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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영업비밀이냐, 취업의 자유냐
[포커스] 영업비밀이냐, 취업의 자유냐
  • 유춘희
  • 승인 2000.06.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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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클과 SAP,중요 간부 전직 둘러싸고 법정싸움 정부기관이나 대기업의 ERP(전사적자원관리) 프로젝트를 차지하기 위해 사사건건 충돌해온 오라클과 SAP가, 이번엔 중요 간부의 전직을 둘러싸고 법정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사건은 최근 고급인력의 전직이 활발해지면서 불거진 직업선택의 자유와 영업비밀의 보호라는 해묵은 쟁점을 제기한다.
오라클 “영업에 막대한 지장받는다” 사건은 한국오라클 최승억 상무가 SAP코리아 사장으로 옮겨간 데서 시작한다.
최 사장이 오라클에서 컨설팅 부문을 총괄하면서 ERP 프로젝트 팀장을 맡은 게 화근이었다.
게다가 최 사장은 오라클을 사직하면서 “경쟁관계에 있는 3개 업체에는 절대 옮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3개 업체 중에는 당연히 SAP가 포함돼 있다.
오라클은 이런 최 사장의 이력 때문에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다.
최 사장은 오라클 재직시 ‘SAP 킬러’로 불렸다.
84년부터 KKL컨설팅, CEI비즈니스컨설팅, KPMG 등 컨설팅 업무만 해오다 98년 오라클에 영입된 뒤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SAP에 크게 뒤졌던 ERP 사업을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렸고, 지난해에는 포항제철과 한국통신 ERP 프로젝트를 수주해 SAP의 위상을 크게 흔들었다.
오라클은 최 사장을 상대로 서울지법에 업무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최 사장이 재직할 때 ERP 업무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경쟁사로 갈 경우 영업에 막대한 손실을 끼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경쟁업체에 가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는데, 이를 어겼으니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 사장의 주장은 다르다.
문제의 각서는 오라클로부터 해임통보를 받으면서, 강압에 의해 작성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더욱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항변한다.
SAP쪽도 “변화가 극심하고 전문성이 강조되는 IT업계에서 과도한 취업금지는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불공정 행위”라고 주장했다.
오라클이 최 사장에게 초강수를 둔 것은 최근의 이직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최 사장을 비롯해, 코코넛의 조석일 사장, 시벨시스템의 장동인 지사장, 유니언헬스의 이영수 사장, 인디시스템의 김충언 사장 등 중요 인력이 잇따라 오라클을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경쟁사로 가는 걸 방관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오라클과 SAP의 법정싸움은, 최근 부쩍 잦아진 벤처와 대기업, 벤처와 벤처 사이의 인력이동에 따른 쟁점을 새삼 부각시킨다.
IT업계의 속성상 기술을 가진 고급인력의 이동을 둘러싼 영업비밀 침해 시비는 풀기 힘든 숙제다.
직업선택의 자유와 영업비밀의 보호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지평법률사무소 이은우 변호사는 “이번 사건의 핵심은 각서의 존재나 강제성 여부에 있는 게 아니라, 영업비밀의 침해 가능성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있다”고 말했다.
각서는 법적 효력이 있지만, 직업선택과 전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면 당연히 무효다.
그러나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때는 각서가 유효하다고 인정하기도 한다.
전문인력의 전직과 창업의 자유 제한될 수도 특히 쟁점이 되는 것은 전직이 금지되는 업종의 범위이다.
이 변호사는 “전직자의 새 일이 옛 직장에서 맡았던 직무와 연관돼 불가피하게 옛 직장에서 알았던 영업비밀을 공개할 수밖에 없을 때는 영업비밀 보호를 위해 전직을 막는다”고 말한다.
현재 법원에는 오라클과 SAP 사건말고도, 삼성전자와 LG정보통신, 삼성전자와 미디어링크·넥스콤, 한국통신프리텔과 LG텔레콤의 전직·업무금지 가처분 소송이 제기돼 있으나, 아직 판결이 난 사례는 없다.
현재 최 사장은 법적 대표에 취임하지 못한 채 업무를 보고 있다.
이 변호사는 “영업비밀을 보호하기 위해 전직을 제한할 필요는 있지만, 전직을 금지하는 범위가 넓으면, 전문능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전직과 창업의 기회가 없어진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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