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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억 어린 80년대로 나 돌아간다
[영화] 추억 어린 80년대로 나 돌아간다
  • 임범/ <씨네21> 기자
  • 승인 2003.01.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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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 영화의 키워드 중 하나가 ‘80년대’였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 '남자 태어나다' '몽정기' '묻지마 패밀리'…. 특징적인 건 이들 영화에 나오는 1980년대가 한결같이 정치가 실종, 또는 배제된 공간이라는 점이다.
선거포스터, 국기 하강식 등 당시 정치문화의 구성요소들이 비치지만, 전체 텍스트에 관여하는 특별한 함의가 없다.


이 영화들이 모두 성장영화인 데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일 수 있지만, 그래도 '친구'와는 다르다.
'친구'도 성장영화적 요소가 있지만, 거기에 등장한 80년대는 그때 정치·사회 문화의 구체적 무게감으로 인물들의 성장에 관여했다.
반면 올해 나온 영화들의 80년대는 수치만 ‘80’일 뿐 누구나 겪는 보편적 성장의 무대에 가깝다.
인물들은 거기서 사랑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사회에 나가길 주저하고 용기를 얻기도 한다.
밖에선 격렬한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10년 넘게 지나도 정치사로만 반추되는 그 시대에,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가 자기들의 성장기를 자기 손으로 다시 쓰겠다고 외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마침 이들 영화의 감독들은 모두 80년대 중후반에 고교시절을 보냈다). 어쩌면 ‘386세대’라는, 다분히 정치적 수사에 가까운 표현 안에 자신들을 획일화해서 복속시키지 말라는 독립선언 같기도 하다.


'품행제로'는 그 독립선언의 정점 같은 영화다.
80년대를 소품으로 빌려와 성장의 추상적 공간을 구축한 건 비슷하지만, 앞의 어떤 영화보다 깔끔한 성장영화를 만들어낸다.
두번 낙제해 동급생보다 나이도 많은, 한 고등학교의 짱 중필(류승범)이 우등생 민희(임은경)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그 사랑을 가지고 사회로 나갈 자신이 없다.
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무기력하게 배회한다.
마침 주먹 센 상만이 전학와서 짱의 자리에 도전한다.
중필은 결국 상만과 일전을 벌이지만 그 동기가 다르게 읽힌다.
자신을 믿지 못하겠고, 다른 모든 상황은 불확실하기만 한 데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 그걸 실어서 사력을 다해 싸운다.
이 결투를 영웅적 액션 아닌 아이들 개싸움처럼 그리면서 웃음과 비장함을 함께 빚어내는 연출도 인상적이다.


'품행제로' 같으면 토 달지 않고 지지하고 싶은 영화다.
코믹하게 기획된 영화 같지만, 그 안에 담긴 뼈와 가시가 예사롭지 않다.
성장의 불안함, 스산함, 울분이 있다.
그런데 그 세대만의 독자적인 느낌, 동시대성이랄까, 그런 기운은 확실히 약하다.
어떻게 보더라도 80년대는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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