서도 지난해 피델리티가 1위를 차지했다”며 “한국 시장의 관행을 바꿔나가도록 하기 위해 투자자와 판매직원에 대한 교육에도 상당한 투자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반도체,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이제는 펀드매니저들도 세계와 직접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영원한 2등이 진짜 1등
펀드매니저 어제와 오늘 지난해 7월 대한투자신탁의 백한욱, 국민은행의 이종성, 템플턴자산운용의 이익순, 한국투자신탁의 임흥렬씨 등 6명의 펀드매니저가 주가조작 혐의로 검찰에 줄줄이 구속됐던 사건은 간접투자업계 전체를 뒤흔들다시피 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돌던 ‘거액을 굴리는 펀드매니저가 기업에서 돈을 받고 주가를 조작해준다’는 얘기가 사실로 확인된 것이기도 하지만, 구속된 펀드매니저들이 다들 한때 내로라는 수익률을 자랑하던 ‘스타 군단’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불명예스런 퇴장은 아니더라도, 한때 수천억원대의 자산을 주무르며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다가 수익률이 추락하면서 시장에서 말없이 사라진 펀드매니저들은 많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시장변화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해서, 일부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한분야에 자금을 집중했다가 주가폭락으로 퇴출의 길을 걸었다.
펀드매니저의 이름을 걸고 펀드 상품을 발매하는 게 유행이던 2~3년 전까지만 해도 문제가 심각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해당 상품의 수익률이 다른 상품과 비교해 현저하게 낮아지면, 펀드 가입자들은 그 펀드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협박하거나 욕설을 퍼붓기가 일쑤였다.
이 때문에 사무실을 비우고 피해다니는 펀드매니저들까지 생겼다.
펀드매니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운용하던 펀드를 버리고 물러남에 따라 펀드매니저의 이름은 펀드 이름에 버젓이 살아 있는데 정작 펀드매니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황당한 경우까지 일어났다.
실명을 걸고 만든 펀드 가운데 가장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것이 미래에셋 박현주 펀드였다.
98년부터 뮤추얼펀드 붐이 일어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이 펀드는 그러나 주가하락과 함께 수익률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박현주 사장과, 당시 운용을 맡던 ‘스타’ 펀드매니저들은 지금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등 펀드운용 일선에서는 물러난 상태다.
현대투신에서 대대적 마케팅과 함께 내놓았던 ‘바이코리아’는 사실상 이익치 회장이 얼굴마담 역할을 했다.
그러나 “5년 안에 종합주가지수가 6000까지 간다”며 간접투자 열풍을 주도하던 이익치 회장은 주가폭락으로 이미지에 상처를 입은데다 현대그룹 내분까지 겹쳐 갈 곳을 잃었다.
투신업계에서는 “한번 수익률 1위를 하는 펀드매니저보다는 2년 연속 2등을 하는 펀드매니저가, 그보다는 10년 연속 10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펀드매니저가 더 훌륭하다”는 말이 정설이다.
그만큼 꾸준한 성과를 내기가 힘든 직업이 펀드매니저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는 10~20년 동안 세계 정상의 펀드매니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투자자들은 그런 펀드매니저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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