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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T칼럼] 영웅을 기다리며
[DOT칼럼] 영웅을 기다리며
  • 최성호
  • 승인 2000.06.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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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의 제국 마이크로소프트에는 ‘신’(God)으로 불리는 ‘슈퍼 프로그래머’들이 있다고 한다.
몇명 안되는 이 신들은 저 높은 곳에서 방대하고 복잡한 소프트웨어 전체를 설계하고, 그 밑에 있는 엔지니어들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쪼개진 설계도의 조각들을 구현한다.
크고 복잡한 소프트웨어는 이처럼 재능이 출중한 몇몇 엔지니어에 의해 주도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도 수십만줄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프로그램을 거의 혼자 만들어내는 슈퍼 프로그래머들이 있었다.
워드프로세서 개발 열기가 뜨거웠던 시절, 이런 핵심 엔지니어를 중심으로 인재들이 모여 용호상박의 결투를 벌였다.
용과 호랑이에 해당하는 슈퍼 프로그래머들은 그야말로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만큼 소프트웨어업계가 치열하고 뜨겁게 경쟁하던 때가 언제 있었던가 싶을 만큼 열기가 대단했다.
10년지 대계를 망치는 비즈니스 요즘의 닷컴 시대에도 영웅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 시대의 영웅들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엔지니어가 아니라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이 많아서, 미국 같으면 스탠퍼드나 하버드대 출신의 MBA이기 십상이다.
대기업에서 잘 훈련받고 전문적 경험을 쌓은 중간 간부였거나, 성공한 벤처기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들고나와 다시 창업한 ‘벤처 경영꾼’들이 대부분이다.
일부 특출한 엔지니어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기술적인 혁신을 이룬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가 드물다.
비즈니스 계획의 정교함이나 충분한 투자, 그리고 전략적 제휴를 통해 시장을 주도면밀하게 리드할 수 있는 비즈니스 네트워크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늘 다시 그 옛날의 영웅을 꿈꾼다 요즘에는 물 건너에서 어제 갓 나온 비즈니스 모델을 들고 너도나도 남들보다 ‘더 빨리’ ‘훨씬 먼저’ 만들려다 보니, 외국에서 제품과 기술을 들여와 이용만 하기에도 사람과 시간이 턱없이 모자란다.
자연히 잠재력 있고 능력 있는 엔지니어들이 핵심 제품을 만드는 데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저런 닷컴의 높은 연봉과 부의 유혹에 넘어가 가뜩이나 열악한 인적 환경 속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얄팍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기에 급급하다.
흔히 미국 서부개척시대 골드러시의 예를 들어 닷컴 시대에 돈을 버는 회사는 인터넷 비즈니스를 가능하게 하는 각종 시스템과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금을 캐는 각종 장구를 만들어야 할 ‘장이’들마저 너도나도 금캐러 가느라 들고 있던 연장을 던져버리고 닷컴 금광에서 땅 만 파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골드러시가 끝나자 흥청망청하던 술집 주인들과 일확천금으로 졸부가 된 금광 주인들은 다 떠나고 오직 황폐해진 마을과 노다지에 청춘을 걸었던 주정뱅이 광부들만 남지 않았던가. 닷컴 러시가 지나가면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에는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시장논리로 어쩔 수 없다라고 하기에는 그 후유증이 너무 심각할 것 같아 걱정이다.
기술경쟁이 있어야 영융시대도 온다 지금처럼 닷컴 비즈니스에만 치우치다 보면 피상적이고 열등한 기술을 가진 엔지니어의 비중만 계속 늘어나고, 핵심 소프트웨어 제품 개발에서 요구하는 기술을 가진 고급 엔지니어를 양성할 기회가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그나마 있던 사람마저 사라져 결국 변변한 소프트웨어 제품 하나 못 만드는 나라로 전락할지 모른다.
지금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업계는 옛날의 그런 엔지니어 영웅들이 다시 필요하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자국산 워드프로세서 제품을 가진 몇 안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일 수 있었던 것은 시장에서 끊임없는 기술경쟁을 했기 때문이며, 그 결과 찬란했던 영웅시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난세는 영웅을 필요로 하고, 또 난세가 영웅을 만들지 않는가. 그러기에 오늘 다시 옛날의 그 영웅들을 꿈꾼다.
깃발을 휘날리며 위풍당당하게 달려올 그 영웅들을. 우리가 외국의 닷컴을 모방해서 부지런떠는 그 사이에 우리의 영웅들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세계적인 소프트웨어로 영웅이 되기를 꿈꾸는 내일의 영웅들이 지금 이 순간 어느 곳에선가 있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비단 나만의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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