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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내 아바타를 벗겨봐"
[문화] "내 아바타를 벗겨봐"
  • 이경숙
  • 승인 2000.05.3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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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공간에 ‘또 다른 나’… 가상 공간의 분신에 빠져 현실 잊는 네티즌도 수두룩
사이버성폭력고발센터 www.gender.or.kr를 운영하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이경화 팀장은 얼마 전 이상야릇한 고발사항 하나를 접수했다.
한 남자네티즌이 채팅을 하다 `남자로 보이는 네티즌'한테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남자가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해?

스스로를 39살 기혼남이라고 밝힌 신고자의 사연은 이랬다.
남자는 어느날 재미삼아 여자 이름의 ID로 채팅방에 들어갔다.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으며 익명성이 주는 쾌감을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뒤통수를 때렸다.


느닷없이 남자 이름의 ID를 쓰는 네티즌이 끼어들어 `여자'로서 듣기에 매우 불쾌한 성적 욕설을 퍼붓고는 훌쩍 나가버린 것이다.
`성적 모멸감'(?)을 느낀 남자는 가해자를 찾아 채팅방을 이잡듯이 뒤졌다.
너 어디 걸리기만 해봐라.

그러나 가해자는 첩보원 놀이라도 하는지 쉽사리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남자는 한 채팅방에서 자신에게 쏟아진 것과 똑같은 내용의 폭언을 여자 네티즌에게 퍼붓는 남자 이름의 ID를 잡아냈다.


고약한 장면은 채팅방을 돌아가며 10여차례나 반복됐고, 그때마다 가해자는 천의 얼굴로 둔갑했다.
가해자는 ID를 바꿔가며 여자를 향해 무차별적인 성적 공격을 감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에 드는 분신과 결혼까지 인터넷이 현실세계와 다른 가상공간을 급속도로 넓혀가면서 세상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가상공간의 질서가 현실세계의 질서를 위협하기도 한다.
가상공간의 주인공은 흔히 `아바타'(avatar)로 불리는 네티즌의 분신이다.
통신ID, 게임이나 채팅의 캐릭터 등 여러가지 형태로 존재하는 아바타는 주인의 그림자에 불과한데도, 요즘엔 거꾸로 주인의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아바타의 괴력은 머그게임(MOG, Multiplayer Online Game) 리니지(LINEAGE)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반왕(反王)이 점령한 성을 탈환하기 위해 벌이는 대모험을 다룬 이 게임에서 게이머들은 자신의 분신을 통해 현실사회와 똑같은 삶을 이어간다.
심지어 마음에 드는 분신과 결혼까지 한다.
이 게임은 현재 가입자가 200만명이 넘을 정도로 네티즌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리니지의 폭발적인 인기는 중독증 논란으로 이어졌다.
최근 정보통신부 자유게시판에 `NGO21'이란 네티즌이 리니지 개발업체인 엔씨소프트(NCSoft)의 게임 인가 취소를 요구하는 글을 올린 이후 논란은 더욱 증폭됐다.
NGO21의 의견에 동의하는 네티즌들은 리니지의 강력한 중독성이 게이머들의 일상생활까지 침범해 `폐인'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리니지 게임의 `고수' 류아무개(29)씨는 최근 자기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게임방에서 리니지 프로그램을 몽땅 지워버렸다.
본업을 집어치우고 게임방 아르바이트를 자청할 정도로 리니지에 흠뻑 빠져 있던 그였지만, 리니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고서는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떤 직장인은 사흘 동안 일손을 놓고 리니지에 매달렸다.
어떤 학생은 아바타가 죽었다면서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아바타를 죽일래, 네가 죽을래 아바타의 힘을 키우기 위해 게이머들끼리 사기를 치거나 `살인'(PK,Player Kill)을 하기도 한다.
아바타가 죽으면 가해한 아바타의 주인을 실제로 찾아가 보복하는 `현피' 즉 현실피케이도 비일비재하다.
게임방끼리, 혹은 리니지 내 조직인 `혈맹'끼리 패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1년 전 `쓰리디(3D)'란 이름의 아바타에게 일어난 현피사건은 리니지 게이머들 사이에선 유명한 일화다.
리니지 세상에서 `지존'으로 군림하던 쓰리디는 다른 어떤 아바타보다 막강했다.
리니지 공간에 쓰리디가 나타나면 게임 중인 아바타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를 정도로 쓰리디의 인기는 대중스타 못지 않았다.
사건은 쓰리디가 한 아바타를 죽이면서 시작했다.
피살자의 주인은 자기 아바타가 부당하게 죽었다며 쓰리디에게 `현피'를 선포했다.
공교롭게도 피살된 아바타의 주인은 폭력조직의 일원이었다.
그는 쓰리디가 부산에 있는 한 게임방 주인의 아바타임을 알아내고 동료들과 함께 게임방을 급습했다.
쓰리디의 주인은 폭력배들의 협박에 못 이겨 전설적인 자신의 아바타를 자진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리니지 중독증 논란이 확산된 것은 게이머들이 아바타의 힘을 높이는 장비를 현금으로 거래하면서부터다.
리니지 장비거래로 가계를 꾸려나간다는 게이머 부부, 아바타를 키운 뒤 팔아 한달에 30~40만원의 용돈을 벌어들인다는 중학생 얘기는 이제 게이머들 사이에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장비를 받고 돈을 떼어먹거나 남의 장비를 빼앗은 뒤 현실세계로 도망가는 사기행각도 빈번하다.
박아무개(29)씨는 얼마 전 하남에 있는 한 게임방에 갔다가 전주에서 올라왔다는 고등학생 두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그 게임방 IP를 쓰는 게이머에게 `칠요판'을 넘겼는데, 그가 돈을 지불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칠요판'은 현금으로 팔면 30만원을 호가하는 방어기구. 그들은 게임방을 샅샅이 훑었지만, 끝내 `사기꾼'을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갔다.
리니지의 중독성이 폭력성으로 발전하는 데는 우리나라 게이머들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2년 동안 리니지에 빠졌었다는 김아무개(25)씨는 “리니지 사회의 폭력이 점점 심해지는 데는, 게임 자체의 문제보다는 우리나라 게이머들의 폭력적 성향이 더 크게 작용한다”고 진단한다.
울티마온라인 등 다른 머그게임에서도 우리나라 게이머들이 다른 나라 게이머들보다 훨씬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미국사람들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협력하는 것을, 일본인들은 넓은 집을 사고 아기자기한 삶을 꾸리는 것을 좋아하는 데 반해, 한국인들은 자신의 힘을 키우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지적이다.
현실에서 충족시키지 못한 욕망을 아바타를 통해 채우려는 대리만족 욕구는 온라인 채팅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채팅의 중독성도 게임 못지않다.
다음은 한 정신과 의사가 웹진 <임펄즈> www.impulse.medigate.net에 올린 캐릭터 채팅 체험기다.
“복도 양 옆을 따라 아바타들이 시체처럼 걸려 있다.
나의 코드네임은 `클리푸니', 나의 아바타는 수염 긴 할아버지다.
나는 사이버공간에서 클리푸니로 다시 태어난다.
`눈물'이란 이름의 방으로 들어간다.
벽지는 온통 눈물 천지다.
방 한가운데 망토를 걸치고 머리는 펑크스타일을 한 여자 아바타가 서 있다.
이름은 `콜리'. 나를 보자마자 시선을 모은다.
모니터에 `도와주세요'라는 말이 찍힌다.
자기는 지금 울고 있단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접속한 20살의 이 아가씨는 매일 이 방에서 한 남자와 섹스를 했다고 한다.
문자로 전하는 성행위 과정이 너무 현실적이다.
상대는 미시건에 사는 스티브. 약혼자가 있는 콜리는 스티브와의 사이버섹스를 통해 난생 처음 오르가즘을 경험했다고 한다.
약혼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스티브에게 헤어지자고 했더니 뒤도 안돌아 보고 가버렸단다.
난 콜리에게 조언한다.
현실과 가상세계를 구분하길.” 정신과 의사가 아바타를 치료할 날이 올지도 박광배 충북대 교수(심리학)는 이런 현상을 글과 필자의 관계에 빗대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치관과 상관없이 반정부적인 글을 써서 발표했다고 치자. 글 내용과 필자의 생각은 다르지만 읽는 사람들은 글에서 본 내용대로 필자를 지각한다.
글과 필자는 분명 별개인데도. 나중에는 필자 스스로 그것이 자기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게 된다.
”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그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듯, 자신의 정체성도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아바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작용한다.
아바타의 행동과 말은 시나브로 현실 속 주인의 자아를 구성한다.
가상존재와 실재가 별개한다는 인식이 아주 확실하게 박혀있지 않는 한, 가상공간을 지배하는 성향은 현실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다.
머잖은 장래에 경찰관이 사이버공간을 순찰하고, 정신과 의사가 사이버 아바타를 치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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