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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차세대통신 패권 짝짓기 붐
[일본] 차세대통신 패권 짝짓기 붐
  • 함석진/<한겨레> 국제부
  • 승인 2001.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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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휴 움직임 자국내 경쟁사까지 확산… “파트너 인수·합병 이어질 것” 관측도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라.” 요즘 일본 이동전화 단말기 업체들은 이런 특명이라도 받은 듯 움직임이 부산하다.
일본은 아직도 세계 전자제품 시장에서 ‘1대 군주’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이동전화 단말기 시장에서만은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일본 기업들은 그 ‘불균형’을 시정하려고 한다.
시장이 죽어 ‘골리앗’들이 휘청이고 있는 바로 지금이 다시 없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타게 요시히데 츠바사증권 선임연구원) 마쓰시타·NEC, 단말기 공동 개발키로 지난 8월20일 일본 이동전화 단말기 분야 1·2위 업체인 마쓰시타와 NEC의 중역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두 업체가 모처럼 자리를 함께한 것만으로도 흥미를 끄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두 업체는 시잠점유율 격차를 기준으로 볼 때 서로 5%포인트 이내에서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말 현재 시장점유율은 마쓰시타가 26%, NEC가 23%였다.
두 업체는 이 기자회견에서 3세대 이동전화 단말기와 소프트웨어를 함께 개발하고, 판매망도 공동으로 구축하는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고 발표했다.
지금보다 휠씬 빠른 속도로 엄청난 멀티미디어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는 3세대 단말기에는 여러가지 어려운 응용기술들이 필요하다.
기술개발에 들어가는 돈과 시간을 아끼면서 서로의 장점을 활용해 세계 최고수준의 단말기를 만들어 내겠다는 계획이다.
ING베링스의 분석가인 리처드 추는 “제휴 상대방을 외국업체가 아닌, 국내 경쟁업체로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상황이 급박한지 알 수 있다”며 “일본 업체들이 이제 ‘독기’를 내뿜기 시작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번 제휴로 마스시타는 NEC의 회로 및 배터리 기술을 제공받고, NEC는 마쓰시타의 ‘파나소닉’ 브랜드와 유통망의 강점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두 업체는 세계시장을 공략한다는 방침이다.
이미 일본 업체들은 외국 업체들과의 제휴도 활발히 추진해 오고 있다.
일본 시장점유율 6위 업체인 소니는 지난 5월 스웨덴 에릭슨과 이동전화 단말기를 공동생산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기술과 디자인은 좋지만 영업망이 부족해 시장에서 그다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소니와, 세계적인 유통망을 갖추고도 소비자들의 섬세한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는 기술적 한계를 안고 있는 에릭슨이 손을 맞잡은 것이다.
이를 두고 세계 언론은 ‘보기 드문, 절묘한 궁합’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두 업체는 오는 10월 영국 런던에서 직원 3500명 정도의 합작사(소니-에릭슨모바일커뮤니케이션스)를 출범시킨 뒤 내년 상반기부터 공동으로 제품을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이 합작사는 북미,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에 걸쳐 있는 두 회사의 핵심 연구인력을 집결해 제품을 공동으로 개발하고, 그 제품을 하나의 상표로 시장에 내놓을 예정이다.
기술개발, 디자인, 생산은 물론 상품판매도 공동으로 하게 된다.
극심한 매출난으로 세계 시장점유율 3위 자리까지 독일 지멘스에게 내준 에릭슨은 비용절감을 위해 단말기 직접생산을 포기하고 모든 물량을 외주로 돌리고 있다.
전 세계 직원의 5분의 1인 2만2천명을 감원하면서 힘겨운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에릭슨은, 기술로 똘똘뭉친 소니와의 만남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분석가들은 에릭슨보다 소니쪽 전략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골드만삭스의 분석가 팀 모리스는 “기술과 디자인, 상표력을 가지고 제품의 주도권을 쥐게 될 소니에게 휠씬 더 큰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며 “에릭슨은 자사 영업망으로 소니의 제품을 팔아주는 꼴”이라고 말했다.
미쓰미시와 미국 모토롤라는 지난 4월 3세대 이동전화 단말기를 공동 개발·생산하는 합작사를 올해 안에 출범시키기로 했고, 노트북 컴퓨터의 ‘명가’ 도시바도 지멘스와 3세대 멀티미디어 단말기를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두 회사는 특히 전망이 좋은 이동전화 단말기와 노트북 컴퓨터의 무선접속기술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일본 최대 이동전화 업체인 엔티티도코모에 개인휴대단말기폰(PDA폰)을 공급하기로 한 샤프는 영국 브리티시텔레콤과 합작사를 설립해, 무선인터넷 단말기를 공동 생산하기로 했다.
교세라는 한때 단말기를 생산했다가 포기한 미국 퀄컴과 차세대 이동통신 단말기 개발을 위한 기술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 단말기업계 평정할지 주목 일본 업체들이 이처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배경에는 2세대 이동전화 시장에서 처참하게 실패했던 아픈 경험이 깔려있다.
일본은 아날로그 방식에서 2세대인 디지털 이동전화로 넘어갈 때 세계 주요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던 GSM(유럽방식)을 포기하고 독자적인 PDC, PHS 표준을 만들어 냈다.
한국이 미국 퀄컴과 손잡고 만들어낸 CDMA 방식은 세계시장의 확대에 따라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던 데 비해, 일본 방식은 단 한 나라도 채택하는 곳이 없었다.
일본 단말기 업체들은 결국 세계를 공략하기 위해 가장 좋은 기술 시험무대인 국내시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서 군소업체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3세대 이동통신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일부 핵심기술만 2세대 방식을 사용하는 전혀 새로운 기술인 3세대 이동통신 기술 앞에서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은 세계 시장의 80%를 쥐고 있는 GSM 방식에 뿌리를 둔 W-CDMA 표준으로 일찌감치 승부수를 띄웠다.
다른 나라 업체들이 2세대 장사를 하기도 바쁠 때 일본 업체들은 3세대 이동전화 시스템과 단말기 개발에 들어갔고, 그 덕에 이젠 세계 최고수준의 W-CDMA 기술을 보유하게 됐다.
엔티티도코모는 한번 연기하긴 했지만, 오는 10월1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차세대 이동통신 상용서비스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 회사는 3세대 서비스 콘텐츠를 일부 선보인 무선인터넷 ‘i모드’를 성공시키면서, 세계 최강의 W-CDMA 운용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단말기 업체들도 이를 바탕으로 탄탄한 기술력을 쌓았고, 이젠 유럽과 미국 업체들로부터 잇달아 구애의 손길을 받는 귀하신 몸이 됐다.
독일 이동전화 업체인 티-모바일의 푹스 짐머만 이사는 “일본 단말기 기술은 유럽보다 2년 정도 앞서 있다”며 “일본에서 가장 낮은 등급의 컬러액정 무선인터넷 단말기도 유럽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최고 등급의 단말기”라고 말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전략적 제휴로 판을 벌이고 있는 일본 업체들이 앞으로 적당한 시점이 오면 파트너들의 인수·합병을 시도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유럽 업체들은 이동전화 서비스 업계에서 시작된, 오랜 침체의 중병에 시달리느라 힘이 빠질대로 빠져있는 상태다.
수요를 일으켜줘야 할 대형 서비스 업체들은 차세대 이동통신 주파수 경매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서 이미 기진맥진해 있다.
그러나 다른 의견도 있다.
영국 신문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일본 업체들은 몇번에 걸친 실패의 경험으로 인해 유럽 부실기업을 인수하는 데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며 “제품 개발과 마케팅 등에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는 느슨한 연대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HSBC증권의 스튜어트 제프리 분석가는 “세계 경기의 흐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일본이 세계 단말기 업계를 평정할 것인지, 아니면 또 한번의 실패를 겪게 될지는 3세대 이동통신의 장래가 가려질 5년 안에 승부가 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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