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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빈민을위한 대금업
[서평] 빈민을위한 대금업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2.09.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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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마찬가지로 자비도 지나치면 감옥이 될 수 있다.
” - 무하마드 유누스


여기 존경받는 ‘대금업자’가 있다.
금리는 연 20%.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 수준에 상당하는 꽤 높은 이자다.
그의 ‘비즈니스 모델’은 이렇다.
“돈은 가난한 사람한테만 빌려준다.
돈을 빌려쓰려면 5명이 조합을 결성해야 한다.
원금과 이자는 조금씩 쪼개어 1주에 한번 갚는다.
” 한마디로 돈 없는 사람들한테 돈 빌려주고 매주 푼돈을 거둬들이는 사업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업을 벌였다간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한다고 욕먹기 십상이다.


그런 이에게 1984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이 돌아갔다.
85년엔 당시 미국 아칸소의 주지사 빌 클린턴이 조언을 청했다.
93년엔 세계은행 부총재 이스마일 세라젤딘이 돕겠다고 자원했다.
97년엔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부인, 소피아 스페인 왕비, 하타 스토무 일본 전 총리가 그의 ‘비즈니스 모델’을 세계적으로 알리겠다며 정상회담을 열었다.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 사업모델 소개


2002년 현재 그는 지점 1175개, 직원 1만2천여명, 대출잔액 3조3600억원짜리 대형 은행의 총재다.
일개 대금업자에서 출발해 방글라데시에서 가장 안정적인 은행의 총재이자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빈곤퇴치 운동 지도자가 된 것이다.
그라민은행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의 이야기다.


빈곤을 퇴치한다면서 왜 그는 자선사업을 벌이지 않은 걸까. 왜 소액융자, 즉 대금업을 시작한 걸까.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자서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장경제 테두리 안에서 자본의 힘을 굳게 믿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사회보조금은 결코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보조금은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처해 있는 문제를 오히려 망각하게 만들고, 자립의지도 꺾는다.


그가 이런 신념을 가진 건 74년 엄청난 기아 현장을 목격한 뒤부터였다.
정부가 마련한 간이식당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넘쳐났고 시신은 도처에서 나뒹굴었다.
시신을 거둬들여 장례를 치르던 종교단체들조차 시체가 급속도로 쌓이자 중도에서 장례를 포기하고 말았다.
해외 원조금은 도로를 닦거나 다리를 놓는 따위,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장기적으로나 도움이 될 만한 인프라 구축에 쓰였다.
‘장기적으로’ 기다리다가 사람들은 죽어 나갔다.


치타공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며 ‘이론이 가진 아름다움과 조화에 감탄’하곤 했던 그는 회의에 빠졌다.
“길바닥에서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는데, 도대체 경제학 이론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대학 근처 마을에 갔다가 고리대금업자한테 돈을 빌리는 바람에 죽도록 일을 하고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알게 됐다.
그들의 빚은 모두 합해 미국돈 27달러. 그는 일단 그들한테 무이자로 돈을 꿔줬다.
이것이 그라민은행의 씨앗이 됐다.


그동안 그라민은행에서 융자를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 42%는 극빈에서 벗어났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융자를 받으면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상상 밖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 힘을 불러낸 건 ‘연대’였다.
“가난한 사람은 혼자서는 계획도 잘 세우지 못하고 실천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룹을 지어 행동할 땐 다른 사람의 도움도 받고 경쟁심도 생기기 때문에 융자를 받더라도 계획하고 실천하는 능력이 생긴다.
…연대 융자는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내부에 잠재해 있는 능력을 발견하고 일깨우게 만드는 수단이다.



연대식 융자로 빈곤탈출의 의지 심어줘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 부스러기사랑나눔회의 ‘신나는 조합’ www.joyfulunion.or.kr이 그라민은행 돈 5만달러를 종잣돈으로 빌려 그라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10개 모임 50여명이 융자를 받았다.
연리는 4%. 수익은커녕 조합 운영비조차 나오지 않는 금리다.
그래서 운영비는 씨티은행의 지원을 받고 있다.
조합 운영자도 금융전문가가 아니라 빈민운동가다.
신나는 조합은 소액융자 사업을 시작했다기보다는 소개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나라 소액융자 시장은 이미 ‘다른’ 소액대출 업체들이 장악한 상태다.
연리 20%대 현금 서비스의 인기가 폭발해 신용카드사들은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리고, 연리 70~80%대인 일본계 대금업체들은 비온 뒤 대나무처럼 쑥쑥 성장한다.
이들한테서 돈을 빌리지 못한 사람들은 더 비싼 금리로라도 돈을 빌리려고 음지의 사채업자를 찾아간다.


과연 그라민식 소액융자가 우리나라에서도 빈곤퇴치책으로 효험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과연 유누스의 바람대로 ‘가난이라는 말이 의미를 상실하고 박물관에나 전시되는 날’을 앞당겨줄 수 있을까.

그라민은행의 활동 이후에도 방글라데시는 여전히 북한, 몽골, 캄보디아와 함께 아시아 빈국 중 하나다.
30년 전 방글라데시와 같은 경제 수준이던 한국은 그라민 없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자 구매력 기준(PPP) 1인당 GDP가 1만5천달러가 넘는 부자나라가 됐다.


빈곤국에서 정치적 안정과 민주주의는 그라민식 소액융자보다 더 효과적으로 빈곤을 퇴치한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2000년 빈곤보고서는 빈곤의 주범으로 ‘잘못된 통치’를 꼽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도 독재체제가 고질적 굶주림의 원흉이라고 지적한다.
50년대 말의 대기근 때 공산당 독재정권 아래 있던 중국에선 3천만명이 죽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40년대 인도에선 300만명이 죽었다.


그런데도 유누스의 처방에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이는 건 민주주의나 사회복지, 시장경쟁 시스템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라민 프로젝트는 현재 여섯 대륙 58개국에서 이행되고 있다.
성공담은 물론 방글라데시와 경제여건이 비슷한 남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나라에서 더 많이 들려온다.
그러나 미국 시카고 빈민가, 노르웨이 로포텐섬 같은 부자나라, 복지국가의 변두리에서도 그라민 프로젝트로 경제적으로 재활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주로 여자들이거나 농민들이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빈곤을 퇴치하는 데엔 그만큼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어둠을 쫓는 새벽은 한가지 빛깔로 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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