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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삶] 사랑이 넘치는 수의사를 알게 되다
[책과삶] 사랑이 넘치는 수의사를 알게 되다
  • 서민
  • 승인 2005.09.0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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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지난 6월,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그날, 17년간 나와 동고동락하던 벤지(18살·말티즈)를 저세상으로 보냈다.
그 뒤 난 극도의 공허감에 시달려야 했으며,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벤지의 흔적 때문에 슬픔에 잠기곤 했다.
우유를 마실 때면 유난히 우유를 좋아하던 벤지 생각에 눈물을 적셨고, 뒷산 산책을 하다 벤지가 주로 대변을 보던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다.
요즘도 혼자 있을 때면 가끔씩 “벤지야” 하고 부르는 나 자신을 발견하긴 하지만, 시간이 약인지 이제 어느 정도 그 충격에서 벗어난 듯하다.
난 영화 <벤지>를 비디오로 빌려보거나 <수의사 해리엇의 행복을 전하는 개 이야기> 등을 읽으면서 벤지를 잘 떠나보내려고 노력 중인데, <유쾌한 수의사의 동물병원 24시>는 그 과정에서 만난 책이다.
오랜 기간 벤지를 기른 내 경험에 비추어 이 책의 내용을 음미해 본다.
△ 수의사의 애환 이 책을 보니 정말 다양한 애환이 수의사의 삶에 놓여 있다.
병원에는 안 오면서 개가 애를 낳는다며 새벽 내내 30분 간격으로 전화하는 사람부터 수의사 말은 죽어도 안 듣는 사람, 괜히 병원에 와서 밥만 축내는 사람까지 정말 저자는 별의별 사람을 다 겪는다.
아픈 동물이 수의사를 가장 힘들게 할 거라고 짐작할지 모르지만 정말 수의사를 힘들게 하는 건 골치 아픈 보호자들이란다.
치료비가 비싸다며 무턱대고 자신이 책정한 돈만 내고 가거나, 돈이 많이 든다고 개를 버리는 사람들 얘기에 이르면 도대체 개를 왜 기르는지 묻고 싶어진다.
사람과 개를 비교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이 많겠지만, 이왕 개를 기르기로 했다면 가족의 일원으로 대우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지 않을까? 버려진 개들이 쓰레기통을 전전하다 결국은 차에 치여 죽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가 일시적인 외로움 때문에 개를 사려는 사람들을 극구 말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성욕 저자의 말이다.
“이 땅에서 수캐로 산다는 건 한마디로 비참하다.
적어도 성적인 면에서는 그렇다.
” 즉, 대부분의 수캐들은 일평생을 총각으로 살아야 한다.
벤지 역시 그랬다.
장가를 보내줄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한번 장가를 가본 수캐는 결국 집을 나간다”는 얘기를 듣고 포기하고 말았다.
애당초 욕망이 없다면 장가갈 생각을 안 할 것이니, 저자는 그 편이 가장 좋다고 얘기한다.
즉, 고환 제거 수술을 하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게 잔인하다고 생각했던 난 벤지에게 그 수술을 시키지 않았다.
그럼 벤지는 넘치는 성욕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내 팔에 매달려서 일명 ‘붕가붕가’를 하는 것으로 욕구를 해결했다.
벤지가 원할 때마다 난 눈을 질끈 감고 내 팔을 대줬고, 벤지는 열에 들뜬 표정으로 ‘붕가붕가’를 했다.
나중에는 벤지가 나를 반기는 이유가 오직 그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찌되었건 벤지의 왕성한 성욕은 그의 건강을 입증하는 지표라고 생각했고, ‘붕가붕가’는 죽기 한 달 전까지 계속됐다.
어느 문헌을 보니 남성 호르몬이 면역을 약화시켜 수명을 단축하며, 환관들이 오래 산 것도 고환이 없기 때문이라는데, 만약 내가 일찍 일명 ‘중성화’ 수술을 해주었다면 벤지는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았을까? 벤지가 내 팔에 매달렸던 시간들이 내게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벤지가 없는 요즘은 그때가 무척이나 그립다.
△ 먹이 닭뼈가 위에 남아 결국 개복수술을 해야 했던 강아지를 본 적이 있다.
막대사탕의 막대를 먹어 결국 죽음에 이른 애완견도 봤다.
책을 보니 보호자 중에는 개한테 소주를 먹여서 비틀거리게 만든 사람도 있었단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개한테는 “사료와 물만 먹이라”고. 그 말이 아마 맞을 것이다.
분명 그것이 개의 건강에도, 보호자의 편의에도, 하다못해 대변 냄새 덜 나는 데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난 벤지에게 사람이 먹는 밥을 먹였다.
식도락, 즉 먹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인데 만날 똑같은 사료만 먹으면 지겹지 않겠는가? 벤지를 기르면서 벤지 밥을 뭘 주느냐가 스트레스가 되기도 했지만, 정성껏 만든 밥을 벤지가 먹어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 누명 개에게 누명을 씌우는 사람들이 있단다.
책에 의하면 ‘개 알레르기라서 아이가 호흡기 질환이 잦다’고 한다든지, 개털이 폐로 들어간다고 생각하거나, 개 회충 핑계를 대면서 개를 없애기도 한단다.
그러나 알레르기의 가장 흔한 원인은 카페트 등에 사는 ‘집먼지진드기’이며, 저자의 말대로 “개털이 기관지나 폐까지 들어가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 또 개회충이 걱정되면 병원에 가서 변 검사를 하고 구충제를 먹이면 될 터, 그 어떤 것도 키우던 개를 버릴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저자는 개의 심정을 이렇게 대변한다.
“개는 억울하다!” △ 성대 수술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 개를 키우는 사람 중에는 성대 수술을 시키는 사람이 있다.
버리는 것보다야 나을지 몰라도 참 안쓰럽다.
사람으로 치면 말을 못하는 것이니. “개도 짖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성대 수술이 아닌 목걸이 사용을 권한다.
개가 짖을 때의 진동을 센서가 감지해 전류를 흘려보냄으로써 “개가 놀라 짖지 못하게 되는 원리”란다.
짖을 때마다 전기충격을 주는 게 더 불쌍하다는 사람에게 저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개는 생각보다 똑똑해 금방 원리를 깨우치며 “밖에 나가거나 짖어도 되는 상황에서는 목걸이를 풀어주어 편하게 해줄 수도 있으니 수술에 비해 훨씬 인간적이다.
” 참고로 벤지의 집은 아파트가 아니라서 언제든 우렁찬 목소리를 뽐냈다.
그 낭랑한 목소리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 에필로그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성과는 사랑으로 충만한 수의사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일 게다.
또 이제는 정말 개에게 좋은 보호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말도 안 되는 걸 트집 잡아 열심히 일하는 수의사 선생님들을 괴롭힐 일이 없을 거라는 것도. 낄낄거리며 책을 읽다 보면 동물을 키우는 사람에겐 그들이 알아야 할 거의 모든 정보가,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사람과 동물의 아름다운 공존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것도 이 책의 미덕. 간만에 읽은 유쾌한 책이어서 좋긴 하지만, 이걸 읽고 나니 벤지를 보낸 후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겠다던 내 결심이 마구 흔들린다.
이를 어쩐담. 유쾌한 수의사의 동물병원 24시 박대곤 지음 부키 펴냄 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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