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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유럽, 디지털 르네상스
[글로벌] 유럽, 디지털 르네상스
  • 손영욱
  • 승인 2000.07.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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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혁명으로 미국의 신경제 패권에 도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한 대중연설에서 “우리는 누가 뭐래도 세계를 이끌고 있다”고 호언했다.
그의 말대로 지금 미국인들은 세계 경제를 제패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을지 모른다.
10여년 동안 지속된 미국 경기의 호조는 이제 역사상 가장 긴 경기호황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실업률은 유럽의 절반 수준인 4% 정도에 불과하다.
포르셰를 몰고 다니며 백화점 진열장을 비우고, 너도나도 주식에 투자한다.
미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미국의 자부심에 금이 가는 조짐이 보인다.
경기과열 양상과 소비자 물가상승 등의 압력으로 경기후퇴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두가지 문제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점점 심화되는 빈부격차다.
계속되는 경제호황에도 미국 중산층의 실질소득은 늘지 않았고, 저소득층은 생계유지를 위해 제2, 심지어 제3의 직업을 구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또다른 하나는 미국 외적인 것으로,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유럽의 도전이다.
유로 약세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던 유럽이 최근 빠른 속도로 미국을 추격하고 있다.
유로의 하락은 수출을 급속히 증가시켰고, 유럽은 지난 2년 동안 평균 3%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다.
수치상으로 보면 10년 안에 미국 경제를 다시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 유럽으로, 신경제 중심이동 최근 미국의 <포춘>은 정보통신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신경제의 중심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컴퓨터, 인터넷 혁명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의 추격이 무섭게 시작됐다고 <포춘>은 분석한다.
무선통신시장을 놓고 보면 80년대 일본이 미국을 누르고 전세계 가전시장을 정복했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휴대전화가 발달한데다 특히 무선통신 분야에서는 미국보다 한발짝 앞서왔다.
유럽의 3대 이동통신 업체인 노키아(핀란드), 에릭슨(스웨덴), 지멘스(독일)는 올해 안으로 세계 시장의 3분의 2를 석권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통신시장에서도 유럽의 도전이 거세다.
영국의 보다폰은 독일의 만네스만을 합병해 450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함으로써 세계 최대 통신업체의 위치를 굳히고 있다.
최근 민영화된 스페인 통신회사 텔레포니카(Telefonica)도 남미 통신시장을 석권하면서, 그동안 남미 시장의 맹주였던 미국 기업들을 따돌리고 있다.
강력한 내수시장 또한 든든한 배경이다.
최근 유럽의 인터넷 가입자 수는 매일 10만명씩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의 인터넷 이용률은 미국보다 높다.
특히 전자상거래 분야는 정부 차원의 지원을 받으며 놀랄 만한 도약을 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부는 2003년까지 법을 개정해 각국 정부가 구입하는 물품을 전자상거래로 조달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조달시장 규모는 무려 1조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무선인터넷 단말기 시장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2년 안에 1억7천만개의 왑(WAP) 핸드폰이 팔릴 것으로 내다본다.
이런 추세라면 유럽에는 컴퓨터보다 오히려 핸드폰 보유자가 많아져 5년 안에 인터넷 사용자의 절반이 왑 핸드폰을 이용하게 될 전망이다.
이런 폭발적인 무선인터넷 단말기 보급에 힘입어 무선인터넷 전자상거래(M-Commerce)도 한창 개화를 준비하고 있다.
유럽 각국에서는 한국의 IMT-2000에 준하는 UMTS 주파수 경매가 한창인데, 얼마 전 영국의 UMTS 주파수가 360억달러라는 엄청난 고가에 낙찰됐다.
그만큼 유럽 시장이 성장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셈이다.
무선인터넷 시장 눈부신 성장 디지털 혁명을 꿈꾸는 유럽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게 벤처기업 창업 열풍이다.
베를린에 있는 유럽 최대 벤처캐피털 회사인 에코나(Econa)에는 올 들어 매주 60여개 이상의 창업계획서가 밀려들고 있고, 지원을 기다리고 있는 기업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벤처밸리도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에어버스 본사가 있는 프랑스 틀루주 주변에는 항공우주산업 벤처기업들이, 벨기에 이프레 주변에는 언어기술 벤처기업들이, 영국 캠브리지와 독일 뮌헨에는 바이오 벤처기업들이 단지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스페인 바르셀로나에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업체들이, 핀란드 오울루와 스웨덴 스톡홀름의 모빌밸리에는 무선통신 벤처 업체들이 각각의 특성을 살리며 미국의 실리콘밸리와 겨루고 있다.
신경제로의 탈바꿈과 그것의 성공은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정부의 노력도 매우 중요하다.
유럽연합 15개국 정상들은 지난 20일 포르투갈 페이라에 모여 디지털 경제의 선두주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담은 ‘e-유럽 2002’ 행동계획을 승인했다.
이 계획은 단순한 선언을 넘은, 21세기 유럽 경제의 사활을 건 청사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행동계획은 2002년까지의 청사진을 세가지로 나누어 제시한다.
첫번째는 ‘값싸고 빠른 인터넷 이용’이다.
통신시장 자유화를 통해 24시간 균일요금제를 확대하고 장기적으론 무료화를 꾀한다는 게 커다란 뼈대다.
예컨대 도시지역에는 2001년까지 XDSL이나 TV케이블 따위를 이용해 초고속인터넷망을 구축하고, 농촌지역에는 고속무선인터넷을 조기에 보급하다는 계획이다.
또한 각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중심으로 단일한 인터넷 보안기준을 마련하고, 컴퓨터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중앙기구를 설립하는 계획도 승인했다.
두번째는 ‘인간에 대한 투자’다.
2002년까지 유럽의 모든 학교에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인프라와 네트워크를 구축하겠다는 미래지향적인 계획이다.
모든 교사의 재교육도 포함돼 있다.
또한 지식기반 경제로의 전환을 위해 정부 및 기업 보조로 노동자 재교육을 제도적으로 후원하고, 장애인 및 노인들의 인터넷 사용을 확대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정보사회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내용도 발표했다.
신경제의 사회적인 성격을 강조해 어두운 구석을 배려함으로써 미국식 신경제를 쫓아가지만은 않겠다는 유럽인들의 자존심이 담겨 있는 셈이다.
디지털 유럽의 청사진 ‘e-유럽 2002’ 세번째는 ‘인터넷 사용’이다.
유럽연합 차원에서 전자상거래를 장려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관련 법규를 정비하고, 특히 지적재산권 및 전자화폐에 관한 규정을 확립할 계획이다.
정부의 물품 구입을 인터넷 경매방식으로 전환하고, 관공서 업무를 인터넷으로 제공하는 등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오픈소스 프로그램 개발을 적극 권장하고, 소비자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닷컴 기업에 대한 품질보증제 도입, 의료 서비스를 위한 네트워크 구축 등의 지원방안도 밝히고 있다.
그동안 유럽에서는 미국의 디지털 경제를 ‘카지노식 자본주의의 거품’쯤으로 가볍게 치부하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e-유럽 행동계획은 신경제의 원동력인 정보통신기술에 힘을 집중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유럽연합의 이런 계획이 현실화된다면, <월스트리트저널>이 묘사한 것처럼 세계 경제의 ‘빅뱅’을 불러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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