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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D직종에 취업하기도 어렵습네다”
1. “3D직종에 취업하기도 어렵습네다”
  • 황보연 기자
  • 승인 2004.08.1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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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입사해도 편견, 이질감 때문 이직 잦아 …취업보호제 근본적 변화 필요 “직업전문학교를 2년간 다니고 자격증을 7개나 땄지만 소용이 없었습네다.
회사쪽에선 나이가 많고 경력이 없다면서 안 받아주는 걸요. 엊그제는 2살만 덜 먹었어도 입사가 가능했을 거란 이야기도 들었습네다.
” 일자리를 찾고 있는 북한이탈주민 홍동철(가명·37)씨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간다.
지난 8월5일 기자와 만난 날도 땀을 뻘뻘 흘리며 산업인력관리공단의 취업정보를 훑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늘 가방에 7개의 자격증을 넣고 다닌다.
보일러시공기능사, 전기용접기능사, 공조냉동기계기능사 등 작은 수첩모양의 자격증들을 꺼내 보여주는 그의 얼굴에선 억울한 심경이 그대로 묻어난다.
북한에서 직업군인을 지낸 홍씨는 지난 1996년 엄청난 식량난에 처하게 될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탈북을 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살 생각이었지만,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지난 2001년 한국에 왔다.
어렵게 자격증을 하나 둘씩 딸 때만 해도 취업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김씨가 입국할 당시는 정착지원금을 2년에 걸쳐 주던 때였는데, 지금은 그것도 바닥이 났다.
“내년부터는 생계급여도 깎는다고 하던데, 큰일입네다.
노가다(건설일용직)를 하면 그럭저럭 먹고 살 순 있겠지만, 자격증을 따려고 2년이나 공부했는데 아깝지 않겠습네까.” 그는 순천 직업전문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언어 등의 어려움으로 1년만 하면 딸 수 있는 자격증을 재수를 해서 겨우 땄다고 한다.
자격증 7개 따도 취업은 하늘에 별 따기 홍씨처럼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탈북자들이 적지 않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 6월 현재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은 모두 5170명이다.
이 중 3763명이 2001년 이후에 입국하는 등 매년 1천명 이상이 들어오고 있다.
통일부 사회문화교류국 관계자는 “취업실태가 정확히 집계되진 못하지만, 취업을 못해 국민기초생활보호 대상자로 급여를 받는 사람이 전체의 60% 정도”라고 말한다.
10명 중 4명만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고 있는 셈이다.
다른 조사 결과에서도 비슷한 통계를 볼 수가 있다.
통일연구원 김수암 박사는 “지난해 탈북자 737명에 대한 실태조사를 해보니 절반 이상이 취업하지 못한 상태이고, 취업 중인 244명 중에서도 정규직은 36%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김 박사는 “실업상태의 탈북자가 늘어갈수록 남한 내 빈곤층과의 형평성 문제 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와 복잡하게 얽힐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낸다.
현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선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수급급여를 일반 주민보다 훨씬 높게 책정해 놨다.
이 같은 실업난의 원인으로는 주로 충분한 직업교육 및 직업알선의 부재, 국내 기업의 편견과 차별, 구직자들의 높은 기대 수준 등이 꼽힌다.
북한에서의 학력이나 직장경력을 거의 써먹을 수 없는 상황이라 구인난을 겪는 영세한 중소제조업체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취업자들의 직장 만족도도 낮아 이직이 잦다는 것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강일규 박사는 “지난해 20살 이상 국내 정착 북한이탈주민 250명을 조사해 보니 대학을 나온 사람의 28.9%도 생산직이나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대학을 나온 사람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북한에서의 학력을 인정받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지난 2002년 12월에 가족과 함께 입국한 북한이탈주민 김영희(39)씨는 북한에서 기업의 회계담당자로 일해 왔다.
지난해 현대자동차서비스센터의 ㄱ대리점에 경리로 취업한 것도 이런 북한에서의 경력을 살려볼까 해서였다.
처음엔 학원에서 전산회계를 정식으로 배우려 했지만, 용어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다니던 교회 교우의 소개로 단순경리직을 선택하게 된 것. 월급은 한 달에 60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2개월 만에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경리업무 자체는 단순업무라 쉬웠지만 서비스업이다 보니 고객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모두 영어로 돼 있는 자동차 브랜드를 외우는 일도 어려웠지만, 거친 억양과 말투를 반기는 고객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사장이 말투 때문에 고객을 놓친다고 이야기하기에 편지를 써놓고 조용히 나왔죠. 직장도 다녀야 했지만 한국 사람들과 적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수포로 돌아갔어요.” 2개월간의 직장생활에서 그는 전혀 다른 남북한의 직장 문화에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고 털어놨다.
김영희씨는 “해고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곳에 있다가 남한 기업에서 사장 눈치를 보면서 일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말한다.
현재 북한이탈주민 지원단체 간사일과 몇몇 군데 강의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그는 앞으로는 자영업을 할 계획이란다.
중국에 집 사놓는 북한이탈주민도 있어 그러나 무엇보다 북한이탈주민들이 남한의 직장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은 ‘이방인’ 취급이다.
북한이탈주민후원회의 조사(2001년, 553명 대상)에 따르면 직장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점을 묻는 질문에 전체의 22.4%가 ‘편견과 차별’을 꼽았다.
이런 사례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진다.
차별에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 살아온 탈북 구직자들은 한국인 직원과 동등한 대우를 받길 원한다.
하지만 기업주들은 외국인 노동자 취급을 하거나 그보다 더 낮은 임금을 제시해 마찰을 빚고 있다.
더 젊고 고분고분한 외국인 노동자를 훨씬 선호한다는 것이다.
인천 남동공단의 한 기업에서 일하던 박아무개(35)씨도 함께 입사한 필리핀 출신 직원의 급여보다 20만원을 덜 받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사장과 폭행시비가 붙은 끝에 회사를 나왔다.
소위 3D직종에서조차 취업이 그리 녹록지 않은 것이다.
최근 들어선 과거와 달리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가족 단위의 입국이 늘면서 구직자들의 눈높이가 지나치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되고 있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93년까지만 해도 전무했던 가족 단위 입국자가 지난해에는 44%까지 증가했다.
김귀옥 성공회대 연구교수(사회학)는 “반체제형, 생계형 탈북에서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해 연쇄 이동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한다.
먼저 탈북한 사람이 북에 있는 가족들과 통신수단 등이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을 남한으로 오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3D직종보다는 사무원 등 편안한 직장을 갖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매년 1회 코리아리쿠르트가 주최해서 열리는 탈북동포 채용박람회에서도 이런 현실을 엿볼 수가 있다.
지난해 12월에도 박람회를 열어 500명에 가까운 구직자들이 몰렸지만, 최종적으로 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3명뿐이었다.
이정주 코리아리쿠르트 사장은 “여러 군데서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에 웬만한 곳이 아니면 취업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국내 기업 중에서도 일류로 꼽히는 삼성 같은 곳만 선호한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전문직으로 일했던 사람들을 보면 이런 문제는 좀 더 심각해 보인다.
북한의 청진의대 동의학부를 졸업한 뒤 한의사로 8년간 일한 경력을 갖고 있는 김지은(38)씨도 그런 경우다.
지난 8월1일 김현미 열린우리당 의원의 소개로 국회청원을 낸 김씨는 “한의사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는 응시권한을 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002년 3월에 입국한 김씨는 통일부와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북한에서의 학력을 인정받았지만, 보건복지부에서 북한 현지의 증명서류를 요구하면서 벽에 부딪쳤다.
처음부터 남한행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미처 현지의 서류를 가져오지 못한 탓이다.
현재 국내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해 의사가 된 경우를 제외하면, 북한에서의 경력을 살린 북한이탈주민 출신 의사는 단 1명뿐이라고 한다.
군대복무 중에 탈북한 석아무개씨의 경우 군의관 경력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의사 응시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저는 인터넷으로 건강상담이라도 해서 나은 편입니다.
북한에서 의사를 하셨던 분이 한 50명쯤 되는데 이 중에는 전기수리공을 하시는 분도 있고 약장사를 하시는 분도 있어요. 대부분이 저처럼 북한쪽 증명서를 갖고 있지 못한 경우죠.” 김씨에 따르면 전문직 종사자 출신의 입국이 점차 늘고 있는 데 비해 제대로 경력을 살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음대 교수를 하다가 노래교실을 연다거나, 소설가로 글을 쓰던 사람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코리아드림을 좇아 입국한 북한이탈주민들은 서서히 시선을 국외로 돌리고 있다.
이미 미국에 밀입국해 불법체류자 생활을 하며 돈을 벌고 있는 한국 국적의 북한이탈주민들도 있다.
최근에는 북한이탈주민 윤아무개(29)씨가 지난 7월 캐나다를 거쳐 미국 국경수비대에 직접 망명을 신청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중국에 거주하는 게 낫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 돈으로 2천만원 가량을 들여 현지에 62평짜리 집을 사놓고 전세를 줘서 이익금을 챙기더군요. 한국에서 차별받으며 직장생활하느니 이게 낫다는 거죠. 앞으로 7~8년만 지나면 중국이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가 된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 전에 중국으로 터전을 옮기고 싶어요.” 차이나드림 시대가 올 거라며 김영희씨가 귀띔한 말이다.
정착지원제도, 금전보단 자활에 초점 맞춰야 이에 따라 북한이탈주민의 정착을 돕는 제도가 금전적 지원보다 자활 지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착지원금(1인가구시 3590만원)과 일반 영세민보다 높은 수준의 생계급여가 안정적 직장을 찾는 데 되레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생계급여가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취업 대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이들도 나온다.
노동부 북부고용안정센터의 한 관계자는 “처음엔 적극적으로 구직상담을 해오지만, 과정을 죽 지켜보면 취업의욕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전한다.
상황이 이쯤 되자 정부도 최근 개선방안을 내놓은 상태다.
정착지원금의 기본금은 하향 조정하되, 직업훈련 등과 연계한 장려금제도를 신설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직업훈련 이수자가 자격증을 취득한 경우에도 인센티브를 줄 방침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취업보호제에 따른 고용지원금 수급 대상자의 약 32%가 이직 경험을 갖고 있다”며 “앞으로 취업 후 같은 직장에 1년 이상 근무한 경우에 취업장려금을 지급할 예정”이라고 말한다.
취업보호제는 북한이탈주민을 고용하면 사업주에게 임금의 절반 가량(최고 70만원)을 2년간 고용지원금으로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취업보호제에 대해선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생산직, 서비스직 중심의 취업보호제를 전문직, 관리직, 사무직으로도 적용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법적으로 사업장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지만, 고용지원금이 주로 저임금을 지급하는 중소 영세업체에 맞춰져 있어 북한이탈주민들의 이직률을 높인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상당수 북한이탈주민들이 노동부가 지원하는 직업훈련의 대부분은 3D직종에 맞춰져 있다며 볼멘소리는 내는 것과도 맥락이 닿아 있다.
지난 98년부터 2002년 사이에 북한이탈주민의 직업훈련은 58.9%가 컴퓨터나 요리 등 단순 생활기능 습득에 치중돼 있었기에, 실제 취업과의 연계를 높이기 위해서는 좀 더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밖에 북한이탈주민의 직장 내 적응력을 높이기 위해 대인관계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 등도 개발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한으로 온 탈북자는 귀순용사로 우대를 받았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서 식량난에 따른 집단탈북이 늘면서 정부는 사회소외계층으로 탈북자 문제를 다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매년 1천명 이상이 남한행을 택하면서부터는 남북한 사회통합의 시험대로 인식되는 분위기다.
일각에선 지난 2001년에 넘어온 1천명 이상의 북한이탈주민의 지원금이 바닥을 보이는 해가 바로 올해라며, 조속한 자활정책이 나오지 않으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구직활동을 아예 포기해 버리는 실망 실업자가 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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