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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한방 세계화·산업화 선언
[커버스토리] 한방 세계화·산업화 선언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2.10.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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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이제마의 후예들’이 한방 벤처를 차리고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30여개 업체가 모여 ‘한방벤처기업협의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동의보감> 등 한의서에 나오는 내용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창업 소재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방 벤처를 둘러싼 제약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의료시장이 개방되는 2005년부터는 중의학에 치여 피기도 전에 시들 위협에 처하게 된다.


세계 대체의학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한방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한방 벤처의 사정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
이런 상태라면 한방 신약이 해외시장은커녕 국내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우려가 높다.
손영태 한방벤처기업협의회장은 “정부가 그동안 테헤란밸리에 쏟아부은 돈의 100분의 1만 한방 벤처를 지원했더라면 지금쯤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력 있는 한방 벤처의 육성은 이제라도미룰 수 없는 과제다.




얼마 전 한방 벤처 업계에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천연물 신약의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동의보감>과 <본초강목> 등 전통한약서 12종의 처방을 신약으로 개발할 경우 안전성과 유효성 검사를 면제해주기로 한 것이다.
수천년간의 임상체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전통 한방을 제품화해 세계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넓어진 셈이다.


그동안 식약청은 한방 신약에도 양약의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 한방 벤처기업들이 신약을 개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우선 까다로운 심사단계를 모두 거치려면 벤처기업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투자비용이 들어갔다.
단일성분으로 분해가 가능한 화학성분의 양약과 복합성분의 한약을 같은 잣대로 판단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 때문에 많은 한방 벤처들이 수지가 맞지 않는 신약보다는 손쉬운 건강식품 개발에만 매달려왔다.
이런 여건에서는 제대로 된 한방 벤처의 성장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신약 허가제 완화로 상품화 쉬워져

10월11일, 한약, 생약 등 천연물 신약 개발을 촉진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과 함께 8월1일부터 바뀐 새 허가제도의 세부내용에 대한 설명회가 열린 국립보건원 대강당은 각 업체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붐볐다.
한방 벤처뿐 아니라 제약회사, 식품회사, 화학회사 등도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모두 신약 개발을 가장 중요한 미래 전략산업으로 삼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약 개발은 누구나 쉽게 뛰어들 수 있는 영역이 결코 아니다.
신약 개발에는 오랜 연구개발 시간과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 투자가 필요하다.
성공할 경우 약품 한종으로 수십조원의 이득을 챙길 수 있지만 실패하면 엄청난 투자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박종언 대한한의사협회 자문위원은 “모건스탠리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신약 개발에 투자되는 돈이 한해 평균 36조원에 이르지만, 미 식품의약청(FDA)에서 신약으로 최종 허가를 받는 것은 평균 30개에 불과하다”며 “기존 제약회사들이 한방에 관심을 갖는 것은 투자비를 대폭 줄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장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독성연구 과정이다.
화학성분으로 만들어진 양약은 독성과 부작용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반면 한방은 오래 전부터 무수한 처방을 통해 이미 안전성과 유효성을 확인받았다.
천연물 신약 허가제의 완화로 이러한 한방의 경쟁력이 더욱 주목받게 됐다.


식약청 한약담당계 채규환씨는 “많은 한약제품이 일반의약품으로 허가받지 못해 건강식품으로 유통되던 문제점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본다”며 “천연물 신약의 개발이 쉬워진 만큼 관련 기업들도 전통 한방 처방을 상품화해 120조원으로 추산되는 세계 한약·생약 시장에 적극 진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변화는 한방 벤처 입장에선 기회이자 위기라는 양면성을 갖는다.
전통 한약서의 처방을 그대로 제품화하는 것은 실제로 그다지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표준화된 제품 생산에선 거대한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더 유리하다.
자칫하면 경쟁에서 밀려날 수도 있는 것이다.


여전히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한방 벤처들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진다.
배현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교수는 “한방 벤처의 아이덴티티가 모호한 상태”라며 “한약재를 이용해 건강식품을 만들면서 한방 벤처라고 내세우는 업체들이 많다”고 말했다.
주로 방문판매에 의존하는 건강식품 업체의 난립은 정상적 한방 의료시장을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전통 한의학에 대한 신뢰도 떨어뜨린다.



양방 비하면 정부투자 턱없이 부족


이런 가운데 한방벤처들이 최근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자, 보건복지부도 10월1일 ‘중장기 한방육성대책기획단’ 전체회의를 열었다.
4월말 출범한 기획단은 한의학을 고부가가치 생명자원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구체적 전략을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기획단 안에는 △국내 한방의료 및 세계 대체의학 시장에 대한 현황분석 △한방치료기술의 발전방안 마련 △한방의 대중화 전략 수립 △한방 벤처 육성 및 한약 유통체계 개선방안 연구 △WTO 협상대비 전략 마련 △한의관련 제도 개선 모색 등을 담당하는 6개 실무팀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12월 최종안 제출 시한을 앞두고 중간점검을 위해 열린 이날 회의에서도 구체적 논의의 가닥을 잡지 못했다.
황중택 보건복지부 한방의료담당관실 사무관은 “심층적 논의가 필요한 과제들이 많아 연내에 활동을 끝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며 “외부에서 생각하는 만큼 작업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구체적 정책 도출보다 민간 전문가들의 다양한 의견과 아이디어를 수렴한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분위기다.


기획단 ‘한방의 세계화팀’ 총괄전문위원을 맡고 있는 신현규 한의학연구원 경영기획실장은 “여전히 정부의 관심이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깝다”며 “먼저 객관적 분석을 근거로 한방을 국가 전략사업으로 육성할 가치가 있는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만약 투자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에 상응하는 과감한 투자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볼 때 기획단의 활동에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렵다는 성급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한방육성 대책 수립이 쉽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한방과 양방의 위상 설정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방측에서는 현행 의료체계가 지나치게 양방 위주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배현수 경희대학교 한의과대 교수는 “한방치료에 대해 건강보험공단이 지급하는 보험료 총액이 1년에 400억원에 불과하다”며 “웬만한 제약회사의 진통제 한품목만큼도 안 되는 규모”라고 말했다.
그만큼 한방치료가 건강보험의 적용을 못 받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비 지원 규모에서 나타나는 불균형은 더 심각하다.
한방 분야에서 유일한 국립 연구기관인 한의학연구원의 1년 예산이 30억원에 불과하다.
한방벤처기업협의회 손 회장은 “한마디로 국책연구소라고 하기에는 창피한 수준”이라며 “중의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투자를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방 분야에 지급되는 정부지원 연구비는 ’한방치료기술연구개발사업’에 주는 25억원이 전부다.
양방에 비해 연구기반이 턱없이 취약한 것이다.


한방 벤처의 영세성도 해결해야할 과제다.
한방 벤처는 한의사들이 자신의 비방을 기반으로 산발적으로 창업한 경우가 많아 소자본에 소규모 업체가 대부분이다.
이러다 보니 제대로 된 연구능력을 갖춘 한방 벤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신현규 한의학연구원 경영기획실장은 “이들이 한약을 고부가가치 바이오 제품으로 재탄생시키길 기대하는 것은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 “체질의학 독특, 경쟁력 있다”


한방 벤처의 영세성을 극복하고 연구능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기금조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한방 벤처의 영세성을 인정하고 좀더 현실적 전략을 선택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고도의 생명공학기술을 도입해 한방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 한방을 일반인들이 좀더 접근하기 쉽도록 대중화해 보급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약 처방을 건강식품화하는 것을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중국은 사회주의화 이후 중의학의 과학화와 산업화를 꾸준히 추진해왔다.
싼값에 의약품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중의학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의 전통의학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등 세계시장 진출을 겨냥해 한약 품질관리제도를 정비하는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05년 국내 의료시장이 개방되면 값싼 중의학 제품들이 대거 밀려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많은 한방 벤처 관계자들은 한방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손영태 한방벤처기업협의회장은 “중의학은 이미 자기 정체성을 상실했다”며 “전통 의학의 본 모습을 지키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뿐이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독특한 체질의학이 있다”고 말했다.
우수한 인재들이 한의학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도 커다란 경쟁력이다.
한의학의 교육, 면허, 시술은 모두 법제도로 규정되어 있다.
전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다.
한방 벤처의 미래도 바로 이들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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