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7:19 (목)
[특집] 중소형 은행 ‘마이너리그’
[특집] 중소형 은행 ‘마이너리그’
  • 장승규 기자
  • 승인 2003.05.0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형화 합류하거나 독자생존 갈림길…외국계 대주주와 먹이사슬 구조, 상황유동적

대형화 추세에 밀려 한동안 위축돼 있던 중소형 은행들이 ‘작지만 강한 은행’을 내세우며 적극적인 광고 공세를 벌이고 있다.
가장 먼저 불을 댕긴 곳은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한미은행. 한미은행은 지구보다 훨씬 큰 행성인 목성·토성·천황성을 연이어 보여준 뒤 과연 이 가운데 어디에서 살겠느냐고 묻는 내용의 TV광고를 내보냈다.
크기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없다는 도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살 수 있는 지구처럼 한미은행이 최적의, 알찬 은행이 되겠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다.
외환은행과 제일은행도 자신들만의 강점을 강조하는 독특한 광고를 선보였다.


중소형 은행들의 이러한 ‘튀는’ 행보가 관심을 끄는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 계속된 은행산업 재편의 최종적인 그림이 이들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1997년말 16개였던 시중은행은 대규모 퇴출과 인수합병을 거치면서 그동안 8개로 줄어들었다.
이 과정을 주도해온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 바로 대형화였다.
은행 수가 지나치게 많은 ‘오버 뱅킹’을 해소하고, 국제경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산 100조원이 넘는 수퍼 뱅크의 탄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시장 여건에서는 은행이 3~4개로 정리되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현재 은행권은 국민·우리·하나·신한의 ‘빅4’와 조흥·외환·한미·제일의 중소형 은행으로 양분돼 있는 상태다.
최종 단계에 들어선 신한은행의 조흥은행 인수협상이 타결되면, 나머지 중소형 은행의 입지는 더 좁아질 가능성이 크다.
자산 210조원의 ‘공룡’ 국민은행은 노마진 대출, 노마진 환전이라는 공격적인 영업으로 이미 거대은행의 위력을 충격적으로 보여줬다.
중소형 은행들은 이제 추가적인 짝짓기를 통해 대형화 흐름에 합류하거나, 확실한 특화전략으로 독자생존에 나서는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한편에서 정부의 은행 대형화 정책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대안연대 정승일 정책위원은 “대형화의 결과로 탄생한 국민은행이 가격 경쟁에만 치중하는 등 파행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하고 “대형화가 경쟁력 강화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비판한다.
정 위원은 지나친 집중은 소비자의 선택을 제한하고, 독과점으로 인한 폐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굿모닝신한증권 권재민 수석연구원은 “대형화 논의에는 정답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시티은행은 대형화를 통해 성공한 반면, 일본의 미즈호은행은 실패했다”며 “미국의 지역은행들처럼 작은 규모로도 높은 수익성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찬성 입장이나 반대 입장 모두 논거를 끌어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조정환 은행연구팀장은 은행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주장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조 팀장은 “외환위기 이후 은행 수가 크게 줄었들었 뿐 아니라, 은행과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던 종금사 등 다른 금융기관도 줄었다”며 “절대적인 숫자가 아니라 수익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일부에서 제시하는 그룹화 전략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금융연구원 김우진 연구위원은 “그룹화 전략은 은행을 국제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선도은행과 이들을 뒤따르는 성장형 그룹, 지역 틈새시장을 개척하는 지역화 그룹으로 나누어 각 그룹에 맞게 차별화된 성장전략을 추진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성장형 그룹에 속하는 은행들이 어떤 식으로 차별화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또한 이러한 그룹화 전략 역시 결국, 개별은행의 구체적인 경영전략과 맞물려 진행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조흥·외환·한미·제일 은행 등 4개 중소형 은행의 속사정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이다.
당장 조흥은행은 신한은행과의 매각 협상이 걸려 있다.
나머지 은행도 추가 합병의 유혹이나 압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갈 길을 확실하게 정한 상태라고 보기 어렵다.
한미은행의 대주주인 칼라일과 제일은행의 대주주인 뉴브리지는 만족할 만한 수익만 챙길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지분을 털고 나간다는 입장이다.
이들 외국계 대주주가 매각가치 극대화를 위해 합병을 선택할 경우 상황은 또 한번 달라진다.
외환은행도 상황이 유동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주가하락으로 손실을 많이 본 코메르츠은행이 지분 축소를 원하고 있고, 정부가 지분 매각을 서두를 수도 있다.
여전히 다양한 합종연횡의 가능성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한미은행-대주주 매각 불가피, 합병 ‘1순위’

중소형은행 가운데 합병설의 주인공으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곳이 바로 한미은행이다.
JP모건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35.73%의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계 투자펀드 칼라일이 지분 정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최근 한미은행 노동조합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직원들의 53.1%가 흡수합병의 가능성이 높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 대주주의 지분매각을 가장 많이 꼽았다.
독자생존이 가능할 것이라는 응답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한미은행 노동조합 권오근 부위원장은 “대주주의 지분 매각이 불가피한 지배구조상의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다만 그 지분을 누구에게 팔 것이냐가 문제”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국민·하나·신한 은행이 한차례씩 한미은행의 인수후보로 거론됐다.
하지만 올 들어서는 합병 논의가 쑥 들어갔다.
주가가 바닥권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칼라일은 3년 전 주당 5천원에 들어왔다”며 “어느 정도 수익을 챙기려면 최소한 주가가 두배는 뛰었어야 하는데, 지금 팔아서는 건질 게 별로 없다”고 분석한다.
한미은행의 현재 주가는 7천700원대에 머물고 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현재 은행업종이 전반적으로 저평가돼 있다”며 “은행업종이 턴어라운드해 주가가 올라가면 합병 논의가 재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영구 한미은행장도 얼마 전 기자회견에서 “국내경제 상황이 좋지 못해 칼라일이 프리미엄을 받기 어렵기 때문에 보유 지분을 매각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한미은행이 합병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데는 더 큰 이유가 있다.
한미은행은 BIS 자기자본비율이 12.11%로 시중은행 중에서 가장 높고, 고정이하 여신비율은 1.1%로 가장 낮다.
자산규모도 44조원으로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이고, 인원도 적은 편이다.
한마디로 매력적인 파트너인 것이다.
시티은행 출신으로 칼라일에서 영입한 하영구 행장은 2001년 70 대 30이던 기업대출과 가계대출의 비율을 2004년까지 50 대 50으로 맞춘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경품을 내걸고 신용카드 발급과 가계대출을 공격적으로 늘려 논란을 빚기도 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매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신용카드와 가계대출에만 주력하고 있다”며 “당장은 문제가 없겠지만, 결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한미은행은 올 1분기 실적이 저조한 것으로 나오자, 경영 효율화의 고삐를 다시 한번 죄고 있다.



제일은행-자본금 넉넉, 합병 주체로 떠올라

외국계 투자펀드가 대주주라는 점에서는 제일은행도 마찬가지다.
제일은행은 최근 합병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합병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로베어 코엔 제일은행장은 “자본금이 충분한 상태”라며 “합병을 하게 되면 파트너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일은행은 BIS 자기자본비율이 11.55%로 한미·우리 은행보다는 낮지만, 자기자본 가운데 핵심적인 기본자본 비율은 7.31%로 가장 높다.
코엔 행장은 합병을 위해 추가 자금이 필요할 경우에는 해외 투자를 유치한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제일은행의 주도적 합병에 대해서는 직원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제일은행 노동조합 윤희석 정책1부장은 “피합병이 아니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며 “뉴브리지도 피합병보다는 주도적인 합병을 선호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뉴브리지는 투자펀드이면서도 한국의 금융산업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며 “조기 매각으로 방향을 틀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고 말한다.
한 금융권 관계자도 “뉴브리지는 그동안 영업점 시스템을 대폭 뜯어 고치고, 정보기술(IT) 투자에도 적극적이었다”고 평가하고 “단기 차익을 노렸다면 그 정도로 투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일은행의 생존전략은 비교적 뚜렷하다.
우선 2004년까지 자산 40조원, 세전 자기자본이익률(ROE) 25%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코엔 행장은 이렇게 되면 어느 정도 완결된 수익구조를 갖출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유럽처럼 중소형 은행도 차별화된 상품으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제일은행 강원경 부부장은 “그렇다고 제일은행이 중소형은행으로 계속 가겠다는 것은 아니며, 합병기회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다”고 말했다.
조흥은행 인수가 좌절된 이후 제일은행이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은 신용카드사 인수다.
강원경 부부장은 “선진국도 신용카드 연체율 폭증을 모두 경험했다”며 “지금은 카드사가 성장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제일은행은 그동안 쌓아온 리스크 관리 능력도 카드사 운영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외환은행-“자본 부족 발목, 기업가치 높이자”

외환은행의 상황은 한미은행이나 제일은행과는 약간 다르다.
32.55%의 지분을 가진 독일계 코메르츠은행이 대주주이긴 하지만, 한국수출입은행과 한국은행이 각각 32.50%, 10.67%의 지분을 갖고 있어 정부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코메르츠은행은 여신담당 부행장과 국제금융 담당 부행장을 파견해놓고 있을 뿐이다.
정부가 은행 민영화를 이유로 지분 매각을 서두를 경우, 합병 논의가 언제든 급부상할 수 있다.


주가 하락으로 손실을 많이 본 코메르츠은행의 입장도 중요한 변수다.
코메르츠은행의 지분매입 단가는 주당 8천253원으로 현재 주가는 이 가격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일부에서는 코메르츠은행이 추가손실을 줄이기 위해 손절매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최근 코메르츠은행의 경영상태도 악화돼 있어 이런 추측을 부채질 하고 있다.
하지만 외환은행 내부의 판단은 다소 유보적이다.
외환은행 노동조합 김지성 위원장은 “코메르츠는 독일계 상업은행으로 단기차익을 노리는 미국계 투자펀드와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며 “지분을 처분하더라도 최소한에 그칠 것”이라고 예상한다.


외환은행의 취약한 자본 구조도 변수다.
외환은행의 BIS 자기자본비율은 9.31%로 금융감독위원회의 권고치인 10% 아래로 떨어졌다.
외환은행 박병규 경영전략부 차장은 “자본 부족이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주식시장의 여건이 좋지 않아 증자가 어려운 만큼, 외자유치나 하이브리드 채권 발행으로 올해 안에 5천억원 정도 자본을 확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외환은행은 자신들을 다른 은행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것은 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김지성 노조위원장은 “외환은행은 한국수출입은행을 통한 우회출자를 제외하고는 공적자금을 거의 지원받지 못했다”며 “지난해까지 7조원의 부실을 털었는데, 그중 5조원을 자체적으로 벌어들인 영업이익으로 충당했다”고 말한다.
적게는 2조~3조원, 많게는 18조원까지 공적자금을 받아 부실을 턴 다른 은행보다 불리한 입장이라는 뜻이다.
외환은행은 자본 확충으로 걸림돌이 제거되면 비교적 순조로운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외환은행은 외환전문 은행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외환 업무는 리스크가 전혀 없는 매력적인 수익원인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다른 은행이 넘볼 수 없는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다.
박병규 차장은 “환전은 단순 업무로 대형은행이 가격으로 치고 들어올 수 있지만 송금이나 무역금융은 상당한 시설투자와 인력투자가 필요하다”며 “외환은행이 확실하게 규모의 경제를 확보할 수 있는 분야”라고 말한다.


외환은행은 안정적인 외환 수수료 수익에 힘입어 전체 수익에서 수수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25~35%로 시중 은행 중에서 가장 높다.
박병규 차장은 “전통적 예대업무를 줄이고, 약간 더디고 어렵더라도 수수료 수익의 비중을 꾸준히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밝힌다.
외환은행은 일단 자체 성장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인 뒤 합병이나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주도적으로 모색한다는 전략이다.



조흥은행-매각협상 급류, 앞날 ‘안개 속’

조흥은행의 매각협상이 최종 단계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80%의 지분을 갖고 있는 예금보험공사와 인수를 희망하는 신한금융지주 간에 가격차가 워낙 큰데다, 조흥은행 노동조합이 신한금융지주의 인수자격과 자금조달에 문제가 있다면서 매각절차 중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냈다.
1조6천억원어치의 상환우선주를 발행해 인수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빚으로 은행을 인수하는 것을 금지한 은행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조흥은행의 독자생존 가능성에 대한 의견도 엇갈린다.
조흥은행 노동조합 이용규 부위원장은 “정부가 지나치게 대형화에 집착하고 있다”며 “공정 경쟁이 가능하도록 해주면 중소형 은행도 각자의 핵심 역량을 갖고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매각협상이 본격화되면서 그동안 준비했던 지주회사 추진 방안은 전면 중단된 상태다.
지난해 조흥은행은 신용카드 부문을 분리하고, 방카슈랑스 전문 보험사를 조인트 벤처로 설립해 지주회사 체제를 갖춘다는 구상을 세우고, 구체적인 작업을 진행했지만 정부의 지분 매각과 얽혀 있어 모두 무산됐다.


조흥은행 박찬 경영전략부장은 “경쟁력 강화가 반드시 대형화나 겸업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며 “경쟁력을 확보하지 않은 채 몸집만 키우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박찬 부장은 차별화된 경쟁력은 현재 갖고 있는 핵심 가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가 꼽는 조흥은행의 핵심 가치는 가장 오래된 브랜드와 안정된 고객기반, 학교·법인·법원 등 특수기관과의 깊은 유대관계다.
박찬 부장은 “금융 시장이 워낙 좁기 때문에 비즈니스의 차별화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하지만 고객 정보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의 차별화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