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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바둑기사 김승준 9단의 특별한 도전
프로바둑기사 김승준 9단의 특별한 도전
  • 이재식 기자
  • 승인 2022.11.15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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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을 대상으로 바둑 지도를 하고 있어

[이코노미21 이재식] 한국기원 소속 프로바둑기사 김승준 9단(이하 ‘김승준’)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다. ‘프로바둑기사에게 영어소통이 왜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들겠지만, 김승준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바둑 지도를 하고 있어 영어가 필수다.

김승준이 외국인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바둑도장의 이름은 BIBA(Blackie's international Baduk Academy)다. BIBA에서 블랙키(Blackie)는 김승준의 별명인데, 흑기사(Black Knight)처럼 호전적인 기풍에다 얼굴까지 검은 편이라 그렇게 불리게 됐다고 한다. 김승준은 유럽의 팬들이 붙여준 ‘블랙키’라는 별명을 좋아한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BIBA를 방문했을 때 외국인 4명이 둘러 앉아 대국 겸 바둑공부를 하고 있었다. 홍일점 러시아 소녀 소냐는 중학생(15살)으로 현지 바둑 선생님으로부터 강력한 권유를 받아 두 달간 바둑을 배우러 한국에 왔다. 기자는 소냐를 두 번째 보는 것이었는데, 첫 번째 만남은 다른 바둑도장이었다. 스승이 바둑을 두는 동안 쉴 새 없이 러시아어로 통화를 하고, 대국 중에 상대가 장고하면 몸을 뒤틀며 지루해 하는 전형적인 중학생 여자아이였다. 바둑을 배우는 것이 좋으냐고 물어봤더니 천진난만하게 웃기만 한다. 다른 일에 관심이 별로 없고 대부분의 시간을 바둑공부로 보내는 소냐의 기력은 아마 1단, 온라인에서는 3단이다.

마침 수업 중이어서 김승준에게 어떤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문제 풀이, 그룹 스터디, 복기, 대국 등을 매일 서로 협의해 진행한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호세, 프랑스에서 온 플로랑은 한국어를 잘 한다. 호세는 아르헨티나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하던 중 일 년 동안 안식년을 받아 한국에 온 지 한 달 되었고, 33시간 걸려서 왔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만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한국에 공부하러 올 가치가 있는지 물었더니 당연하단다.

김승준 프로기사가 외국인들에게 바둑 지도를 하고 있다,<br>
김승준 프로기사가 외국인들에게 바둑 지도를 하고 있다,

호세는 바둑을 배우는 과정에서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바둑인 페르디난도 아길레라 아마7단에게 지도를 받았는데, 아길레라가 누구인가? 그는 바둑계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비록 도요타 덴소배 8강전에서 이창호 9단에게 패했지만, 일본 프로 9단을 두 명이나 이기고 올라간 그의 실력은 바둑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르헨티나는 한국 여자프로기사 이영신 6단과 도은교 초단이 바둑 보급 활동을 한 적도 있는 국가라 한국과의 바둑 인연이 제법 깊다.

레미는 캐나다인이다. ‘캐나다에서 바둑 배우는 사람이 많은지와 도장이 있는지?’를 물어 봤다. 레미가 거주하는 몬트리올에 100명 정도의 바둑 인구가 있으며, 20명 정도가 자주 모여서 바둑을 둔단다, 특히 한국기원 소속 여자 프로기사 김윤영 5단이 몬트리올에서 해외바둑보급 활동을 했고, 한국기원이 바둑판 등 용품도 많이 지원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커피숍에서 바둑을 뒀지만, 그 곳이 영업을 중단하는 바람에 지금은 고등학교의 공간을 빌려서 바둑을 두고 있다. 김윤영이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온라인 대국을 통해 지도해 주고 있다고 거드는 김승준에게 레미의 기력을 물었더니 자신과 2점으로 잘 버티는 수준이란다. 프로기사에게 2점으로 버티는 것은 대단한 실력인데, 소냐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이 다 2점으로 버티는 수준이라고 하니 대단한 실력들이다.

프랑스인 플로랑이 바둑을 접한 시기는 십년 전, 프랑스에는 바둑 클럽과 지도자가 많은 편이다. 카페테리아나 펍에서 바둑판을 비치해뒀다가 약속한 날 모여 바둑을 배우고 즐기기도 하지만, 플로랑은 온라인으로도 바둑을 배운다고 했다. 김승준으로부터 1년간 바둑을 배운 적이 있고, 이번에는 제17회 국무총리배 바둑대회(KPMC) 참가와 겸해 한 달 반 정도 지도를 받기 위해 대회가 끝난 후 남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부산과 제주도 관광도 계획돼 있어 설렌다고 플로랑은 활짝 웃었다.

김승준의 제자 3명은 이번 국무총리배 바둑대회에 출전해 2명은 8등과 11등, 4승 2패로 상당히 좋은 성적을 냈고 소냐는 불참, 호세는 등위에 들지 못했다. 한국, 일본, 대만 출전 선수들이 강하고(중국은 올해 불참) 홍콩이나 태국, 미국과 캐나다도 상당히 성적을 잘 내는 편이라 저 정도면 훌륭하다고 평가를 받는단다.

김승준이 2011년부터 외국인을 대상으로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선배였던 이기봉 아마 7단이 운영하던 IBA라는 외국인 대상 도장이 경영난으로 운영을 중단하면서부터였다.

IBA에서 수업을 받던 3명의 학생들이 디아나 초단(헝가리 국적,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을 통해 당장 갈 곳이 없다며 부탁하게 된 것이 BIBA의 시작이었다. 디아나는 IBA에 자주 가서 어울리고 무료지도도 했는데, 지금은 김승준을 도와 실질적으로 BIBA를 같이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 프로기사들이 외국에 나가서 바둑을 보급하는 것은 흔한 일이어도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바둑을 배우는 것은 드문 일이다. 물론 정치적 이유로 한국기원 소속이 되었던 루이나이웨이 9단이나 일본의 나카무라 스미레 3단처럼 한국으로 바둑 유학을 온 경우가 있었지만, 김승준처럼 외국인을 불러 들여 프로기사가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경우는 없었다.

당시 김승준은 양재호 감독이 이끌었던 아시안게임 남자부 코치를 맡고 있어 정신없이 바빴지만 그 아이들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들에게 한 달에 얼마 정도를 낼 수 있는지 물어봤더니 돌아온 대답은 20만원,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으나 김승준은 왕십리에 작은 집을 구해 그들이 한국에서 바둑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된다. 수업 장소는 같이 연구실에서 공부했던 양건 9단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한 명은 사발면 한 그릇만 먹고 하루를 버티니 피골이 상접해졌고, 다른 한 명은 공부에 열성을 보이지 않는 등 도장을 지속하는 문제로 김승준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그 무렵 외국에서 한국으로 바둑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과 소통을 맡고 있었던 디아나에게 칠레에서 희소식이 날아왔다. 한국에 바둑을 배우러 오고 싶다는 사람들이 몇 명 생긴 것이다. BIBA는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어떤 때는 2명, 어떤 때는 10명의 수강생들이 들쑥날쑥해 돈이 되지는 않지만 해외바둑보급에 대한 사명감과 자기 만족감으로 김승준은 버텨 왔다고 했다. 다행히 디아나가 유럽에서 잘 알려져 있는 덕에 바둑 공부를 희망하는 외국인들로부터 연락이 많이 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번에는 국무총리배 바둑대회에 참가하러 오는 사람들 요청으로 두 달 정도 임시로 오픈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장기간 공백이 컸던 터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당장 지금 지도 받고 있는 4명이 돌아가면 다시 문을 닫아야 한다. 이후 다시 문을 열려면 기숙사를 별도로 준비해야 하고, 한국인들과 다른 시설의 요구로 인해 비용도 많이 든다.

물론 수강생들이 국내 도장 수준의 비용은 지불하지만 이익을 남긴다고 보기에는 민망한 수준이다. 그나마 요즘은 달러가 많이 올라 물가 수준에 맞춰 비용을 올려 받지 않아도 됐다고 김승준은 해맑게 웃는다.

프로기사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김승준은 도무지 돈을 버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거 같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지원도 받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본인의 돈이 더 들어갔다. 김승준은 “하다보면 돈을 떠나 손이 가고 도와주고 싶은 게 있게 마련이어서 돈을 벌기가 어려운 구조가 된다”고 말했다.

김승준이 10년 이상 운영해 본 결과, 정부나 유관기관의 지원이 없는 이상 상시 오픈은 구조적으로 힘들다고 한다. 김승준은 매년 국무총리배 바둑대회가 열리는 9월말 경을 전후로 지금처럼 2개월간 임시 오픈해 각국의 대표선수들이 2주일~2개월간 마음껏 한국에서 공부하며 한국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다.

김승준에게 외국인과의 사제관계에 대해 물었더니 “도장 등에서 의미하는 사제관계란 약간 동양 문화와 관련된 건데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 않고 제자들이 부를 때도 그냥 ‘블랙키’라고 부른다”면서 “처음에는 약간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사제라는 리스펙트를 주는 건 많아 위안도 된다. 지금은 그냥 편하게 친구처럼 지낸다”고 말했다.

외국인에게 바둑을 가르칠 수 있는 인력과 환경이 되어 있는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 정도인데 실질적으로 한국이 가장 적합하다는 게 바둑계의 평가다. 정부와 유관기관들의 많은 관심과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코노미21]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바둑을 배우러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바둑을 배우러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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