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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국민·주택 통합 ‘산넘어 산’
[포커스] 국민·주택 통합 ‘산넘어 산’
  • 이희욱 기자
  • 승인 2001.08.1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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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은행장 선임 이후 또 불협화음… 국민은행, 독자생존에 강한 미련
1999년 12월22일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이 공식 발표됐다.
양측 노조는 즉각 반발 성명을 내고 파업에 돌입했다.
같은 날 저녁 8시. 파업 장소인 국민은행 일산연수원에 모인 양측 노조는 힘찬 포옹을 하며 합병 저지를 위한 결의를 다졌다.
이로부터 7일 뒤인 29일 오전에 파업철회 성명을 내기까지 두 은행을 포함한 9개 시중은행의 연대 파업은 ‘뜨거운 동지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7월26일 국민·주택 합병은행장으로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선임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행장 선임 발표 후 10여일이 흐른 뒤 찾아간 주택은행 노동조합 사무실은 비교적 차분한 가운데 향후 투쟁일정을 차근차근 점검하는 모습이었다.
사무실은 조용했고 전임 노조원과 집행부 몇명이 남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같은 날 찾아간 국민은행 노조 사무실은 첫 인상부터 긴박한 분위기를 풍겼다.
건물 입구에는 합병추진위원회(이하 합추위) 위원을 규탄하는 문구가 걸려 있었고, 사무실에는 상기된 표정의 간부들이 장시간 회의와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어지러운 플래카드와 페인트통, 책상 가득 쌓인 전단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인스턴트 식품 봉지들…. 그날 국민은행 노조사무실의 불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처음 국민·주택 양쪽 은행의 합병 소식이 발표됐을 때만 해도 양측의 거센 반발 속에서 국민은행은 내심 상대적 우위에 따른 ‘떡고물’을 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은행의 합병 지분은 61 대 39로 국민은행이 1.5배 이상 높았고, 전산 시스템 개발 현황이나 고객 수, 업무 영역 등 여러가지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이 열리고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합병 은행장에 선임되자 국민은행쪽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IT·영업점 통합, 인원감축 초미 관심사 국민은행의 위기감은 크게 세가지 이유에서 비롯한다.
근본적인 위기의식은 합병은행장이 주택은행쪽에서 나왔다는 결과 자체에 있다.
합병추진 초기에 통합은행의 존속법인을 두고 두 은행 사이에 의견대립이 있었다.
양측 은행 모두 소매금융 중심의 우량은행이라는 자부심이 강한데다 시장점유율도 1, 2위였다.
따라서 존속법인을 어느 은행으로 하느냐가 향후 합병 주도권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하지만 4월23일 합병계약 체결시 한쪽 은행을 존속법인으로 하는 대신 신설법인을 만든다는 결정이 나자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어느 은행에서 행장이 선임되느냐가 향후 주도권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 것이다.
합병은행장 선임을 둘러싸고 치열한 기싸움을 하는 가운데서도 우세한 지분을 바탕으로 내심 자신감을 보였던 국민은행쪽은 김정태 통합은행장이 선임되자 “지분 비율을 무시한 불합리한 선택”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합추위가 중재에 나서 양쪽 의견을 조율하고 있긴 하지만 국민은행측의 불만과 반발은 합병으로 가는 데 지속적인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합병 이후 추진될 예정인 영업점 통합과 그에 따른 인원 감축이 우선 초미의 관심사다.
두 은행이 합병을 하면 자산규모 162조6382억원의 슈퍼은행이 된다.
‘국제경쟁력 강화’라는 측면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비대해진 덩치를 효율적으로 운영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려면 비용절감을 위한 각종 조치를 실시해야 한다.
김정태 행장은 취임사에서 “합병 이후 단계적인 점포통합과 인원감축이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주택은행은 이미 IMF 사태가 터진 직후인 98년 두차례에 걸쳐 3500명을 감원한 상태다.
은행 경영진이나 노조측 모두 “지금 상태로도 인원이 오히려 부족한 상태”라며 당분간 감원이나 명예퇴직은 없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반면 국민은행은 8월9일부터 명예퇴직자 신청 접수에 들어갔다.
감원에 대한 불안감은 고스란히 국민은행 직원에게 떠넘긴 셈이다.
주택은행 관계자는 “내부조사 결과 주택은행에서도 희망 퇴직을 받는다면 신청하겠다는 사람이 다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히고 있으나, 실제 인원감축에 따른 피해는 국민은행측에서 부담할 형국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은 양측 은행의 정보기술(IT) 부문 통합문제다.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통합 행장에 선임된 이후 합추위는 11월1일로 예정된 통합은행 탄생을 위한 조타수로 ‘집행소위원회’를 구성중이다.
문제는 집행소위원회를 이끄는 집행위원 구성이다.
합추위 관계자에 따르면 인사 관련 업무는 국민은행, IT 통합 업무는 주택은행쪽이 담당하기로 잠정 결정했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통합 은행의 주요 ‘브레인’을 결정하는 인사 관련 업무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국민은행쪽은 “인사 관련 업무는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할 뿐 통합 이후 업무 진행에 중요한 IT 통합 업무는 주택은행쪽이 모조리 차지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시너지 효과 못 낼라” 우려도 두 은행은 국내 시중은행 중 IT 시스템 규모나 예산 투자, 이용자수 등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다.
국민은행은 11월을 목표로 ‘차세대 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주택은행 또한 2002년 완성을 목표로 신시스템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전산 시스템이 은행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합병 이후 채택될 시스템이 어느 은행을 모델로 하느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이다.
업계에서는 장기신용은행을 인수할 때의 노하우나 한발 앞선 준비 등을 이유로 국민은행의 전산 시스템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
국민은행 노조 관계자는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구조조정의 수치가 전부는 아니다.
국민은행의 앞선 전산시스템 운영에도 불구하고 주택은행쪽이 IT 통합 업무를 맡는다면 결과는 뻔한 거 아닌가”라며 “결국 국민은행 출신의 영업점 직원은 상대적으로 업무 적응력이 떨어지고, 이는 향후 인사고과나 업무능력 미달 등 잠재적 불이익으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강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이런 국민은행쪽의 불만에 대한 주택은행의 항변도 만만치 않다.
행장 선임에 대해 주택은행은 합병 은행의 간판을 국민은행에 내준 것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은행명을 양보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손해를 봤다”는 것이다.
IT 통합 문제 또한 향후 시스템 구축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기우에 불과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김정태 행장은 “내가 주택은행장에 선임됐을 때도 노조원의 반발이 있었다.
어차피 오해에서 비롯된 불만은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냐”라며 국민은행쪽 반발에 애써 느긋해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변수는 있다.
합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집행소위원회 이하 실무위원회 구성도 합병 추진 과정에서 일부 변경될 소지가 있다.
이러한 일련의 불협화음에 대해 합추위는 국민은행이 ‘우리 사람’이 행장에 선임되지 않은 것에서 파생된 정서적 위기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양측의 의견을 조절해 합리적으로 실무위원을 배분함으로써 안정된 통합은행을 출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따라서 통합 은행의 완성된 조직체계는 아직도 ‘화룡점정’을 기다리고 있는 단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택은행의 한발 앞선 행보는 ‘점령군’으로서 고지를 선점하려는 포석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고 국민은행측은 말한다.
국민은행은 “독자생존도 충분히 가능한데 합병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점포 정리와 인원 감축을 단행할 것”이라며 여전히 독자생존에 강한 미련을 보이고 있다.
애널리스트들은 “합병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직원끼리 융화이다.
한빛은행 사례에서도 보듯이 출신에 따른 파벌 나누기나 ‘한 지붕 두 노조’와 같은 기형 시스템이 이루어질 경우 합병 이후에도 업무 시너지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결국 부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며 현재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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