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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세계경제 ‘수렁’ 동아줄은 없나
[커버스토리]세계경제 ‘수렁’ 동아줄은 없나
  • 이경숙 기자
  • 승인 2003.03.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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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체력 고갈에 설상가상 전쟁까지… 내재된 불확실성 많아 경기회복 요원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 3월12일 오전 10시, 가까스로 연결된 전화 통화에서 북핵과 경제 현안에 대한 대책을 묻자 한 청와대 관계자는 피곤과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날 저녁 6시 이후 밤 10시 가깝도록 그는 내내 회의중이었다.
“경제대책은 재정경제부에 물어보세요. 외교 문제는 외교통상부에 물어보시고요.”

전날인 11일, 국내외에서는 우리 경제의 향방을 좌우할 만한 뉴스들이 경제, 국제 가릴 것 없이 숨가쁘게 쏟아져 들어왔다.
이라크 전쟁 임박설과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 속에 한국과 일본의 주식시장은 바닥 없이 추락했다.
한국 종합주가지수는 미국 뉴욕 테러 이후 1년 반여 만에 다시 530대에 들어섰고 일본 닛케이지수는 20년 만에 8000선이 무너졌다.
무디스는 북핵 위기를 감안해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낮출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이라크전 관련 2차 수정결의안은 13일 이후로 표결이 연기됐다.
SK글로벌 채권단은 분식회계 혐의를 받고 있는 SK그룹 최태원 회장한테 계열사 소유지분 전량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가십성이지만 꽤 상징적 의미를 지닌 뉴스도 들려왔다.
김진표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장관이 국무회의에서 ‘가계 부채 현황과 대응방안’ 보고를 마치자마자 노무현 대통령한테서 “향후 추진 대책이 이대로라면 대책이 없다는 것이 아니냐”는 불호령을 들은 것이다.
대통령과 경제부총리는 법인세 인하와 관련해서도 언론에 엇갈린 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관료들이 다 맞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하고 한 경제학자는 입을 열었다.
“‘영(令)’이 안 서는 데 관료들인들 뭘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긴급한 상황에 그리 손발 안 맞는 티를 꼭 내야 하는지….”


이라크전쟁 끝나면 호시절 온다?


새 정권이 채 자리도 잡기 전에 긴박한 사건들이 불거져 나오면서 나라 안팎의 불협화음은 더욱더 높아지고 있다.
이라크와 북한 핵을 둘러싼 불확실성은 지난해 세계 불황 와중에 겨우 추스려놓은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새로 꾸려진 경제, 외교팀은 제각각 새로운 업무를 파악하고 당면 문제를 인식하기에도 바빠 팀워크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난데없이 재계 3위 그룹의 분식회계 사건까지 터져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이라크 전쟁만 치르고 나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희망의 빛은 강했다.
2월초까지 대다수 국내외 경제분석기관들은 이라크 전쟁이 단기간에 종결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소비와 투자심리의 회복, 각 나라 정부의 재정지출에 힘입어 경제 회복세가 빨라질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의 미국 경제 전망이 대표적인 예다.
CSIS는 이라크 전쟁이 원전시설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미국의 승리로 4~6주 만에 끝날 경우 전쟁을 하지 않을 때보다 경제성장률이 0.5%P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가상승폭은 상대적으로 작은 상태에서 정부 지출이 증가하고 불확실성이 제거되면 주식시장에 상승 랠리가 일어나고 투자와 소비가 선순환을 일으킬 것이라는 논지다.
세계의 시장, 미국 경제가 살아나준다면 세계경제 역시 연쇄적으로 회복세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순진하게 낙관하기엔 이젠 상황이 너무 복잡해져버렸다.
국내외 경제를 둘러싼 변수는 각 분석기관이 예측을 내놓은 지난해 말과는 또 다른 양상으로 바뀌었다.
소비, 투자 심리를 꽁꽁 얼린 전쟁 불안은 서서히 실물경제까지 침투해 전세계 경제의 기초체력을 갉아먹고 있다.
우리 경제 역시 1월부터는 설비투자추계지수, 생산증가율 등 실물경제 관련지표가 눈에 띄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전례없는 선공을 펼치려던 미국 부시 대통령은 나라 안팎의 반전 여론에 부닥쳐 리더십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
이대로는 전쟁을 강행하면 국제경찰로서 미국의 위상에, 전쟁을 포기하면 부시 정권의 리더십에 큰 충격이 가해질 전망이다.


좋다.
상황을 아주 낙관적으로 봐서 미국의 바람대로 미국이 단기간에 완승했다고 치자. 그래도 미국 경제를 불안 속으로 몰아넣을 불확실성은 남는다.
이슬람의 ‘피의 보복’ 말이다.
골드만삭스의 수석경제학자 짐 오닐은 이라크 전쟁이 끝나더라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타결, 중동국가의 경제회복과 정치 민주화 등 중동지역에 획기적 변화가 있지 않는 한 미국에 대한 테러 위협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채 해소되지 못한 불확실성은 또 다른 후유증을 낳을 것이다.



현재로선 ‘No War’만이 현명한 선택


3월5일엔 조지프 스티글리츠, 케네스 애로우, 로버트 솔로 등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7명을 비롯한 130여명의 경제학자들이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과다한 군사비 지출이 기술 등 민간부문 투자를 위축시키고 소비지출을 둔화시키는 한편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재정을 악화시켜 미국 경제를 더 깊은 수렁에 처넣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지난 90년대 엄청난 경제성장과 금융시장 확대, 전례없는 일자리 증대를 향유했다.
우리는 그 같은 성장을 냉전 종식 후에 온 ‘평화 배당금’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행하게도 ‘평화 배당금’ 대신 ‘전쟁 할증금’을 내고 있다.
전쟁은 이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미국과 세계를 위해 경제적으로 더 현명한 선택지는 ‘노 워’(No War)다.
미국의 조사회사 글로벌 인사이트는 후세인의 망명 등 예기치 못한 변수로 전쟁 없이 사태가 마무리되거나 전쟁이 일주일 내 초단기전으로 끝나게 되면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이 3.2%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2개월 이내 단기전일 때 세계 경제성장률은 2.8%인 것으로 예측됐다.
전쟁 없이 이라크 사태가 끝나주기만 한다면 미국이 추가 테러 위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어 불안 요소는 한결 줄어들고 경제성장도 힘을 받을 수 있다.
글로벌 인사이트는 이라크 사태가 전쟁 없이 마무리될 가능성이 20%, 단기전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60%, 현상 유지나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20%라고 내다봤다.


국내외 경제기관들은 어찌됐건 이라크 사태는 앞으로 3~6개월 정도면 제거될 불확실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미국이 전쟁을 하든 말든 사태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 사태가 종결되면 전쟁 논란에 묻혀 잊혀졌던 불확실성이 더 확연하게 드러날 것이다.
북한 핵 논란, 미국 정부의 재정 악화, 달러 약세, 가계 부채 부담 증가와 부동산시장 둔화, 미국 정부 경제팀의 정책 혼선이 그것이다.


미국 경제의 기초체력 회복 논란은 9·11 미국 테러 전부터 스티븐 로치 등 소수 경제학자들이 꾸준히 던졌던 것이었다.
이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그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주억인다.
리먼브러더스의 수석경제학자 애던 해리스는 미국 주택경기 둔화, 정부 재정 악화, 자동차 수요 감소, 최근의 주가하락으로 인한 마이너스 부(富)의 효과 때문에 올해 미국 경제성장률은 ‘크게 인심을 써봐도’ 2.3%에 머물 것이라고 내다봤다.


게다가 미국 경상수지 적자는 이미 GDP의 5%에 육박하고 있다.
이것을 털어내기란 만만찮다.
87~90년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를 대폭으로 줄였을 땐 달러화 가치가 26%나 폭락하고 전세계적으로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다.
더구나 달러 가치 하락이 경상수지 개선 효과로 나타나려면 통상 6분기 이상의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은행은 미국 경상수지가 당분간 더 악화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경상수지가 이러한데 달러 강세책을 쓰는 것은 무리다.



북핵 등 보이지 않는 위험 ‘수두룩’


달러 약세는 다른 나라에 경제적 타격을 입힌다.
경제연구원 강선구 연구원은 GDP 대비 수출 비중이 높은 나라, 특히 선진국에 대한 수출이 많은 나라가 더 큰 충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한국과 싱가포르가 그렇다.
유로 지역, 일본도 충격은 불가피하다.
단 중국은 예외다.
위안화 환율이 달러화에 거의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달러가 싸지면 중국 수출품은 덩달아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다.


이 와중에 원화는 아직 달러 약세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다.
북한 핵 때문에 원화가 달러화보다 더 약세를 보이고 있는 탓이다.
일종의 착시 현상이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그렇게 관조하기엔 중동지역 다음으로 ‘매’를 기다리고 있는 한반도의 처지가 너무 위급하다.


한국경제연구원 거시경제센터 허찬국 소장은 “지금으로선 외교가 가장 시급한 경제정책”이라고 말한다.
이번 사태로 투자자들이 한반도 위험을 93년보다 더 깊이 인식하게 돼 단순한 남북화해 제스처 정도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허 소장은 세계경제가 처한 불확실성을 다 해소할지라도 북한 문제는 우리 경제에 고스란히 남을 짐이라고 강조한다.


3월13일, 무디스는 한국 신용등급을 현행대로 ‘A3 부정적’으로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단 “한반도 긴장 고조는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높여 신용등급 하향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외교와 경제, 대책 수립과 실천을 따로 생각할 겨를 없이 돌아가고 있다.
한반도는 이미 이라크 못잖게 치열한 생존전쟁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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